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자의 최고의 축복은 성령이다 (행1:1~11)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인류의 모든 죄를 속량하신 것이 인류가 받은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믿는 자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은 바로 ‘성령’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이 믿는 자 속에 들어오신 것이니, 믿는 자로서 이보다 영광스럽고 경사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구약시대는 하나님 아버지가 직접 다스리던 시대였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면서 모든 권세를 예수님께 주셨습니다(마28:18). 예수님은 공생애를 마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다 대속하셨고, 구원의 일을 다 이루신 후에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떠나가신 지 50일 만에 당신의 이름으로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또 다른 보혜사’라 함은 예수께서 먼저 우리의 보혜사가 되사 우리를 지키시고 변호하시고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성령시대요, 성령이 일하시는 시대입니다. 고로 오늘날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성령을 통해서만 일어나며, 성령이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시며,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 이름으로 오신 하나님의 영입니다. 곧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셨다 함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영으로 들어오시는 것입니다(행5:3~4). 그래서 믿는 자의 최고의 축복이 성령인 것입니다.
당신은 천상천하(天上天下)에 제일 좋은 선물인 성령을 받았습니까? 성령은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그만인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왜요? 요한복음 3장 5절에는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고,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고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은 자와 성령을 받지 않은 자를 저는 이렇게 비유하고 싶습니다. 에스겔서 37장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마른 뼈들이 있는 골짜기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그 뼈들이 붙고, 거기에 살과 가죽이 붙으라고 명하라 하셨고, 그대로 행하니 그것들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생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겔37:9)라고 명하니 생기가 들어가매 그것들이 살아 일어나 큰 군대를 이루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을 받지 않는 자는 살아있는 모양은 있으나 죽은 자입니다. 생기가 없습니다. 생기가 들어가니 저들이 살아 움직인 것처럼, 성령이 임해야 우리가 진정 살아있는 자요, 살아 움직일 수 있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정말 그럴까 봅시다.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 동안이나 스승인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많은 기사와 표적과 이적들을 최단거리에서 보고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자 그들은 도망치기 바빴고,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어린 계집아이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저주까지 하면서요. 왜요?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령을 받자 놀랍게 변했고,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요20:22). 당연합니다. 생기가 들어갔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비겁하고, 겁 많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말에 둔한 그들이 나가 목숨을 내놓고 하늘나라를 전파하다 순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은 사람을 이렇듯 변화시킵니다. 당신 자신을 생각해보세요. 성령받기 전과 후가 얼마나 다른지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절대 사람의 의지나 학술, 논리로 할 수 없습니다(고전2:13). 사람의 의지는 환경에 의해 꺾일 수 있고, 학술이나 논리로는 다른 학술이나 논리에 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이 일하셔야 사람을 감화시킬 수 있고, 담대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한꺼번에 3천여 명을 회개시킨 것은 그의 힘이나 지식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일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또 바울이 환난과 핍박과 굶주림과 매 맞는 일 앞에서도 주저하지 않은 것은 성령에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당당히 25년의 예루살렘 교단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이는 이초석의 힘이나 능이나 지식으로 이룬 교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이 주장하시는 대로, 그 분이 이끄시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핍박과 환난 중에도 전진할 수 있었던 것도 늘 성령이 저와 함께 하시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기 전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행1:4).
성령이 임하시면 은사가 따릅니다. 일을 하려면 연장이 필요한 법, 하나님의 일도 도구와 연장을 필요한데 그것이 은사입니다(고전12:4~11). 그중 방언은 성령이 임했다는 외적 표현입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에서 방언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방언하는 것이 덕이 되지 못하고, 잘못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방언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14:39). 그리고 덧붙이기를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14:18)고 했습니다. 방언하기를 그치지 마십시오. 방언은 성령을 받았다는 증표입니다. 제가 오늘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방언 기도를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사모(思慕)하는 자에게 오십니다. 그 분은 지·정·의를 가지고 계신 인격자이시며, 우리의 의지를 절대 초월하시지 않는 분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사모하는 자에게, 환영하는 자에게만 오십니다. 당신의 마음을 열 때 들어오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단비가 내려도 장독 뚜껑을 열어놓지 않으면 한 방울의 비도 장독에 들어가지 않듯, 당신의 마음의 뚜껑을 닫아놓으면 절대 그 분은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그 분은 훼방하면 훼방 받으시는 분입니다(마12:31).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는 말씀대로 당신이 문을 열어야 성령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보혜사로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성령을 받으셨고,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부음 받았다고 했습니다(행10:38).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자동차에 기름을 한 번 넣으면 평생 자동차가 움직입니까? 휴대폰의 배터리를 한 번 충전해놓으면 평생 전화가 됩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성령도 늘 충만함을 입어야 합니다. 늘 충만함을 입지 않으면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소멸치 말며”(살전5:19)라고 한 것입니다. 늘 기도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입읍시다. 그래서 악한 마귀 궤계를 물리치고 넉넉히 천국에 들어갑시다(엡6:10~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 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 2:17).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