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에 속지 말고 자기 것을 찾아라 ( 롬 9:20~21 )
미국의 유명한 갈보리교회의 척 스미스 목사는 한때 빌리 그래함 목사와 늘 자신을 비교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저렇게 많은 군중 앞에서 예수를 증거 하는데, 나는 왜 겨우 70여명의 성도 앞에 서야 하나?’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용단을 내렸습니다. ‘나도 빌리 그래함처럼 해보리라.’ 그래서 단상을 없애고 무선 마이크를 사용하며 흉내 냈습니다. 그런데 그게 자기 스타일이 아닌지라 너무 흉내 내는 것에 신경을 쓰다 보니 그는 그만 설교를 망치고 말았습니다.
스스로 실망한 척 스미스 목사는 목회를 접고 공사장에서 일했습니다. 그런데 공사장에 있던 사람들이 그가 한 때 목사였다는 소문을 듣고는 설교를 해보라고 했습니다. 다시는 설교를 하고 싶지 않았던 척 스미스는 하도 사람들이 간청하는 바람에 설교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의 자기 방식대로. 그랬더니 사람들이 은혜를 받기 시작했고 점차 예배에 참석하는 수가 늘어났습니다. 힘을 얻은 척 스미스는 다시 목회를 시작해서 미국에 300개의 교회를 세우는 큰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저도 그런 적이 있습니다. 하와이에서 목회를 하던 어느 목사가 우리 교회에 와서 부흥회를 하게 되었는데, 그가 지휘자 출신인지라 설교 도중에 피아노를 치며 찬양을 하는데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는 겁니다. ‘와! 정말 멋지다. 나도 저렇게 피아노 치며 찬양을 하고 싶다.’ 그래서 다음 날 당장 피아노 학원을 찾았는데, 피아노 선생 하는 말이 “한 3년은 쳐야 합니다.” 하는 겁니다. 목회 초기인데 3년을 피아노 앞에 매달려 있을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피아노 배우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만일 제가 3년 동안 피아노를 배웠다고 합시다. 그것이 제 목회 스타일과 맞는다고 생각하십니까? 귀신을 쫓는 영적 전쟁터에서 언제 피아노 치며 감미로운 찬양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공장에서 획일적으로 찍어내시지 않았습니다. 똑같은 디자인에 똑같은 사이즈로 만들어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계획하시고 손수 하나하나 빚으셔서 만드셨습니다. 성격도, 모양도, 마음의 크기도, 그리고 재능도 각기 다르게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척 스미스처럼, 저처럼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고, 다른 사람과 같지 않은 것에 한탄합니다. 왜 그러는 줄 압니까?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에 이끌려 미혹되었기 때문에 남의 것이 좋아 보이는 것입니다. 군복무 시절에 간식으로 가끔 빵을 줬는데, 오죽 알아서 동량(同量)으로 자른 빵이었을 텐데 꼭 동료의 것이 내 것보다 커 보이는 것입니다. 왜요? 욕심 때문에요. 그런데 알아야 할 것은 욕심의 결과가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사울과 다윗의 경우입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잘 나가던 사울은 욕심이 잉태되기 시작했습니다.
욕심에 눈이 가려 다윗을 보니 다윗에게는 자기에게 없는 용맹성이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백성들은 다윗의 그 용맹성에 찬사를 보내기까지 합니다. 그러자 시기심에 분까지 발동해서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어찌 되었습니까? 우리를 만드신 토기장이이신 하나님께서 그 토기를 깨뜨려버리셨습니다.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렘18:6).
하나님은 토기장이요, 우리는 그의 손으로 지음 받은 토기입니다. 당연히 토기장이 마음대로 토기를 만듭니다. 제가 한 때 이천으로 도자기를 만들러 다녔는데, 흙을 제 마음대로 빚었습니다. 길게도 만들고, 작게도 만들고, 컵도 만들고, 항아리도 만들었습니다. 흙더러 “어떤 모양으로 만들어줄까?” 하고 물어본 적이 없고, 그릇이 왜 이렇게 만들었냐고 힐문한 적도 없습니다. 동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만드셨든 어떤 쓰임새로 만드셨든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절대 불량품을 만들지 않으셨다는 것이고, 불필요하게 만들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안에 있는 욕심이 우리를 미혹하여 불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사람아 네가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9:20~21). 십계명 중 열 번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바로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입니다.
누구에게나 자기에게 맞는 일과 직업, 옷과 배필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남의 잔디가 푸르게 보이는 격으로 남의 일과 직업이 멋있어 보이고, 남이 입은 옷과 남의 아내나 남편이 좋아 보이는 것은 다 욕심 때문입니다. 남의 아들이 법대 가니까 내 아들도 이유 불문하고 가야하고, 남의 남편이 벤츠 타니까 내 남편도 무조건 타야하는 것이 다 욕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송충이가 갈잎을 먹으면 배탈이 나고, 뱁새가 황새를 쫓아가면 가랑이가 찢어지는 법. 내 것을 찾을 때 비로소 행복한 것입니다. 뱁새는 뱁새대로 사는 겁니다. 누가 그럽디까? 황새가 뱁새보다 행복하다고? 억지춘향은 힘든 것입니다. 춘향이가 아무리 좋아도 제 자리가 아니면 죽을 맛인 것입니다.
중남미 쪽 집회를 가다보면 선인장이 아름드리나무 같이 크게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껏해야 화분에 심기운 선인장이 중남미에서는 어머 어마하게 크게 자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맞는 토양에 심기었기 때문입니다. 동일합니다. 당신 안에 있는 잠재력, 달란트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것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느냐 하면 제 밭에 심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 아이는 분명히 체육 쪽에 달란트가 있는데, 그 아이를 의사가 되게 하려고 의대에 보내놓으니 애가 매일 시들시들한 것이고, 내 남편은 서비스 분야를 좋아하는데 관리직에 꼭 있으라고, 남의 눈이 있으니 절대 서비스는 안 된다고 하니 남편이 기가 없고, 제 자리를 못 찾는 것입니다. 좋은 씨면 뭐합니까? 자갈밭에 떨어지고, 가시밭에 떨어지면 제 아무리 좋은 씬들 무슨 수로 열매를 맺는답니까? 전자(前者)는 제 둘째 아들 녀석 이야기고, 후자(後者)는 한 때 삼미그룹의 부회장이었던 서상록씨 이야기입니다.
제 아들은 성악 쪽에 자질도 있고 흥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내 녀석이 무슨 노래냐고, 목사 되라고 하면서 애 자질을 꺾었습니다. 그랬더니 아이가 방황하고 갈피를 잡지 못하더군요. 안 되겠다 싶어 “그래, 성악해라” 했더니 아이가 물 만난 고기처럼 팔팔해졌습니다. 서상록 씨는 삼미그룹의 부회장으로 잘 나가던 시절에 그렇게 해보고 싶던 서비스 직종에 뛰어들었습니다. 제가 롯데호텔 프랑스 식당에서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세상 누구보다 가장 행복한 사나이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취미를 직업으로 가진 사람일 것입니다.
취미란 곧 자기 것을 즐기는 것이니, 취미가 직업이 된 사람이야 말로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나는 달란트가 없어.”, “나는 잘하는 것이 없어.”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없는 게 아니라 당신의 달란트를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고, 자기가 낳은 알 하나 책임지지 못하는 타조도 달리는 재주만은 탁월하다고 욥기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인 당신에게 달란트가 없겠습니까? 찾으십시오. 그리고 자기를 돌아보아 내가 간장종지면 간장종지로 사십시오. 괜히 항아리 부러워하다 깨지는 수가 있으니까요.
아침마다 주인에게 칭찬받는 닭이 부러워 개가 지붕 위에 올라가 짖어대다가는 삼복더위에 보신용감만 될 뿐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가진 달란트 안에서 최선을 다하면 그것이 가장 행복한 길입니다.
하면 즐거운 것이 있고, 하면 유난히 잘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적성이요, 천직입니다. 그것을 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주신 분량대로 일하라고 했습니다(고전 7:17). 욕심을 버리고 나에게 맞는 일을 찾아 열심히 사는 것, 그 이상 더 큰 행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할렐루야!
고래는 바다가 제일이고
호랑이는 산에서 으뜸이다
너는 유일한 사람이다
너의 개성과 달란트를 찾아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