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
글씨 크기 보통16
351호 목차 › Text 주일설교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눅10:25~37)

351호 · 2006-11-15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4~7)’.

성경은 사랑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그리고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합니다. 저 또한 혹 주님이 저를 부르셔서 다시는 우리 성도들을 못 보게 된다면 제가 남기고픈 말도 바로 이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사도 요한이 아시아 교회를 향하여 간곡히 부탁한 것처럼 저도 이보다 귀한 말씀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물질문명이 발달하다보니 상대적으로 인심은 사나워지고, 모든 중심이 ‘나’가 되어 버려 이기주의가 팽배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성간의 사랑은 넘치는 듯 보이나 헌신적 사랑인 아가페 사랑은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래서 가정이, 사회가, 심지어 교회가 사랑부족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풍요 속에 빈곤이 사랑 부족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을 통하여 인간에게 십계명을 비롯한 많은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삼베에 한약을 짜듯 꽉 짜면 이것이 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왜 새 계명이라고 하셨을까요? 새 계명이 있다면 분명히 옛 계명도 있는 법이겠지요. 옛 계명은 이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레19:18).’

그런데 새 계명에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 이웃을 그렇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옛 계명인 네 몸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한층 더 사랑의 강도가 높아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주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몸을 내어 주사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내 이웃을 그렇게까지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한 율법사가 주님께 질문합니다. “주여,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러자 주님이 “율법에 무엇이라 쓰여 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라고 하시니 율법사가 말하기를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하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이 한 말씀하십니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이는 단적으로 십자가의 사건을 일컫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이 뭡니까? 수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요, 수평으로는 이웃과의 관계 정립이 아닙니까? 그 관계가 올바로 서면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십계명과 율법이 완성되며, 이것이 영생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사가 다시 질문합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그의 질문에는 이웃을 범주적으로 제한하려는 의도가 숨어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을 이웃이라 여기지 않았거든요. 그러자 주님은 여리고로 내려가다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된 자를 보고 제사장도 그냥 지나가고 레위인도 피하여 갔으나 이방인으로 여기는 사마리아인은 그를 주막으로 옮기고 주막주인에게 부탁하여 보살핍니다. 주님은 율법사에게 “누가 강도를 만난 자의 이웃이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는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라고 답합니다. 사실 율법사는 ‘사마리아인입니다.’라고 답해야 옳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마리아인을 업신여기는 터라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왜 이 비유를 들려주신 겁니까? 그것은 네 이웃이 너를 사랑하고, 네가 사랑하는 사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이웃도 네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내 이웃도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심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라는 말씀과 상통하는 겁니다. 정말 시행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솔직히 우리의 힘이나 노력으로 불가함을 시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고 고백한 것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떡해야만 주님 안에 거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주님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 것 같이 우리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을 지키면 그 안에 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우리 교인 중에 아내는 열심히 예수를 믿고 남편은 안 믿었는데, 그만 남편이 불치의 병에 걸려 의사도 손을 뗀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 남편이 혼수상태에 빠졌다 며칠 후 깨어났는데, 그 남편이 하는 말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겁니다. 그 예수님이 자기를 보더니 “나는 너를 모른다. 안 믿는 자는 여기 올 수 없다.”시며 ‘가라’했다는 겁니다. 그가 당황하여 있는데 예수님이 다시 말씀하시기를 “네게 다시 기회를 줄 테니 가서 예수를 믿어라. 그리고 교회에 전하기를 믿는 성도들끼리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라.”라고 했다는 겁니다.

이제 우리를 돌아보아야 할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우리는 과연 주님의 계명대로 실천하며 살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서로 형제요 자매라 일컫는 자들끼리 시기하고 다투고 성내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가족에게는 어떻습니까? 남편을, 아내를, 자녀를 사랑으로 대하고 있습니까? 직장에서 상사를, 동료를, 부하직원을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고 있습니까?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사랑은 ‘불구하고’의 사랑입니다. 교회 안에서 누가 당신을 시기하여 모함하더라도 그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은 사마리아인 쪽에서 보면 원수 같은 사람입니다. 자신을 사람 취급도 안하던 사람이 지금 강도에게 당한 것입니다.

쾌재를 불러도 시원찮을 판인데 사마리아인은 그를 도왔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 자리싸움이나 하고, 누구를 정죄하고 하는 것은 사랑의 기본도 모르는 자세이지 않겠습니까?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심방 가서 아이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 압니다. 교회에서는 남도 배려하고 살피면서 가정에 들어가면 말과 행동에 전갈 쏘듯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합니다. 그러면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가 그것을 보고 뭐라 하겠습니까? 사회에서나 직장에서도 조금 희생하는 일에 인색치 않으며, 사랑의 원자탄이 된다면 굳이 복음을 전하지 않더라도 절로 주님이 전해지지 않겠습니까?

우리 작은 것부터 사랑을 실천해봅시다. 사랑은 표현하는 것입니다. 갑돌이와 갑순이가 왜 사랑의 결실을 못 맺었느냐면 서로 사랑하면서도 만나면 ‘안 그런 척’ 해서 그런 거랍니다. 사랑은 보여줘야 합니다. 먼저 사랑을 보여줍시다. 이웃을 이해하고, 배려하고 격려하며, 관심을 가지고 돌보며, 그를 위해 희생해봅시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것처럼, 주님이 우물가의 여인에게 관심을 가지신 것처럼, 주님이 베드로를 격려하시고 배려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에게 그렇게 행합시다. 사랑은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구원은 예수 외에는 절대로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요일4:12).

불이 빛의 모체가 되듯이 사랑은 평화의 모체가 된다

불완전한 사람일수록 사랑이 더욱 필요하다

351호 다른 글

커버스토리
지혜의 말씀
귀를 기울이세요
Cartoon
붕우칼럼
선교기행
나눔의 지혜
구원의 우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