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인인가, 종인가? (막 1:21~39)
“오늘 귀신이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고, 벙어리가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나는 가짜 목사요.”
제가 해외집회에 나가 이런 선언을 하면 많은 외국 목사님들이 근심어린 눈빛과 어조로 “목사님, 그러다 정말 만일 귀신이 안 나가면 어떡하려고 그러십니까?” 합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명령은 그 분이 하셨으니 책임도 그 분이 지십니다. 나는 단지 예수의 종일뿐입니다.”
목회자들을 일컬어 ‘주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세계를 다니면서 주의 종인 목회자들의 능력 없음에 통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저는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왜 저들에게 능력이 없을까?’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그들이 ‘종의 개념’을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종의 개념을 모르니 명령하달에 따른 행동지침이 바로 설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종이 무엇입니까? 종이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인의 명령을 따르는 자이며, 주인이 시키는 일에 충성하는 자입니다. 고로 주의 종 된 자들은 마땅히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고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16:15~18).
주님의 명령이 이렇게 확고하건만 주의 종들이 주인의 이름으로 안수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귀신 쫓는 것을 주저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종의 신분임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은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지 책임지는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책임을 지려고 하기 때문에 ‘안 나가면 어떡하나.’ 하고 두려워 병든 자에게 손을 얹지 못하고, 귀신을 쫓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겁니다. 우리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인 되신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고 안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종이 책임을 지려고 합니까? 그것은 겸손을 가장한 교만이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이초석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고 병든 사람에게 안수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제게 기름 부으신 예수 이름으로 하는 것이므로 저는 절대 걱정하지 않습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9:29)의 말씀을 받잡고 기도하고 예수 이름으로 손을 얹고 귀신에게 명령하면 뒷일은 주님이 다 알아서 하십니다.
언젠가 귀신을 쫓는데 귀신이 그러는 겁니다. “이초석, 너는 못 쫓아.” 그 말을 듣고 처음에는 좀 당황했습니다. 그러나 곧 성령이 제 입술을 주장하셨습니다. “그래, 나는 못 쫓아. 그런데 너 예수 알아? 내가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더러운 귀신아 나가.” 그랬더니 귀신이 나갔습니다. 귀신의 계략은 우리가 책임을 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주인이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내가 주인이 되게 하는 궤계인 것입니다.
빌립 집사가 능력을 가지고 귀신을 쫓으며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수 이름이 있었기 때문이며, 70인의 제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제자들도 주인이신 예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한 것입니다. 주님은 절대 책임을 전가하시지 않는 분입니다. 책임을 미루는 일은 자신이 능력이 없을 때나 죽었을 때 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인은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며 전지전능하시며 무소부재하신 분이므로 절대 책임을 전가하실 분이 아닙니다.
또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다른 이유는 종의 상식으로 주인의 수준을 이해하려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종이 주인의 마음을, 지식을 다 알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계획을, 섭리를 우리가 알겠느냐는 겁니다. ‘이해가 안 간다’, ‘논리에 안 맞는다’, ‘비합리적이다’, 이런 반응은 종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종은 이해가 가지 않아도, 논리에 안 맞아도, 합리적이지 않아도 오직 ‘예’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고후1:18).
모세가 200만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가나안을 향할 때 그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에서, 비논리 앞에서, 비합리적인 상황 앞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이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했을 때 그랬고, 홍해가 갈라질 때 그랬으며, 광야에서 메추라기와 만나를 먹었을 때 그랬습니다. 모세는 그저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종으로 기도했을 뿐이며, 지시하는 대로 행했을 뿐입니다. 일을 성취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주인 앞에 논리를 내세우는 종은 이미 종이 아닙니다. 그저 순종하다보면 ‘아하! 주인이 그래서 그랬구나.’ 하고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종은 언제나 선(先) 순종, 후(後) 이해인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입장에서 보면 모순투성이며, 비논리입니다. 그래서 비논리와 비합리를 깨는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는 ‘기적과 이적’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타당한 것이고 당연사인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표적’을 나타내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의 쥐꼬리만한 지식 속에 계시는 분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오직 주인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주의 종들이 지식이 없으면 주의 종을 목자 삼은 양들이 병들고 아프고 가난하게 됩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한다’고 통탄한 것입니다. 주의 종이 능력이 없으면 양들이 귀신의 밥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장차는 백성이나 제사장이나 일반이니라(호4:9).’ 이제 우리는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신분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바로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자녀 된 우리는 누구나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으며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보여줘야 하며, 복음 전파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내가 주의 종도 아닌데 어떻게 귀신을 쫓아?’ 이건 악한 것들이나 좋아할 말입니다. 초창기 우리 교회는 평신도들이 다 귀신을 쫓는 등 대단했습니다. 평신도들이 하루에 4시간, 5시간 기도하며 복음을 전하러 나가 성령의 강한 역사를 일으켰었습니다. 주의 종이 받은 성령이나 평신도가 받은 성령이나 동일한 것이고, 주의 종이 가진 예수 이름이나 성도가 가진 예수 이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이름으로 명령하면 하늘의 것과 땅의 것, 그리고 땅 아래 있는 것들이 복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총알만 들어 있으면 누가 방아쇠를 당겨도 총알은 나가게 되어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영국의 크롬웰 장군이 전쟁터에서 여러 가지 일로 잠을 설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옆 막사에서 코를 고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습니다. 크롬웰 장군이 막사를 열고 들어가 보니 바로 밑의 부하가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전쟁 중에 태평하게 잠을 자는 부하가 괘씸해서 장군이 그를 깨웠습니다. “아니, 이 상황에 잠이 오나?” 그랬더니 눈을 부비며 부하가 말했습니다. “장군님, 장군님이 태어나기 전에 이 땅을 누가 통치했습니까?” “하나님이 하셨지.” “그리고 장군님이 죽고 난 뒤 이 땅을 누가 통치합니까?” “하나님이 하시지.” “맞습니다. 지금 장군이 살아계실 때도 하나님이 통치하시니 아무 걱정 말고 주무십시오.”
능력이 많은 주인을 둔 종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저 명령에 따라 충성되게 일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인이 이르기를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죽도록 충성합시다. 생명의 면류관은 바로 당신의 것입니다. 할렐루야!
문화적인 지식 앞에 네 경험을 팔지 말라
먼저 진심으로 순종하라 그러면 점차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