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고를 무시하면 멸망한다 (삿 16:1 ~21)
벌써 오래 전의 일입니다. 아이 소풍갈 때 김밥 싸줄 돈조차 없을 정도로 궁색하던 집사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떵떵거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 내외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정말 주의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조금 흐르자 아내의 믿음은 여전한 것에 비해 남편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그 집사의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트레이닝복을 입고 그 집사와 제가 나란히 뛰는 꿈이었습니다. 저는 그 집사를 만나 꿈 이야기를 하며 “박 집사, 예전처럼 나랑 같이 주의 일을 합시다. 나는 이 꿈을 하나님이 주신 경고의 음성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그 집사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점점 아내와의 사이가 악화되고, 결국 부부싸움 끝에 그만 아내를 살해하는 엄청난 실수를 하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가정은 풍비박산 되었으며, 그는 철창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집사만 생각하면 가슴이 멥니다. ‘그때 그가 내 충고를 받아들였다면….’
충고나 충언이 그리 달콤하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듣기에 껄끄럽고 입맛이 쓴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입에 쓴 약이 몸에 이롭듯, 귀에 거슬리는 말이 우리 일생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너는 권고를 들으며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면 네가 필경은 지혜롭게 되리라’(잠19:20).
모세는 그의 장인 이드로의 충고를 들어 2백만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든 일을 관장하여 지친 모세를 향하여 장인 이드로는 말합니다. ‘이제 내 말을 들으라’(출18:19). 그는 천부장과 백부장,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세워 그들에게 작은 일을 담당하게 하라고 충고해 줍니다. 모세는 장인의 충언을 받아들여 그대로 일을 실시하니 모든 것이 원활하고 쉽게 해결될 수 있었습니다.
다윗도 나단 선지자의 충고를 받아들여 죄의 나락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충신 우리아의 처를 취하기 위해 그를 최전방에 나가 죽게 합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냅니다. “한 성에 두 사람이 있어 하나는 부하여 양이 많고, 다른 하나는 오직 한 마리의 양을 가졌는데 행인이 오매 부자가 자기 양이 아까워서 가난한 자의 한 마리 양을 잡아 대접을 했습니다. 그가 바로 당신입니다.” 이 말에 다윗이 침상을 적시는 회개를 했습니다.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51:2~3). 나단의 음성을 하나님의 책망으로 듣고 다윗은 진실로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다가 인생을 망친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삼손입니다. 삼손은 나실인입니다. 나실인은 ‘하나님께 헌신한다’는 뜻을 가진 것으로, 그는 블레셋의 공격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였습니다. 그는 독주나 포도주를 먹어서도 안 되고, 부정한 것을 만져서도 안 되며, 머리를 잘라서도 안 되는 나실인의 법을 지켜야 했습니다. 삼손의 어머니는 삼손에게 ‘너는 나실인이다’라고 강조했고, 그가 행해야 할 법규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블레셋 여자를 아내로 맞았고, 자신이 죽였던 사자의 시체에 생긴 꿀을 먹어 나실인의 서원을 어겼습니다. 그런 그가 마침내는 들릴라 라는 여인의 사랑의 포로가 되어 자신에게서 나오는 힘의 비밀이 삭도를 대지 않은 머리털에 있음을 토설하고야 맙니다. 그런 그에게서 하나님이 떠나시니 그는 일반인과 같아졌고, 그는 블레셋 사람들에 잡혀 눈이 빠지고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는 비참한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머니의 충고를 버린 뼈아픈 결과입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도 같은 경우입니다. 그는 백성들이 그의 부친 솔로몬이 행한 무거운 세금과 강제 노역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자 솔로몬 생전에 그 앞에 섰던 노인들이 충언하기를 “왕이 만일 오늘날 이 백성의 종이 되어 저희를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여 이르시면 저희가 영영히 왕의 종이 되리이다.” 하였으나 ‘왕이 노인의 교도하는 것을 버리고’(왕상12:8) 자기와 함께 자라난 소년들의 말을 따라 더욱 백성들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북쪽의 열 지파가 여로보암을 지도자로 세웠고,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되는 비극이 빚어졌습니다. ‘훈계를 지키는 자는 생명 길로 행하여도 징계를 버리는 자는 그릇 가느니라’(잠10:17).
가장 좋은 친구가 누구인 줄 아십니까? 가장 귀한 사람이 누구인 줄 아십니까? 이는 자존심을 밟아가면서 충언을 해줄 수 있는 친구요, 사람입니다. 귀에 달콤한 말을 해주는 일은 정말 쉽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단점, 잘못된 일을 지적하는 것은 사랑이 없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말하면 좋은 소리 못 들을 줄 뻔히 알면서 충고하는 것은 진정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잔소리가 아니라 충언입니다. 아내니까 그러는 겁니다. ‘네가 이러니까 집에 들어오기 싫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술집 여자가 ‘당신 몸 생각해서 술 그만 마셔요.’라고 말하던가요? ‘어서 어서 많이 드세요.’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는 당신을 사랑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직 돈 나오는 주머니로 볼 뿐입니다.
부모들이 자식에게 ‘이것 하지 말아라. 저건 조심해라.’ 하는 것은 간섭이 아닙니다. 사랑이 담긴 충고입니다. ‘나도 커서 다 아니까 이제 제발 그만 하세요.’ 하고 덤비지 마십시오. 부모님 돌아가시면 누가 그런 소리 해주겠습니까? 부모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는 자가 또 어디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사사를 보내고, 선지자를 보내어 충고하신 것도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미운 소리해서 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시려고 그러신 것이 아니고, 잘 되기를 바라시는 마음에서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그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떠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나를 떠나면 길을 잃고, 거짓의 사단에 사로잡혀 생명을 잃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말씀에 ‘협박하지 마십시오.’라고 대들 겁니까? 이는 협박이 아니라 경고요, 사랑의 메시지입니다.
아담이 ‘에덴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는 경고에 코웃음 치다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마귀의 지배 아래 살게 되었지 않습니까?
저는 양을 이끄는 목자로서, 전세계를 예수중심으로 이끄는 영적 지도자로서 그들에게 득이 되는 것이라면 충고와 충언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어찌 받아들일까 하고 눈치보고 망설이지 않습니다.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는 것은 그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할 도리를 다 할 뿐입니다. 주님 앞에 서는 날, ‘성도들 비위나 맞추다 왔냐?’는 주님의 책망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제자들에게 ‘나한테 맞을래? 주님께 맞을래?’ 하며 책망과 충고를 합니다. 제 말에 깨닫고 회개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어떤 자는 저를 욕하며 떠나는 자도 있습니다.
깨달으면 복 받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닭 울음소리에도 깨달아 주님의 수제자가 되었고, 나아만 장군은 종의 간절한 말에 돌이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가 문둥병에서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런 자가 있는가 하면 가룟 유다처럼 주님께서 ‘그릇에 손을 넣은 자가 나를 팔리라.’ 하고 직접적으로 가르쳐줘도 깨닫지 못하는 자가 있습니다.
아내의 말이 듣기 싫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예수에게 손대지 말라는 아내의 충고를 무시한 빌라도와 같아 평생 저주 아래 놓이게 될 수 있습니다. 부모님의 말씀이 잔소리로 들립니까? 삼손을 보고 깨닫기를 바랍니다. 목사님의 말이 귀에 거슬립니까? 사무엘 선지자의 말을 거슬려 했던 사울의 최후를 생각해 보십시오.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잠27:9). 할렐루야!
명약은 입에 쓰나 몸에는 이롭다
귀 명창이 명창이다 귀를 크게 열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