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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원칙과 정의를 초월한다

300호 · 2005-11-24

성경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 이야기는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많다. 아버지의 많은 재산을 술과 창기노름에 모두 탕진해버린 둘째아들이 돌아오자 아버지는 오로지 둘째 아들이 살아서 돌아온 사실에만 주목하였다.

일체 과거의 일은 묻지 않고 죽었던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며 살진 소를 잡고 금가락지를 끼워주며 대잔치를 베풀어주었다. 이에 묵묵히 집을 지켜온 큰 아들이 아버지의 처사에 이의를 제기하고 불만을 표출한다. 이치적으로나 사리를 따져보아도 큰 아들의 문제제기는 지극히 당연하고 옳다.

아버지 말씀에 늘 순종하며 집안의 대소사를 담당해온 큰 아들로서 동생이 저지른 죄는 응당 물어야 함이 마땅하고 그에 따른 처분이 내려져야 옳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동생의 문제를 덮어준 정도가 아니라 한술 더 떠서 온 동네가 떠들썩하게 잔치까지 열어주었다.

큰 아들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왜 그랬을까? 거기에는 재판관이 아닌 아비의 심정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의 모든 원칙과 정의를 뛰어넘는 아비의 사랑을 읽을 수 있어야 이해가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를 죽인 사건도 이러한 사랑을 읽지 못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죽음보다 강한 사랑이 모든 원칙과 정의를 초월하게 만드는 것이다.

국가나 기업, 교회, 가정 및 어떤 단체를 이끄는 지도자라도 이러한 정신을 가져야한다. 원칙과 정의가 바로 서야하고 그에 따라 조직이 운용되어야함은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지도자는 포용과 관용의 아량을 갖춰야 한다.

연회장에 불이 나간 사이 왕이 총애하는 첩을 겁간하려던 신하가 갓끈을 첩에게 빼앗겨 이제 곧 불이 밝혀지면 죽어 마땅한 처지에 있었다. 바로 그 때 왕은 ‘모두 갓끈을 끊고 놀아보자’고 회중에게 권한다. 왕의 이러한 넓은 도량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그 신하를 살렸다.

결국 후일에 국가의 풍전등화 상황이 닥쳤을 때, 왕은 적에게 둘러싸여 일촉즉발의 위기에 처했다. 그런데 그 때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을 돌파하여 왕을 구출해낸 신하가 있었다. 바로 전날의 연회장에서 왕의 첩을 희롱하던 신하였다. 왕의 작은 배려가 자신의 목숨을 살리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은 바로 지도자가 가져야할 자세와 정신을 잘 설명해준다.

이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만일 하나님께서 율법의 준엄한 잣대로 우리를 심판하려 드셨다면 아마 살아남을 자라곤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죽음보다 강한 사랑으로 그 모든 율법을 넘어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끌어주셨다. 그 십자가의 사랑이 있었기에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새로운 생명의 삶을 누리게 된 것이다. 정죄는 우리의 몫이 아니다. 심판하실 이는 결국 하나님이시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이웃에게, 뭇 영혼에게 전하는 것이 마땅하다. 율법의 잣대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 원칙과 정의를 넘어 사랑으로 포용하고 용납하기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이는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진 자만이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은 바로 우리에게 이러한 좁은 길을 가라는 것이다.

누가 누구를 판단하고 정죄한단 말인가.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러 모인 군중에게 ‘죄 없는 자 있으면 돌로 쳐라’고 말씀하신 예수님 앞에 모두가 돌을 놓고 그 자리를 떠나갔다. 설혹 정죄의 돌을 들었더라도 하나님 말씀 앞에 깨닫고 돌이키는 자는 복이 있다. 당신은 당신의 생각을 접고 하나님의 생각에 순복할 자세가 되어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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