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신다 (요11:35~44)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눅18:27).
이 분이 우리가 믿는,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분입니다(롬4:17). 한 마디로 그 분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에게는 불가능이 많을까요? 분명히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2)라고 말씀하셨는데, 왜 다 안주실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상점에 가서 물건을 구입하려면 돈을 내야지요? 물건이 아무리 많아도 돈을 내밀지 않으면 절대 내어주지 않지요? 그러나 돈을 주면요? 학벌이 어떻던, 얼굴이 어떻던, 가문이 어떻던, 성격이 어떻던 물건을 주지요?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해주실 능력과 마음과 사랑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먼저 내밀어야 하는 게 있는데,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문제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보십니다. 홍해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믿음을 보신다 이 말입니다. 문제에 좌절하지 말고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문제가 우리에게는 태산 같아 보이지만, 하늘을 보좌 삼으시고 땅을 발등상 삼으시는 분께는 정말 가소로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비인 나사로가 죽은 사건으로 비롯됩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몹시 사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비보가 예수님께 들려왔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예수님은 이틀이나 더 머물다 떠나셨습니다. 그 초상집에 당도하셨습니다. 두 자매는 예수님을 보자 너무 늦게 오셨다고, 왜 이제 오셨냐며 울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두 자매에게 요구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네가 믿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썩은 냄새가 진동해도 너는 내가 저를 살릴 줄 믿느냐?” 물으신 것입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요11:40).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시체에서 썩은 냄새가 나는 것 따위는 예수님께 별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아마 백골이 되어 있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마른 뼈들에 살을 입혀 군대를 만드시는 분이므로 이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겔37). 그들이 ‘내가 믿나이다’ 하고 믿음을 보이자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끌어내셨고, 살리셨습니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라합. 이들은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인물들입니다. 이들은 큰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역사를 이룬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들에게만 강력하게 역사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들 앞에 모두 공통적으로 붙은 말은 ‘믿음으로’입니다. 하나님이 이들에게 크게 역사하신 것은 이들의 믿음이 남달랐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는 것을 본 베드로가 자기도 물 위에 걷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의 믿음대로 그는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이 흔들리자 바로 물에 빠졌습니다. 예수님은 똑같이 역사하셨지만, 베드로의 믿음이 그를 물 위에 걷게도 하고, 물속으로 빠지게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왜 아무 역사도 일으키지 못하고 떠나셨습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목수의 아들로만 봤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믿음이 없을 수밖에요. 그러나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은 베드로는 교회의 반석이 되었고, 천국 열쇠를 받았습니다. 소경 바디매오가 고침을 받은 이유를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막10:52)고 하셨고,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나은 것도(눅8:48),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이 병에서 나음을 입은 것도(마15:28) 역시 그의 믿음 때문이었음을 성경은 간증합니다.
바울도 그랬습니다. 루스드라에서 태어날 때부터 걸어본 적이 없는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은 그 앉은뱅이에게서 걸을 만한 믿음을 봤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행14:9~10).
여러분, 하나님은 믿는 자 속에서만 역사하십니다(살전2:13).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11:23). 믿음만 있으면 산을 들어서 바다에 던질 수 있습니다.
어른들이 그러시지요? 세상에는 맛있는 것도 너무 많고, 가볼만한 곳도 너무 많고, 좋은 것도 너무 많은데 돈 없는 게 문제라고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무한하신데 우리의 믿음이 없는 게 문제인 것입니다. 문제가 큰 것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없는 게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고 안타까워하신 것입니다.
27년 전쯤의 일입니다. 속리산 근처 교회에 부흥회를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부흥에 어느 교회의 목사님이 소아마비를 앓고 있는 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이 목사님이 전도를 나가면 마을 사람들이 ‘당신 아들이나 고치라’며 비꼬았나 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하여 이 목사님을 비롯해 사모님과 목사님의 어머니까지 제가 오면 이 아이가 꼭 고침을 받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40일 작정금식기도를 하면서 부흥회에 참석했습니다.
제가 그 교회에 당도해서 강사 방이라고 안내를 받은 곳은 주최측 목사님 사택의 방 한 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두컴컴한 방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 방에 누가 떡 하니 앉아 있는 것 아닙니까? 환한 대낮에 컴컴한 방에 들어가니 잘 보이지 않아서 더욱 놀랐습니다. 알고 보니 그 목사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강사인 내 방에 데려다놓은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그 아들을 안수했는데 아들이 나아서 걸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날이 그 가족의 40일 금식기도 마지막 날이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그 아들이 장성하여 미얀마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목사님 가족의 믿음이 오늘의 아들을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 9월 8일 우리는 대한민국의 심장부인 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평화통일 기도성회’를 갖습니다. 본래 5월 20일에 개최하기로 했었지만, 세월호 사건으로 미뤄졌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더 좋은 날짜로 허락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또한 우리가 기도하면 분명히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아름다운 이 강산을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제 믿음대로 가장 좋은 추석명절에 성회를 허락하셨습니다. 당연히 우리의 기도가 상달되어 이 나라가 평화통일 되리라 믿습니다.
홍해 같은 문제가 있습니까? 여리고 같은 문제가 있습니까? 사업이, 단체가 죽었습니까? 아들이 필요합니까? 열매가 없습니까?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모세의 하나님, 나사로의 하나님, 사라의 하나님이 능히 이 모든 일을 해결하실 것입니다. 우리 앞에 있는 것들은 다 허상입니다. 믿음만 있으면 그것들은 다 깨질 것이고, 우리의 실상은 가장 좋은 것으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가장 선한 것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지세요. 돈을 많이 내면 값진 것을 살 수 있듯이, 흔들리지 않는 큰 믿음으로 입을 크게 벌리면 하나님이 분명히 채우실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히11:6).
할렐루야!
홍해를 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라
앞의 문제는 허상이다
실상은 믿음대로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