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신앙에 타협이란 없다 (고후 6:11~7:1)
검정색과 흰색을 섞으면 회색이 되는 것은 누구나 압니다. 그러나 신앙의 범벅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 지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타협으로 인해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노사분쟁이나 정치적 견해도 타협점이 있어야 문제가 해소됩니다. 가정의 갈등도 서로 양보하는 선에서 위기를 넘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 타협의 대상이 아닌 것이 있습니다. 이는 바로 신앙입니다. 이는 적절한 선이나 중도(中道)를 택해서는 안 되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검정색과 흰색이 섞이면 이미 흰색의 고유한 순결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경고하시기를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유대 율법에는 소와 나귀가 같은 멍에를 매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체격이나 힘이 어울리지 않는 두 짐승으로 인해 나귀가 고통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세상의 사람과 인생의 멍에를 같이 지지 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적인 것들은 현혹적인 것으로 절제된 삶을 살고 있는 믿는 자들을 유혹할 수 있고, 또한 믿음의 길을 가는데 끊임없이 방해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그런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솔로몬이 그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일천 번제를 하나님께 드려 지혜와 부와 영광을 얻은 자입니다. 그러나 그가 취한 이방여인들이 들여온 우상들을 섬기기 시작하자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두 번이나 그에게 나타나사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이미 멀었고, 귀는 닫혀 있었기에 마음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다윗과 하신 약속으로 인하여 솔로몬의 당대에는 징계하지 않으셨으나 나라의 분열을 예고하셨고, 평화로웠던 나라를 대적의 손에 넘기셨던 것입니다.
삼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삼손은 나면서부터 하나님께 바친 나실인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이방 여인 들릴라를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모두 털어놓게 되었고 그 결과 머리털이 잘리고 눈이 뽑힌 채 그들의 포로로 전락한 사실이 사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귀의 턱뼈 하나로 일천 명을 죽이던 자가 눈이 빠져 옥중에서 맷돌을 굴리는 처참한 신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그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간구하여 많은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고 자신도 그 자리에서 비극적인 삶을 마감했습니다.
아합왕도 이세벨과 결혼함으로 바알과 아세라 목상(木像)을 섬기고 악행을 일삼자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은 경고하십니다. 그러나 아합이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대적하자 하나님은 그를 전쟁터에서 전사하게 했고, 그의 70 아들들을 다 죽이셨습니다.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메는 일은 이런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거울이며, 모델이며, 삶의 이정표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여 이런 우(愚)를 낳지 말고, 이런 범죄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장성한 자녀들의 결혼에 대해 상담을 해오면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조건 보다 먼저 믿는 자여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 중에는 “믿게 하면 되지 않을까요?” 하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그들을 예수 앞으로 인도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동안의 경험에 따르면 대부분이 믿지 않는 자를 따라 세상에 주저앉는 것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재력이나 학벌보다 우선 되어야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재력과 권력의 원천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재력 있는 자를 택하기보다 재력의 원천인 하나님을 소유한 자를 택하면 재력이 따라옵니다. 권력 있는 자를 배필로 삼기 전에 권력의 원천인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를 택하면 세상의 머리가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신앙이 먼저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하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직장의 상사가 믿지 않는데 그의 밑에서도 일하지 말아야 합니까?”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을 도피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자와 동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믿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적국의 포로가 되어 느부갓네살왕의 밑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도 신앙의 타협을 몰랐습니다. 느부갓네살왕의 금신상에 절하지 않는 자는 풀무에 던진다는 칙령이 있었으나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칠 배나 뜨거운 풀무불에 던져졌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불 가운데서 건지셨습니다.
다니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리오 왕 외에 다른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사자굴에 던지라는 왕의 명령이 떨어져도 다니엘은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를 안 무리들이 왕에게 아뢰어 다니엘은 사자굴에 들어갈 운명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고 신앙의 절개를 지켰습니다. 이를 보신 하나님이 사자굴에 천사를 보내사 사자 입을 봉하셨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을 더욱 높이사 다리오 시대부터 고레스왕의 시대까지 형통케 하셨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떻습니까? 상사의 결혼식과 주일이 맞물리면 상사에게 눈도장을 받으러 결혼식장으로 발길을 돌리지 않습니까? 개업 상량식에 돼지머리에 절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상사의 눈치 보느라 식사 시간에 기도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십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출세를 꾀하지 마십시오. 인간의 방법으로 성공을 기약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시기하고 질투하시는 분입니다.
제가 부득불 자랑할 것이 있다면 어떠한 경우든 신앙에 타협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날 복 받은 비결은 바로 그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을 우선시했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이 믿지 않는 이방여인들과 사귄다고 할 때도 단호히 막았습니다. 천문학적인 숫자의 돈으로 유혹이 오고, 대단한 권력으로 인한 미혹이 있을 때도, 그것을 뿌리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 때마다 돌이켜 무릎을 꿇고 더 하나님께 다가갔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들어보지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지 못한 것으로 보상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길이 정도(正道)요, 하나님의 방법이 최선책이며, 하나님의 생각이 가장 옳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하리요’(고후6:14-16)
순간의 욕구 충족을 위해, 눈에 보이는 안일을 위해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매는 어리석은 자가 없기 바랍니다. 세상의 우상을 소에 비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를 등에 진 나귀에 비교됩니다. 소와 나귀가 멍에를 같이 매면 누가 고생하는 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인생의 배필, 사업의 동업자, 정치의 동지를 택할 때 그가 하나님의 사람인지를 먼저 보고 오래 관찰 후에 선택하십시오. ‘순간의 선택이 십 년을 좌우한다.’고 합니다만 사람의 순간선택은 평생을 좌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택권은 당신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말씀대로 가느냐, 이를 무시하고 가느냐, 모두 당신의 선택입니다. 그리고 책임도 당신의 몫입니다. 만든 자의 말을 듣는 것이 가장 큰 지혜입니다. 할렐루야!
빛과 어두움은 공존할 수 없다 기름과 물이 섞일 수 있겠는가
진리는 절대 타협될 수 없는 것 진리는 다수결에 좌우될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