바지에 껌 묻었어요!
아들아!
언젠가 지교회 입당예배를 가던 중 망향 고속도로 휴게소에 잠시 쉬면서 호떡을 하나 사먹었단다. 네 누이 초현 전도사와 운전해주는 김 집사랑 셋이서 말이다. 나는 옆에 자리가 있기에 무심결에 앉아 호떡을 맛있게 먹고 일어났는데 네 누이가 그러는 거야. 바지에 껌이 묻었다고. 참 난감하더구나. 입당예배를 가는 길인데 모양새가 빠질 위기였단다. 그러자 김 집사가 휴게소 매점에 가서 물티슈를 사다가 바지에 껌을 다 떼어줬단다.
작은 사건이지만 생각에 잠기게 하기에는 충분한 사건이었지. 만일 네 누이나 김 집사가 없었다면, 나는 뒤에 껌이 붙은 줄도 모르고 예배장소에 가서 망신을 당했을 게야. 나는 뒤를 볼 수 없기 때문이지.
왜 하나님은 뒤를 볼 수 없게 우리를 만드셨을까? 그건 내가 볼 수 없는 곳을 봐주고 그것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주위 사람을 만들라는 뜻이 아닐까? 충고요, 훈계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거지. 그러나 솔직히 충고나 훈계를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니? 아첨인 줄 알지만 좋은 말이나 해주는 사람을 좋아하지.
아들아!
가장 좋은 친구가 누구인지 아니? 밥 사주는 친구가 아니란다. 너의 단점을 가감 없이 말해줄 수 있는 친구, 너의 뒤 자태를 너 대신 봐줄 수 있는 친구가 가장 좋은 친구란다.
성경에는 충고를 들어 성공한 자가 있는가 하면, 껌이 붙었다고 했더니 버럭 화를 내서 창피를 당하고 망한 자가 있단다. 다윗이 전자라면 사울과 르호보암이 후자에 속하지.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단다. “너는 권고를 들으며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면 네가 필경은 지혜롭게 되리라”(잠19:20).
사람들은 ‘도둑이 들라면 개도 안 짖는다’고 하지. 그러나 왜 도둑이 들었는데 개가 안 짖었겠니? 다만 주인의 귀가 막혀서 못 들은 게야. 충언은 곧 쓴 소리란다. 이 쓴 소리를 달게 받을 줄 아는 자가 지혜로운 자야.
나는 네가 자존심을 밟으면서도 충고를 해줄 수 있는 친구를 사귀길 바란다. 아부나 떠는 친구를 버리고 너를 위해 쓴소리를 하는 친구 말이다. 껌 묻은 바지를 입고 다니지 않으려면.
朋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