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하자(신6:10~13)
언젠가 한 대학 수험생이 안수를 받겠다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좋은 대학에 꼭 들어가고 싶다며 제게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도를 해줬습니다. 몇 달 후, 그 학생이 침울한 표정으로 저를 다시 찾아왔습니다.
“대학에 떨어졌습니다. 목사님이 기도해주셨는데, 제가 왜 떨어진 거죠?” 그는 거의 시비조로 제게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학생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봐. 그 때 내가 어떻게 기도해줬는지 기억나는가? 나는 분명히 공부한 것이 기억나고 생각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네. 자네가 대학에 떨어진 것은 내 기도가 짧아서가 아니라 자네가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일세.”
그렇습니다. 콩 심으면 콩이 나는 것이고, 팥 심으면 팥이 나는 겁니다. 또 씨를 많이 뿌리면 당연히 많이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동일하게 노력을 많이 하면 많이 이루고, 많이 공부하면 성적이 많이 오르는 것입니다. 제 말이 맞지요? 제 말에 반론 없지요? 그런데 문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 이치대로 행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요? ‘기도하면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주시겠지.’ 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 내에 일명 ‘거룩한 백수’들이 많은 겁니다. “그건 세상 이치이지 않습니까?” 하신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약속임을 성경을 통해 증명해 드리겠습니다.
어디 성경을 볼까요?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9). 이는 심은 대로 난다는 말씀이고,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라는 고린도후서 9장 6절의 말씀은 심은 만큼 난다는 말씀입니다. 이래도 그것이 세상 이치라고만 주장하실 것입니까?
일 안하고 놀고 있어도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준다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공중의 새도 먹이시고,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입히시는 하나님이신데, 내가 굳이 뭘 해?’ 이러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절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열 달란트 가진 자와 다섯 달란트 가진 자는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에 주인이 더 있게 했지만, 한 달란트 가진 자는 그냥 땅에 묻어두고 놀다가 주인의 저주를 받은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할 때 금식기도만 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시겠지.’ 하고 매일 기도만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기도하고 난 후, 왕을 찾아가 형편을 아뢰고, 물자지원을 받아 일을 시작했기에 52일 만에 예루살렘 성을 재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성전 짓기를 사모만 한 것이 아니라 그는 힘쓰고 애써서 모든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을 확충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7:7~8). 신앙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인생에서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노력을 하고, 얻도록 찾도록 열리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설교제목이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하자’입니다. 열심을 내라는 한 쪽 신발을 신겨 드렸으니 마저 한 쪽 신발을 신겨 드리겠습니다. 그래야 균형이 잡히니까요. 그것은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심지 않는 데서 거두고, 파지 않은 우물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어째 앞의 말과 전혀 상반된 말인 것 같지요? 앞에서는 하늘만 바라다보지 말고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라고 했는데, 지금은 심지 않아도 거두는 법칙을 말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절대 상반된 말이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밤을 낮 삼아 최선을 다해도 안 되는 게 있습니다.
인간으로서는 안 되는 게 있습니다. 그럴 때 기도하면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앞에는 홍해요, 뒤에는 애굽 군대가 쫓아오는 상황에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이 힘쓰고 애쓴들 해결될 일이 뭐가 있었겠습니까?
그 때 기도하니까, 그 때 하나님을 의지하니까 하나님이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광야에서 먹을 물이 없을 때, 고기가 먹고 싶을 때 사람으로서는 어쩔 수 없지만 하나님은 역사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의 요구가 실현되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이 기적이요, 이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심이 곧 인간에게는 기적이요, 이적이거든요.
하나님은 굶주린 사자의 입을 막아 사자를 베고 잠을 자게 하시는 분이시며, 포도주가 변하여 물이 되게 하시는 분이시며,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분이시며, 마른 뼈에 살이 붙게도 하시며, 마른 막대기에서 싹이 나게도 하시는 분이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기도 하는 분입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며, 알파와 오메가 되신 분이십니다.
딱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은 사람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눅18:27). 그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며, 그 분이 우리 인생을 굽어 살피고 계시니 그 분을 의지하면 심지 않는 데서 거두고, 꾸미지 않은 데서 누리고, 파고 짓지 않은 데서 살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측량할 수 없는 큰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욥9:10).
그런데 더러는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애써도 안 될 때는 누가 해도 안 되는 일이야.’ 네, 사람은 안 되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비인 나사로가 죽어 그 곳에 주님이 가셨습니다. 주님은 두 자매의 눈물을 보시고는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마르다가 말합니다. “주님,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 벌써 냄새가 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11:40).
하나님을 믿으면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행되어야 할 것은 돌을 옮기는 일입니다. 불신앙의 돌, 이성과 논리의 돌, 세상 지식의 돌을 옮겨야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그래야 죽은 기업이, 죽은 가정이, 죽은 교회가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커다란 돌무덤과 같은 견고한 진이 하나님의 능력을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10:4~5).
성경은 신비로 가득합니다. 신비(神秘)가 무엇입니까? 인간의 이론과 인식을 초월한 일을 말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신비가 없다면 하나님이 아니지요. 하나님이 사람과 똑같다면 어찌 그 분은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신이라 하겠습니까? 그 분은 일상 하시는 일이 신비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신비를 우리에게 현실로 주시길 원합니다. 하늘에서 메추라기 떼를 주기 원하시며, 100세인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셨듯이 우리에게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 이루게 하길 원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안 받으려고 합니다. ‘신비주의자들을 조심하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거부합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저는 누가 신비주의자라고 해도 좋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늘 기대하며 살고 있습니다. 내 삶과 우리 교회 성도들의 삶에 하나님의 이적이 늘 일어나길 소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보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지금도 역사하고 계심을 알게 하고 싶습니다.
배가 한 쪽 노만 저으면 계속 제자리에서 빙빙 돌고 맙니다. 양쪽 노를 다 저어야 균형을 잡고 앞으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는 삶과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적을 일구는 삶이 병행될 때 참된 신앙인이요, 빛과 소금이 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1:29). 할렐루야!
감나무 밑에서 입 벌리고 있지 말고
사다리를 타고 감나무에 올라라
성경에서 신비를 빼내어버리면
세상의 책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