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맛을 아는 자는 봄의 비밀을 아는 자다 (시 136:1~26)
둘째 아들이 캐나다에서 공부할 때 현지인 가정에서 기거했었습니다. 아들이 캐나다에서 공부를 마치고 나온 그 해 연말, 저는 아들에게 “그 집에 카드라도 보냈니?”하고 묻자 아들은 전혀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저는 아들에게 호통을 치며 “아니, 흐르는 물 한 컵을 떠줘도 은혜를 잊지 말라고 했는데, 그 곳에서 신세 진 것이 몇 년이냐, 그러고도 네가 내 아들이냐?” 그러자 아들 녀석은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제 말을 행동으로 옮겨 카드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쪽의 반응은 아들이 생각한 것 이상이었습니다. 카드 한 장에 감동한 그들은 선물을 보냈고, 그것으로 인해 지금까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카드에 실었던 것이 감사의 마음이었기에 그들이 감동된 것입니다.
또 다른 이야기를 할까요? 엊그제 제 생일 때 파라과이와 우루과이에 있는 성도들이 5천불을 보내왔습니다. 저는 그들의 선물을 받고는 정말 눈시울이 뜨거웠습니다. 한 달 봉급이 2백 불 정도인 그들이 보낸 돈이었기에 가슴이 저린 것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그들이 그간 자신들을 성장시켜주고, 가르쳐준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동봉한다는 말을 덧붙였기에 더욱 찡했던 것입니다.
감사는 이처럼 사람을 감동시킵니다.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나 온 몸을 적시듯, 감사는 사람의 마음을 적시기에 충분합니다. 어디 사람뿐이겠습니까? 하나님도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지닌 분이심으로 감사하는 자에게 감동하사 더욱 큰 은혜를 베푸십니다.
항해술이 취약했던 1620년, 7개월 동안 노동을 하여 180톤의 배를 소유한 102명의 청교도들은 감격하여 그 배를 메이플라워(5월의 꽃)호라 명명하고는 망망대해에 몸을 실었습니다.
오직 신앙의 자유를 찾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풍랑과 싸우며 65일 동안 긴 항해에 나서 신대륙 아메리카에 발을 딛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풍토병과 인디안 원주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44명이 죽어나가는 아픔을 견디면서 농사를 지었고, 그 첫 수확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것이 추수감사절의 유래가 되었는데, 제1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11월 넷째 주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제정했습니다. 그것을 3대 대통령인 제퍼슨이 폐지했다가 16대 대통령 링컨이 다시 법으로 환원했습니다. 그 어려움 가운데서도 먼저 교회를 짓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으니 하나님이 어찌 감동하시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이 감동하신 결과가 무엇입니까? 바로 세계 제일의 국가입니다.
감사할 수 있을 때 감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감사할 수 없는 상황이나 여건 속에서 감사할 때 하나님은 그를 눈여겨보시고 그에게 더 감사할 거리를 안겨주시는 것입니다. 형들에 의해 애굽에 팔려간 요셉,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명목으로 사자굴에 떨어진 다니엘, 신상에 절하지 않는 죄목으로 풀무불에 던져진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이들 모두 감사할 수 없을 때 감사한 자들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은 자들입니다.
제가 집회를 위해 키르기스스탄에 갔을 때, 집회를 탐탁하지 않게 생각한 어떤 자가 고발하는 바람에 KGB에 불려가게 되었습니다. ‘울던 애도 KGB 라고 하면 그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끔찍이 무서워하는 곳에 가게 되었으니 우리 일행과 선교사들이 얼마나 걱정을 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평온한 가운데 오직 감사했습니다. 콘크리트 건물에 몇 시간동안 갇혀 있었지만 저는 도와달라는 기도보다는 그저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랬더니 저를 취조하러 온 요원이 오히려 자기 나라의 여러 문제에 대해 자문을 구하는가 하면 우리집회를 돕겠다고 자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감사기도의 위력이 얼마나 큰 것인지 여실히 깨달았습니다. 돌아보니 제가 목회 21년 만에 세계 70여 개국에 복음을 전하는 일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물 없는 사막 같고, 눈 덮인 산야 같은 목회 인생길에서도 불평하지 않고 오직 감사로 일관했던 것이 이유였습니다.
당신은 축복과 감사가 정비례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다가 문둥병 열 명을 만나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 사마리아인만이 예수께 영광을 돌리고 나머지 아홉 명은 감사는커녕 인사 한 마디 없이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이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눅17:17)”라고 물으셨습니다. 아홉 명에게는 그 축복이 종착역이었던 것입니다. ‘고침을 받았으니 됐다.’ 이런 거 말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예수님께 와서 감사를 드렸고, 그 축복이 시발점이 되어 나가 예수를 전하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감사란 은혜를 느낄 때 하는 것입니다. 부모에 대한 은혜를 깨달을 때 감사를 하게 되고, 남편과 아내에 대해 고마움을 느낄 때 감사하게 됩니다. 또한 영적 스승이나 혼적인 스승의 가르침이 뼈저리게 느껴질 때 감사하는 것입니다. 느낄 감(感), 사례할 사(謝)거든요.
감사는 방부제요, 소독제요, 해독제요, 항암제이며, 성장촉진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 사람과의 관계를 좀먹지 않게 하며, 상처받은 관계를 치료하며, 얽히고설킨 관계를 개선해주는 최고의 명약이 바로 이 감사입니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오늘 한 번 테스트 해보세요. 오늘 저녁에 들어갈 때 작은 꽃다발 하나 사들고 들어가 아내의 손을 잡고 “여보, 당신이 내 곁에 있어 행복해. 내 아내가 되어 준 걸 늘 고맙게 생각해.” 해보세요. 아마도 아내가 얼떨떨한 표정을 짓기는 하겠지만 바로 다음날부터 서비스가 달라질 것입니다. 떨떠름한 회사 상사에게 “아이고, 부장님 감사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이 회사에 붙어있는 건 다 부장님 덕입니다.” 해보십시오. “이 사람 왜 이러나.” 말은 그렇게 해도 점심때에 “이 과장, 점심이나 먹으러가세” 할 겁니다.
사주가 직원들에게 “감사합니다.”한다면 파업이 어찌 일어나겠습니까? 통치권자가 국민에게 “저를 나라의 책임자로 세워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고 한다면 국민에게 어찌 사랑과 신뢰를 얻지 못하겠습니까. 저는 음식점에 가도 서빙해주는 아가씨에게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잘 합니다. 그러면 깍두기 하나라도 더 갖다 줍니다. 감사해서 손해 볼 것 없습니다.
감사의 씨를 뿌리면 감사의 열매를 많이 수확하게 됩니다. 가을의 맛을 아는 자가 봄에 씨를 뿌리듯, 감사의 열매가 얼마나 크고 달콤한지를 알면 감사의 씨를 뿌리는 데 인색하지 않을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의 씨를 뿌리면 만사에 감사의 큰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가슴에 새겨라
흐르는 물 한 컵을 떠줘도 그 은혜를 잊지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