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꿈이 무엇이냐? (히 10:32 ~11:2)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흥분하며 가슴에 그렸던 미래의 청사진은 무엇입니까? 지금 그 꿈과 청사진은 어떤 상태로 있습니까? 혹 꿈은 사라지고, 청사진은 흐려져 희미해진 것은 아닙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누구인 줄 아십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 누구인 줄 아십니까? 육신의 질병을 짊어진 자가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물질의 궁핍이 가난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더욱 더 큰 오산입니다. 가장 가난한 자요, 가장 불행한 자는 바로 꿈을 잃은 자요, 미래의 자화상을 그려보지 못하는 자입니다.
저는 목회 초년 시절부터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국과 세계를 교구화 삼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철산리에서 한 영혼을 놓고 설교할 때도 500여 명의 자리를 만들어 놓고 혼신의 힘을 다하여 설교했습니다. 이 전을 반드시 채우고야 말겠다는 꿈이 이루어져 우리는 인천 마가 다락방으로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도 저의 꿈은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세계는 나의 밥이다.’ 라는 생각으로 가득한 저에게 마가 다락방은 너무 좁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이전을 계획했고, 숭의동에 있는 현재의 인천교회로 확장이전을 서둘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가 저의 꿈의 끝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대한민국 수도인 서울로 가리라!’는 생각으로 저는 밤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제 꿈의 확실한 지원자요, 후원자이셨습니다. 그 분은 기도 중에 올림픽공원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교회는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귀로도 들어보지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해보지도 못한 곳, 우리 손으로 짓지 아니하고 꾸미지 아니한 올림픽공원에 입성함으로 전국과 전세계 선교의 전진기지를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현 88체육관으로 올 때까지 우리는 이전을 거듭하며 한 발, 한 발 세계로 눈을 돌렸습니다.
처음에는 우리 교포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지만 거기에는 많은 한계와 장애가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000년, 새해 첫 메시지로 우리는 ‘천 배의 축복’을 기약했고, 그것이 현실로 나타나 그 해 2월 인도네시아 집회, 외국인 대상으로 한 첫 집회에서 우리는 상상을 초월한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곧이어 남미대륙에 복음의 일대 혁신을 일으켜 스페인어권에 갈보리 깃발을 휘날렸습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러시아를 비롯한 구 소련권, 그것은 유럽으로 가는 복음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라트비아, 그리고 이번 에스토니아 집회를 계기로 유럽이 우리에게 문을 열고 있습니다. 이처럼 저의 꿈은 분명한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자신이 꿈을 접지 않는다면 꿈은 반드시 자라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꿈이란 자고로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이며, 비현실적인 이상을 품는 것입니다. 처음에 꿈이란 보이지 않습니다. 만져볼 수도 없습니다. 그저 가슴에 있는 청사진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마치 씨를 심으면 처음에는 보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싹이 나고, 줄기가 나오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꿈도 이루는 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잉태된 아이가 바로 출산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꿈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거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씨앗을 심은 다음 방치해 놓으면 실한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거름을 주고, 소독도 해주며, 가지치기도 해주는 것처럼, 우리의 꿈도 돌봐야 합니다. 노력해야 함은 물론이요, 기도로 물을 주고, 잡초를 제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위의 잡다한 소리에 귀를 막고 오직 눈만 뜨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야 합니다. 썬다씽의 말처럼, 개는 짖어도 기차는 달리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만을 바라볼 때는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풍랑이 이는 바닷물결을 보고 겁을 내자 바다에 빠진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주위의 모함이나 비난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절대 목적지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달리는 자동차에 저항이 큰 법입니다. 저항이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입니다. 이것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면 꿈이 상실될 수 있습니다.
거지 소경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여리고로 입성하시는 예수를 만납니다. 그는 예수께 다가가 눈 뜨기를 소망했으나 주위 사람들에 의해 저지당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여기서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욱 소리를 높여 예수를 불렀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선뜻 대답할 수 없다면 당신의 인생은 지금 죽은 상태이며, 도적맞은 것입니다. 그 도적은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 팔자타령이나 하고, 열등감이나 자기비하(自己卑下)나 하는 자는 늘 제자리나 맴도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어찌 여리고에 바디매오만 소경이었겠습니까? 그러나 꿈을 가진 바디매오만 나음을 입었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꿈으로 가는 길은 비포장도로입니다. 울퉁불퉁한 길이며, 바위가 가로 막고, 낭떠러지도 있을 수 있습니다. 아무도 이 길을 대신 뚫어줄 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꿈이란 노력을 대가로 치르는 것이며, 근면을 자본 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성공하고 싶습니까? 먼저 꿈을 가지세요. 그리고 참고, 인내하며, 노력하고, 달려보세요. 분명 꿈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어제의 꿈이 오늘의 현실이 될 것이며, 내일의 현실은 바로 오늘의 꿈의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전(前) 미국 대통령인 클린턴이 학창시절 백악관에서 케네디 대통령을 만난 후로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30년여 만에 그 꿈을 이루어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당신도 꿈을 가지세요. 믿음이 무엇입니까? 소망하는 것을 바라며,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믿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우리에게는 더 큰 꿈이 있습니다. 이는 산 소망이며, 영원한 영생의 소망입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1:3,4).
이 꿈만은 접어서는 안 됩니다. 이 소망을 이루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말처럼 현재의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기에 오늘 이 꿈을 위해 달리는 것입니다.
그 날은 곧 옵니다. 곧 우리는 꿈의 열매를 만져볼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주님의 다정한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세상 사람들 눈에는 어리석은 자처럼 보여도 분명 우리는 예수 때문에 받는 능욕으로 말미암아 더 크고 아름다운 면류관을 쓰게 될 것입니다.
먹어서 얻는 힘은 한계가 있으나 꿈으로 얻는 힘은 무한한 것입니다. 오늘 사과나무를 심지 않으면 내일 사과를 맛볼 수 없습니다. 당신이 먼저 꿈을 심으세요. 그리고 꿈을 심도록 자녀에게 가르치세요. 소망을 주는 목자가 되세요. 그리하여 당신의 가정에 희망이 만발하게 되고, 당신의 교회가 새 힘을 얻어 독수리가 날개 침 같이 창공을 날아오르는 대부흥의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어제의 꿈이 오늘의 현실이며 미래는 오늘의 꿈의 결과다
꿈이 있는 자는 내일의 주인이요 꿈이 없는 자는 내일의 노예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