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이냐, 영멸이냐? ( 갈 6:9~10 )
세상에는 3대 거짓말이 있습니다. 그 첫째가 장사꾼이 밑지고 판다는 것이고, 둘째는 노처녀가 절대로 시집 안 간다는 것이며, 셋째는 나이 드신 분들이 어서 죽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 거짓말이지요. 장사꾼이 정신 나가지 않고서 누가 밑지고 팔겠고, 시집 안 가고 싶은 노처녀가 어디 있겠으며, 아무리 나이가 많으셔도 빨리 돌아가고 싶으시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말합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생이 낫다.’고요. 오래 오래 살고 싶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살아보려고 불로초를 찾아 헤매기도 하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수명을 연장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 누구도 영원히 살지 못했고, 장담컨대 앞으로 영원히 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이는 죄의 대가입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 아담이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하나님은 죄의 대가로 “너희는 흙으로 만들었으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3:19).
그렇다면 모든 사람의 죽음이 똑같은 것일까요? 주위에는 “죽으면 끝이지.”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죽음이 끝도 아니요, 죽음이라고 다 같은 죽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육체를 벗는 것이나 다시 부활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만 부활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악인들에게도 부활이 있습니다(행24:15). 악인이나 선인이나 동일하게 부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요? 심판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백보좌 앞에서 육체를 입었을 때, 곧 이생에서 행한 대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요5:29). 거기서 하나님의 사람이라 인정된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고, 믿지 않은 자들은 둘째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이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계20:12~14). 즉 심판 후에 운명이 판이하게 갈린다는 것이지요.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 즉 주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그를 위해 산 자들은 영원히 사는 신천신지로 들어가 주님과 혼인잔치에 참예하게 되고, 주 예수를 구원자라고 믿지 않은 자와 죄악을 행한 자 곧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은 불못에 던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래도 죽으면 끝이고, 죽음이 다 같다 할 수 있습니까? 예수를 믿는 자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 죽음은 그렇게도 사모하던 나라, 늘 그리던 주님이 계신 나라에 들어가는 관문이기 때문에 두렵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주의 종이 되고 난 후 많은 죽음을 지켜봤습니다. 정말 견고한 믿음을 가진 자들은 죽음 앞에서 태연하고 오히려 기뻐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자들은 죽음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살려 달라”고 애걸하지요. 그것은 정말 처참한 광경입니다.
1899년 복음 선교사이던 무디에게도 죽음이 임박했습니다. 그 해 12월 22일, 그의 아들은 아버지 무디가 방에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대지가 물러간다. 내 눈앞에 하늘이 열려 있다.” 무슨 일인가 하여 황급히 아버지 방으로 달려간 아들을 본 무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꿈이 아니다. 아들아, 정말 아름답단다. 정말 황홀하구나! 이것이 죽음이라면 무슨 두려움이 있겠느냐.” 그리고 잠시 의식을 잃었습니다. 의사의 응급치료를 받고 깨어난 무디는 이렇게 증거 했습니다.
“나는 천국의 문 앞에 갔는데, 그곳은 말할 수 없을 만큼 멋지고 아름다운 곳이며, 나는 그곳에서 나의 아이들도 만났다.”라고 말하면서 먼저 간 자녀들의 이름을 댔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무디는 “무엇도 나를 더 이상 이 세상에 잡아둘 수 없다. 이미 마차가 방 안에 와 있다.”고 말하고 밝은 천국을 향해 평안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는 자에게 죽음은 상상할 수 없는,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천국으로 가는 건널목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죽음을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잠을 자는 것으로(살전4:14), 복된 것이며 이생의 수고를 그치고 쉬는 것으로(계14:13), 그리고 유익한 것으로(빌1:21), 평안에 들어가는 것으로(사57:1,2) 표현하고 있습니다.
허물어진 손으로 지은 장막을 벗고 난 후에 영원한 집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고후5:1). 이 말씀 뒤에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하나님의 우편에 서는 자가 되려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9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의 구원자라 인정하는 것이며, 그가 이 세상이 오심을 전파하는 일이고, 그의 나라와 백성이 늘어가는 일에 동참하는 일이며, 선한 일에 힘쓰는 것입니다. 이 말을 사도 바울이 이렇게 집약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14:8).
잠시잠깐 사는 세상입니다. 태양이 뜨면 금방 사라지는 이슬 같이 사라질 인생입니다. 또한 나그네 같은 인생길입니다.
그 사는 동안 주의 일에 힘쓰고, 선한 일을 도모하며 살면 영원히, 영원토록 사는 그 아름다운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짧은 인생에 목을 매고, 그것에 연연하면 영원히, 영원토록 불못에 살게 됩니다. 구더기도 죽지 않는 유황불이 훨훨 타는 곳에서 영원히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의 삶의 목적이 무엇이어야 할까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우리는 너무 잘 압니다. 매일 연회를 열며 자색옷을 입고 산 부자와 그 집 문 앞에서 부스러기를 먹고 산 나사로.
누가 봐도 부자의 인생이 성공한 인생이었고, 부러운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죽고 난 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부자는 음부로 내려가고, 나사로는 낙원에 들어갔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처럼 어렵기 때문에 이 부자가 음부로 내려간 것이 아닙니다. 나사로가 동정표를 얻어 낙원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심판의 기준은 주님을 믿고 안 믿고의 차이입니다. 음부가 얼마나 괴로운 곳인지 부자의 말을 들어보시지요.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눅16:24).
오죽 죽겠으면, 오죽 뜨거우면 물 한 방울의 자비를 구하겠습니까.
저는 인생을 ‘삼 세 번’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난 자는 한 번 죽지만, 어머니 뱃속에서 난 후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 자는 두 번 죽는다는 말입니다. 곧 거듭난 자는 육신의 장막을 벗는 죽음이면 되지만, 거듭나지 않는 자는 육을 벗는 죽음과 둘째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니 어느 방식으로든 삼 세 번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예수님으로 다시 거듭나고 한 번의 죽음을 맞으시겠습니까, 아니면 다시 태어남을 거부하고 두 번의 죽음을 택하시겠습니까? 선택권은 당신에게 있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괴로움과 고통쯤은 넉넉히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에게 예비된 신세계가 있으니 죽음인들 두려울까요? 그래서 우리처럼 행복한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4:16). 할렐루야.
영원한 생명을 택할 것이냐
영원한 멸망을 택할 것이냐
노후대책보다
사후대책이 더 중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