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만물을 명령할 권세가 있다 (눅 4:31~44)
“내가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소경된 귀신은 떠나갈지어다.” 이번 여름 산상집회 첫 주간에 눈멀어 보이지 않던 성도를 향하여 저는 이렇게 명령했습니다. 몇 번을 이렇게 명령했더니 소경되게 했던 귀신이 떠나가고 그가 점차 보이게 되어 물체를 보게 되었고, 나중에는 색깔까지 구별해내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제가 한 일은 오직 ‘예수 이름’으로 명령한 것 밖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명령 앞에 귀신이 떨며 떠나간 것입니다. “그런 명령은 예수님이나 하시는 일이지, 당신이 뭔데 명령을 하는 거요?” 이렇게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자들이 필히 알아야 할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즉 하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됨은 물론 그에 따른 권세도 위임받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더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14:12).
예수께서 우리에게 만물을 명할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왕을 대신한 암행어사가 마패를 가진 것과 같습니다. 마패를 내어놓는 순간 모두 그 앞에 복종하지 않습니까?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귀신의 밥이 되고, 귀신의 손에 놀아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권세를 주셨건만 그 권세를 사용할 줄 모르기 때문에 병들고 가난하고 망하는 겁니다. 돈을 손에 들고도 굶어죽는다면 모두 ‘쯧쯧’하며 혀를 찰 것입니다.
총을 들고 있어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으면 총알이 나가지 않고, 칼을 들고도 그것을 내리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자르지 못합니다.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이름으로 명령하지 않는다면 그 이름은 그림의 떡에 불과합니다. 부뚜막에 소금이 있으면 뭐 합니까? 음식에 넣어야 짠 맛이 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답답하신 것입니다.
“얘야, 앞에 작은 멧돼지 한 마리 있다고 무서워 떨지 말고 어서 방아쇠를 당겨. 네 손에 총이 있잖니? 무서워 말고 너를 망하게 하는 귀신에게 예수 이름으로 명령해. 그럼 떠나가게 되어 있어.” 하고 주님은 탄식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악한 마귀는 간교하게 말합니다. “네가 든 총은 가짜야. 그건 구형이라고. 쏴도 총알이 안 나가”, “그런 일은 2천 년 전에나 일어났던 일이야.
지금은 절대 그런 역사는 일어나지 않아.” 그래서 우리 스스로 총을 내던지게 하는 것입니다. 산중에서 총을 내던지면 악한 것들에게 습격을 받듯, 이 험하고 악한 세상에서 예수 이름을 던져버리면 귀신의 올가미에 걸리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입니다. 총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총의 종류에 따라 거리가 다르며, 총알이 나가는 빈도도 다릅니다. 즉 믿음에 따라 명령의 강도가 다르다는 겁니다. 딱총으로는 전선에 앉은 참새 정도는 맞출 수 있지만 토끼나 멧돼지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러려면 사냥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대포는 더 큰 것을, 그리고 미사일로는 장거리는 물론 거대한 것도 파괴할 수 있듯, 믿음의 정도에 따라 대단한 역사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향해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라”고 명령했던 베드로는 나중에 죽은 다비다를 예수 이름으로 살려냅니다. 사냥총 정도 들고 있던 베드로가 미사일을 손에 쥔 격입니다.
이는 오직 기도에 달려 있습니다. 만 원과 십 만원의 가치가 차이 나듯, 한 시간 기도와 세 시간 기도의 능력 차이는 분명히 있습니다. 이는 딱총을 쥐느냐, 미사일을 쥐느냐와 같은 것입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9:29). 저는 단에 설 때면 보통 세 시간 이상 기도를 합니다. 해외집회를 나가면 하루에 일곱 시간 정도 기도하고 나갑니다.
그러면 배터리가 충전된 면도기가 미는 대로 수염이 잘려나가듯, 예수 이름으로 명령하는 것마다 역사가 일어납니다. 귀머거리가 듣고, 소경이 눈을 뜨고, 귀신들렸던 자들이 풀려나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멀리 있는 아들의 열병을 쫓아도 그 시간에 그 아들이 나음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는 장거리 미사일을 가진 덕입니다.
예수께서도 그런 일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백부장이 예수께 나아와 자신의 하인이 중풍으로 누워있다고 하면서 말씀만 하시면 그가 나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자 예수께서 그의 믿음대로 그 하인의 병을 낫게 하신 일이 마태복음 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 예수 이름으로 귀신만 쫓겨납니까? 아닙니다. 하늘의 것이나 땅의 것, 땅 아래 있는 모든 것이 다 예수 이름 앞에 복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광풍을 ‘잠잠하라’고 명령하시지 않았습니까? 만물은 다 들을 귀가 있습니다.
제가 기도원을 찾은 성도들에게 무료로 급식을 시작하면서 쌀 창고에 손을 대고 명령했습니다. “내가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쌀 창고에 쌀이 떨어지지 말지어다.” 그랬더니 지금껏 쌀이 떨어진 일이 없습니다. 저는 지금도 체육관에 빈 자리를 보고 명령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저 빈 자리에 주인은 찾아올지어다.” 그것이 제 믿음입니다. 아니, 죽은 자를 살리신 이름이 무엇인들 못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스스로 ‘이것은 되고, 저것은 안 되고’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한 분이 아닙니까?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시는 그 분이 모든 것을 책임지실 것이니 아무 염려 말고 명령하십시오. 남편이 가정을 멀리하고 있습니까? 우리 교인 중에 한 성도가 남편이 바람이 나서 집에 안 들어오자 매일 신발을 안고 명령했답니다.
“내가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내 남편의 발걸음이 집으로 향할 지어다.” 이렇게 몇 달을 했더니 절대 돌아오지 않을 것 같던 남편이 돌아왔다고 간증을 했습니다. 사업에, 직장에 문제가 있습니까? 갈릴리 바다는 베드로의 사업터였고 직장이었습니다. 그곳에 풍랑이 일었습니다. 주무시던 예수님을 깨웠더니 풍랑이 잠잠해졌습니다.
그 배에 계셨던 예수님이 이제 성령으로 우리 안에 함께 계시니 그 이름으로 명령하면 모든 풍랑이 잠잠할 것입니다.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 이름으로 가난을 가져다주는 귀신을 내어 쫓으십시오. 암으로 고생하고 있습니까? 명령하십시오, 예수 이름으로. 총을 쏘다보면 언젠가 큰 곰도 넘어지는 겁니다.
안 되면 될 때까지 포기하지 말고 계속 명령하면 반드시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이 험한 세상에 나 혼자 내버려둔 것으로 말입니다. ‘하나님이 날 버리셨어.’ 그러나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한 번도 잊으신 적이 없고, 고아처럼 내버려 두신 적이 없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이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49:15).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보좌로 오르셨지만 그 분의 이름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이름으로 명령할 수 있는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않은 연고입니다. 즉 총을 쏘지 않기 때문입니다. 총을 쏘면 악한 것들에게서 보호받을 수 있고 사냥감도 얻을 수 있는데, 총구 닦는 일이 귀찮아 안 하기 때문에 악한 것들의 습격을 받고 먹을거리가 없는 것입니다. 총은 누가 당겨도 나갑니다.
어린 아이가 당겨도, 여자나 노인이 당겨도 나갑니다. 이 예수 이름의 권세는 예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모든 자들에게 나타납니다. 예수 이름으로 만물을 명령하다보면 사람들에게 ‘미쳤다’는 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쳤다면 어떻습니까? 내가 범사에 잘 되면 그만 아닙니까? 그러니 사람 눈치 보지 말고 늘, 어느 곳에서나 예수 이름으로 명령하는 권세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시다. 할렐루야!
못하는 것이 아니다 안 하기 때문이다
명령에 순종하라 책임은 주인이 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