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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호 목차 › Text 주일설교

강한 자에게 대적하지 말라 (눅 14:31 ~32)

163호 · 2003-04-10

미국과 이라크 전쟁이 발발한 지도 벌써 한달이 다 되어갑니다. 처음 단기전으로 예상되었던 이 전쟁은 장기전의 조짐을 띠고 치열하게 진행되더니 이제 결국 종전을 향해 치닫고 있습니다. 이 전쟁의 이유와 결말이 어떻든 전쟁이란 그 대가가 너무나도 큽니다.

많은 젊은이들과 무고한 양민이 죽어나가고, 공포에 질려 있는 것을 볼 때 전쟁이란 꼭 피해야 할 것임을 절감합니다. 전쟁을 겪어본 우리 세대는 그들의 참상을 보면서 과거 우리의 아픔을 새삼 떠올리게 됩니다.

만든 자의 말을 듣는 것이 지혜입니다. 반대로 만든 자의 말을 무시하는 자는 자충수(自充手)를 두는 어리석은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시대와 사상을 초월하는 광범위한 것입니다. 작금에 일어난 이라크 사태를 하나님 말씀에 조명해 보고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 만으로서 이 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힘이 약할 때는 무릎을 꿇는 것도 지혜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비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 간혹 골목에서 덩치 큰 녀석과 붙게 되는 때가 있었습니다. 얼른 생각해도 승산이 없는 싸움이란 걸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뒤에서 나를 보고 있는 친구 녀석 때문에 도저히 무릎을 꿇을 수가 없어 덤비다가 죽도록 맞은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저만 가지고 있는 기억은 아닐 겁니다. 이런 경우에는 피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똥은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러워 피하는 것이지요.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하던 길에 블레셋 성읍 중의 하나인 가드로 피난하여 그곳의 왕인 아기스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을 알아보고는 왕에게 고했습니다. ‘사울이 천천이라면 다윗은 만만인 자입니다. 그래서 사울이 저를 죽이려 하고 있고 다윗은 도망 중입니다.’ 이를 안 다윗은 다급해져서 그들 앞에서 침을 흘리며 미친 척했습니다. 대문짝을 흔들며 갖은 미친 짓을 했습니다. 그래서 위기를 모면하고 다른 곳으로 피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다윗의 행위를 비겁함이라고 일축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저는 참으로 현명한 처사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자리에서 ‘내가 비록 도망자의 신분이나 나는 장래 이스라엘의 왕이오.’ 라고 큰 소리쳤더라면 다윗은 분명히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모든 체면을 무시하고 미친 자처럼 행동하여 생명을 구했던 것입니다.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체면과 자존심을 버려야 합니다. 미국은 초강대국입니다.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은 군사력이나 경제력 등 어느 모로 보아도 이라크가 절대 약세에 있습니다. 그런 경우, 맞대응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입니다. 사담 후세인이 진정 국민을 생각했다면 미국과 화친을 청하여 전쟁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의 영광을 재현해 보겠다는 헛된 망상이 후세인 자신은 물론 이라크 국민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 아닙니까?

강한 자에게 순종하는 것은 결코 잘 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사대주의(事大主義)라고 비판해서도 안 됩니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법칙이 동물의 세계에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국제사회의 역학논리도 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 법칙을 무시했다가는 약한 자만 다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국가적 자존심 운운하다가 강대국이 돌아서 버린다면 약소국은 생존해 갈 수 없는 것이 오늘날의 국제 현실입니다.

세계여론이 있는데 그럴 수 있겠냐고 하다가 일본이 2차대전에 원폭을 맞았고 이번에도 세계의 반전여론이 거셌지만 지금 이라크는 집중포화를 맞고 있습니다. 전쟁에 무슨 인도주의가 있겠습니까! 지면 죽음인데 무슨 선택의 여지가 있겠습니까? 고로 전쟁은 철저히 강자의 논리에 따라 무참한 최후만이 기다릴 뿐입니다. 거기에 아무런 희망도 미래도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전쟁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합니다. 북한의 오판으로 한반도에 전쟁이 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우리의 자녀들에게 어떤 미래가 펼쳐지겠습니까? 국가적 운명이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강대국의 힘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현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국가든 먼저 내가 있어야 합니다. 힘을 키워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강해지면 할말하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강대국의 말에 불복종해도 저렇게 막대한 피해를 당하는데 하물며 하나님께는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은 창조주시며 세상 만물의 주관자이시니 말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탈출시키려고 할 때 걸림돌이 바로였습니다. 그래서 모세와 바로의 싸움이 계속되었습니다. 바로는 모세를 상대로 싸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세 뒤에 계시는 하나님과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바로는 열 가지의 재앙을 만났습니다. 마지막에 사랑하는 장자를 잃는 최악의 지경에 이른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의 무지가 부른 재앙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상대로 싸울 자는 천하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아니요’가 없고 오직 ‘예’만 있어야 합니다. 절대적 순종만이 하나님 앞에 가질 수 있는 우리의 자세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복을 누린 이유는 순종에 있습니다. 고향을 떠나라는 명령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갈 바를 알려준 것도 아닙니다. 그냥 떠나라고만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순종했습니다.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 또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순종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기뻐하셨으며, 그를 친구라 부르셨던 것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대항하여 고개를 들었더라면 그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일평생 죄악 가운데 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예수를 태우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한 어린 나귀처럼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어린 나귀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예수를 태우고 갔더니 뭇사람의 옷을 밟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영광에 동참했습니다. 그러나 어린 나귀가 고개를 드는 순간 나귀 등에 앉아계신 예수는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타지 않는 나귀는 결국 일터로 끌려가 죽도록 일을 해야 하며, 나중에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목을 세우면 우리 신세 역시 나귀 꼴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살아남을 자 아무도 없습니다. 작금의 이라크 전쟁을 보며 영적 세계를 깨닫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당당하다는 것은 아무 때고 소리를 지르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실력을 키우는 것이며, 지혜를 겸비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혜자는 때를 분별하며, 때에 맞는 합당한 처세를 아는 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분께 순종하다보면 차츰 성장하며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나중에 우리의 삶을 선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참 지혜입니다. 할렐루야!

승산이 없는 전쟁에 나서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죄요 죄의 삯은 결국 사망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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