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지금 어떤 생각으로 사는가? (롬8:5~8)
남미 집회에 갈 때마다 미국에서 합류하는 김성자 전도사가 있습니다. 그는 60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남미 집회에 갈 때면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햇반과 컵라면, 그리고 직접 담근 고추장에, 갖가지 밑반찬을 바리바리 싸가지고 남미 구석까지 찾아옵니다.
어떤 때는 세관에 걸려 그것들을 뺏기는 일을 당하기도 하지만 그는 그 일을 기쁨으로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를 ‘할멈’이라고 부르는데, 언젠가 제가 이렇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아니, 할멈. 할멈은 왜 그 고생을 사서하며 다니는 거요?” 그랬더니 김 전도사가 딱 한 마디 했습니다. “그날의 상이 있으니까요.”라고요.
김 전도사는 오래 전에 한 꿈을 꾸었는데 제 몸에 수많은 빨대가 꽂혀있고, 그 빨대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제 몸의 진액을 다 빨아먹는 것을 보고는 ‘내가 저 분을 도와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고 덧붙였습니다.
적어도 김 전도사는 어떻게 살아야 옳은지, 그 삶의 끝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아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은 밝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5~6).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말하게 되어 있고,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늘 비유하는 말이지만, 똥자루에서는 똥이 나오고, 쌀자루에서는 쌀이 나오는 겁니다. 똥자루에서 쌀이 나올 수 없다는 겁니다. 즉 무슨 말인가 하면, 육적인 생각, 세상적인 생각으로 가득한 사람은 결국 세상적인 말을 하고, 세상을 좇아 살게 되어 있지만, 영의 생각을 하는 자는 무의식 속에서도 ‘예수’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신체 일부를 찌르면 어디서든 피가 나오지요? 그것은 그 부위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 부위가 썩었으면 피가 나오지 않을 겁니다. 동일합니다. 우리를 찔렀을 때 ‘예수’가 나오면 우리가 영적으로 살아있다는 증거이나, 그렇지 않으면 살아있으나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제가 늘 ‘백문백답(百問百答)이 예수, 천문천답(千問千答)이 예수’ 라고 하는 것은 제 생각이 오직 영적인 것으로 가득하기 때문이고, 영적으로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코카콜라의 회장인 네빌 이스델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몸을 자르면 붉은 피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검은 코카콜라가 나올 것이다’라고. 그 사람은 코카콜라 외에 다른 생각은 안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신은 어떤 생각으로 살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 자신은 ‘내가 어떤 생각으로 사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가 육신의 생각으로 가득 찼는지, 아니면 영의 생각으로 가득 찼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진단해보십시다. 진단한 결과, 만일 육신의 생각으로 가득 찼다면 당장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암도 조기 진단하면 살 수 있는 법, 당신도 지금의 진단 결과를 보고 돌이킨다면 다시 살고, 영원히 평안을 누리나, 방치하면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를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야 육신의 생각으로 사는 게 무방합니다만, 예수를 모신 당신이 육의 생각으로 산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천국열쇠를 받은 베드로, 그러나 주님이 장차 당하실 일에 대하여 말씀하자 베드로가 이를 만류합니다. 그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 주님은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자를 ‘사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세상일을 생각하고, 세상을 좇는다면 주님이 당신을 향하여 뭐라고 하실 지 얼른 감(感)을 잡으셔야 합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시는데, 한 여인이 예수님께 나와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붓자 가룟 유다가 버럭 화를 냈습니다.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막14:4~5). 그는 육신의 생각대로 계산하고 말한 것입니다. 사단이지요. 사람의 일을 생각했으니 말입니다.
가장 어리석은 자가 누구인 줄 압니까? 보이는 것이 전부인 줄 아는 사람이고, 보이지 않는 세계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정작 보이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한 법. 한 예로 공기는 보이지 않으나 그보다 귀한 것이 없지 않습니까? 영의 세계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시될 수 있고, 간과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아 무시하고, 보이지 않아 간과하고 살다가는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롯, 그들이 소떼와 양떼가 많음으로 인하여 분쟁이 잦아지자 갈라서야할 판국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롯은 보기에 아름다운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했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신과 후세에게 주시겠다고 하는 땅을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 롯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될 때 아내와 사위를 잃었고, 결국 딸과 동침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의 주인공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언약을 바라본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세상의 것에 목매는 자들을 위해 야곱과 에서의 경우를 더 하겠습니다. 에서는 장자권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당장 그 축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먹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보이지 않는 장자권을 위해 뱃속에서부터 투쟁했고, 결국 그것을 받아냅니다. 야곱이 팥죽 한 그릇에 산 장자권의 축복이 얼마나 큰 것인지는 창세기를 읽어보시면 알 것입니다.
롯이나 에서를 보고 어리석다고 비웃으십니까? 그러나 세상의 물질과 명예, 세상의 것들에 연연해 있는 당신이 바로 롯이고, 에서입니다. 아이가 대학에 떨어졌다고 머리 싸매고 누워있으면서 당신이 성령을 소멸하고, 첫사랑을 잃은 것에는 아무런 감각조차 없는 당신이 롯이요, 에서입니다. 또 사람에게 칭찬받으려고 온갖 노력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칭찬 듣는 것에는 등한시하는 당신이 바로 롯이고, 에서입니다.
당신이 갈림길에 서 있다고 칩시다. 한쪽 길은 넓게 아스팔트가 깔렸고, 그 옆에 먹음직스런 과일나무가 즐비하나 저 너머 그 길 끝에는 낭떠러지와 수렁이 있고, 다른 한 길은 좁고 울퉁불퉁하여 걷기도 힘들고 변변찮은 과일 나무 하나 없는 길이지만 그 끝에 아름다운 신세계가 있는 길 앞에 당신이 서 있다고 칩시다.
그 때 당신은 어떤 길을 택하겠습니까? 설마 당장 편하자고, 당장 만족하자고 낭떠러지나 수렁이 있는 길을 택하지는 않겠지요? 누구든 힘들더라도 아름다운 신세계를 택할 것입니다. 영의 것을 바라보고 영의 것을 좇아 사는 길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를 안다면 세상 것쯤은 뒤로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결국을 안다면 세상은 끊어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의 말처럼 현재의 고난이 장차 받을 영광과 비교나 되겠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속을 다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 분은 겉으로는 거룩하고 영적으로 보이지만, 속으로는 육으로 가득한 사두개인과 서기관, 바리새인을 향하여 ‘독사의 새끼들’, ‘회칠한 무덤’ 같은 자들이라 질타하시고,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없다고 경고하신 것입니다(마23:33). 뜨끔하지 않습니까?
인생은 나그네길입니다. 잠시 머물다가는 캠핑 같은 삶입니다. 그런데 캠핑 와서 설치한 텐트나 캠핑도구들에 연연해서 더 챙기려다가 고향을 잊는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자가 아니겠습니까?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자가 땅의 것 때문에 ‘죽네, 사네’ 해서야 되겠습니까?
신령한 것을 사모하고, 어떡하면 주님을 더 사랑하고, 어떡하면 주님을 더 자랑할 수 있는지 생각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의 마음과 생각을 땅에 붙잡아두는 것이 있걸랑 잘라내고, 하늘의 소망을 두고 살아봅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이요, 생명과 평안을 얻는 삶이니까요.
지금 당신은 무슨 생각으로 사십니까?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3:2). 할렐루야!
당신은 무슨 생각으로 살고 있나요? 당신 마음은 무엇으로 가득한가요?
똥자루에서는 똥이 나오고 쌀자루에서는 쌀이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