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모습을 거울에서 찾으라 (고전10:1~15)
아침에 일어나면 누구든 거울을 보고 얼굴을 닦고, 옷매무새를 바로 잡습니다.
꼼짝 못하는 중환자이거나 정말 게으른 사람이 아니고는 누구도 이 일을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여자들은 외모에 신경을 쓰기 때문에 거울 보는 것을 즐깁니다.
요즘은 남자들도 거울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저도 거울을 자주 봅니다. 사람을 만나러 갈 때나 설교하러 갈 때, 거울을 보고 머리가 헝클어졌으면 머리를 다시 빗고, 이빨에 고춧가루가 끼었는지 확인하고, 넥타이가 삐뚤어지지는 않았는지, 단추는 잘 잠갔는지 확인합니다. 거울에 나를 비추어 수치를 당치 않게 하고, 아름답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내 영혼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고로 성경에 내 영혼을 비추어 살피고, 내 삶을 비추어 삶 속에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추한 것을 제하여 버려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혼·육에 흠 없고 주름 잡힌 것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6~17).
거울을 보고도 자신의 추한 모습을 바로 잡지 않는 사람은 수치를 당해도 쌉니다. 동일하게 성경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자는 눈이 있으되 소경으로 이생에서 실패는 물론이요, 영생의 길에도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 설교 누가 좀 들었으면 좋겠다.”, “이 말씀은 누구한테 하는 말씀이다.”라고.
그러나 여러분, 성경에 ‘누구’를 대입할 것이 아니라 ‘나’를 대입하고, 성경의 사건에 ‘나’를 적용시켜 깨달아야 합니다. 나를 적용시켜서 나를 고치고, 나를 다스려야 합니다. 절대 다른 사람을 비추지 마십시오. 거울로 남이나 비추고 있는 자는 분명 나쁜 일을 도모하려는 사람이니까요.
먼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의 일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분명 아담은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는 손대지 말라는 음성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들었습니다. 그런데 뱀의 유혹에 넘어간 아내 하와의 말을 듣고는 마음이 흔들려 결국 그 열매를 먹고 맙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재앙은 물론 인류를 죄의 구덩이 속에 쳐 넣었습니다.
여기 ‘아담’ 대신 ‘나’를 넣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는데 믿음이 없는 아내의 말을 듣고는 마음이 흔들린 적은 없는가?’, ‘나는 선악과를 따먹은 일은 없는가?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을 한 적은 없는가?’ 비춰봐야 합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것을 해라 했건만, 아내의 눈치를 보느라 못한 적은 없는지, 현대판 선악과인 십일조를 남편 눈치 보느라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이 금기하신 일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거울을 비추어 이빨에 고춧가루가 끼었으면 얼른 빼내야 하는 것처럼, 영적 거울에 추한 모습이 비추걸랑 어서 회개하고 그 길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그리고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믿음이 없는 아내와 의논하지 않았던 아브라함의 길로 행해야 할 것입니다(창22).
그 다음, 가인과 아벨을 볼까요? 창세기 4장에는 하나님이 동생인 아벨의 제사는 받으신 반면, 자신의 제사는 받지 않은 것에 화난 가인이 아벨을 쳐 죽인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인은 제사가 열납되지 않자 자신을 돌이켜 살피지 않고 오히려 아벨에게 분노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자신을 살폈더라면 좋았을 것을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우리 속담처럼 아벨을 향한 분노가 커져 인류역사상 최초의 살인자로 이 세상을 떠돌게 됩니다.
이 거울을 보고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 곧 예배요, 예물을 드려야겠구나.’, ‘가인처럼 예배의 형식은 있지만 진정과 신령이 없으면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구나.’ 하고 말입니다. 또한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플 것이 아니라, 함께 기뻐하며 축하해줘야 하는 것을 깨닫고, 그동안 남이 출세하면 배 아파하고, 남이 좋은 차 사면, 남이 좋은 집 사면, 남의 자식이 일류대학 가면 배 아파했던 것을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사울과 다윗이라는 거울도 봅시다. 하나님은 분명히 사울에게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모든 사람과 육축까지 죽이라고 하셨습니다(삼상15:3). 그런데 사울은 아각을 사로잡고 양과 소 중에 좋은 것을 죽이지 않고 남겼습니다. 이를 알게 된 사무엘이 책망하자 사울은 회개하지 않고 이렇게 핑계를 댔습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지내려고 그랬습니다.(삼상15:21).” 이에 하나님께 버림을 당했습니다.
다윗도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다윗은 그의 신복 우리아의 처를 취하고 잉태하자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장을 세워 그를 전사하게 합니다. 이에 하나님이 선지자 나단을 보내어 그를 책망합니다. 그러자 다윗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침상을 적시는 회개를 합니다(시6:6). 그런 그에게 하나님의 용서와 위로가 있었습니다.
사울과 다윗은 둘 다 범법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는 버림을 당해 비참하게 되었고, 하나는 ‘내 마음이 합한 자(행13:22)’라는 칭호를 얻기까지 했습니다. 대체 둘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바로 회개를 했느냐 안했느냐의 차이입니다.
이제 거울을 비춰봅시다. ‘나는 매일 회개하고 있는가?’, ‘나는 죄를 짓고 핑계나 대면서 이리저리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우리의 행위로서는 아무도 구원에 이를 수 없고, 의인의 반열에 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그의 피로 정결함을 받아야 깨끗함을 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곧 죄가 문제가 아니라 회개가 문제라는 겁니다.
또 요셉과 삼손도 우리의 거울입니다. 요셉은 노예로 팔려 애굽왕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거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가 요셉을 날마다 유혹합니다(창39:10). 그것이 마음대로 안 되자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맙니다. 그래도 요셉은 끝까지 남의 아내와 간통하지 않았고, 자기를 신임해준 상사를 저버리지 않았으며, 하나님 앞에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삼손은 들릴라의 유혹에 넘어가 자기의 머리카락을 자르면 힘이 없어진다는 천기를 누설하고 맙니다(삿16:17).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잡혀 눈이 빠지고 옥중에서 맷돌을 굴리는 비참한 신세가 됩니다. 여기에 ‘나’를 적용해봅시다. 나는 간음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약속을 누설하고 다니지는 않은가, 더 나아가 영적간음은 하고 있지 않은가 거울에 비쳐봐야 합니다.
오늘 본문도 거울삼으면 깨달을 것이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악을 즐겨서도 안 되며, 우상을 숭배해서도 안 되고, 하나님을 시험해서도 안 되며, 원망이나 불평을 해서도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자는 다 광야에서 넘어지고 엎어진 것처럼, 우리도 그리하면 되는 꼴이 없을 뿐 더러 결국 가나안, 곧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11절에는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난 잘못을 들여다보고 고칠 것은 고치고, 바로 잡을 것이 있으면 바로 잡으라는 것이 본문의 교훈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12절 말씀에 그 답이 있습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인생이 넘어지지 않도록, 신앙생활 하다가 넘어지지 않도록 늘 성경인 거울을 보고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아침에 머리를 빗었어도 오후에 바람 불면 머리가 다시 헝클어질 수 있으니 다시 거울을 보라는 말씀입니다. 말씀대로 잘 살고 있는 듯하지만, 세파에 시달리다보면 영혼이 흐트러질 수 있으니 늘 성경을 상고하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거울을 보고 깨끗하고 반듯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듯, 영적 거울인 성경을 통해 온전한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금 거울에 비친 당신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할렐루야!
날마다 거울을 보는 자는
날이 갈수록 아름다워진다
성경은 내 영혼의 거울
네 영·혼·육을 점검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