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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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0호 목차 › 세상을 보는 창

“전도사님, 나 좀 보세요!”

1380호 · 2026-10-18

유아유치부 사역을 하다 보면 어린아이들의 순수한 행동을 통해 예수님의 마음을 다시금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어른들은 상황과 환경을 살피며 예의를 차리고 대화의 순서를 지키는 것이 바른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다릅니다. 전도사가 누구와 중요한 대화를 나누고 있든 개의치 않고 달려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먼저 건네며 도와달라 소리치곤 합니다. 자신이 느끼는 필요와 마음이 언제나 최우선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중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이라도 아이가 곁에 와 떼를 쓰면, 저는 대화를 잠시 멈추고 아이와 눈을 맞추며 그 원함을 먼저 들어주게 됩니다. 그 순진무구한 모습을 보며 하나님을 향한 내 기도의 자세를 돌이켜보게 됩니다. 주님과 나 사이에 상황과 체면이라는 장애물이 있을지라도, “주님, 내 이야기를 먼저 들어주세요!” 하고 아이처럼 간절히 떼쓰며 소리쳐 부르짖는 영적 순전함이 내게 있는가 돌아보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찾고 온전히 의지하라는 거룩한 초청입니다. 올해 우리 교회의 표어는 “내가 서 있는 땅부터 기름지게 하는 한 해가 되자!”입니다. 영적 은혜와 복 역시 타인을 돌아보기에 앞서, 나 자신이 먼저 하나님께 달려가 은혜로 흠뻑 적셔져야 합니다. 누구보다 먼저 주님께 나아가 “주님, 나부터 은혜와 복을 주세요!” 라고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그 어떤 중요한 역사보다 자녀 된 우리의 간절한 부르짖음에 먼저 귀를 기울이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주님을 향해 달려드는 어린아이의 담대함과 뜨거운 갈망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갑시다. 마침내 나를 향해 얼굴을 돌리시고 기름진 복을 부어주시는 주님의 은혜 안에서, 내가 먼저 새로워지고 세상을 복되게 하는 거룩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이삭 전도사
세상을 보는 창

믿음보다 감정이 넘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정이 없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기쁠 때 기뻐하고, 슬플 때 슬퍼하며, 억울할 때 마음 아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감정이 우리의 말과 행동을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기보다, 그 감정까지도 믿음 안에서 다스리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는 단순히 “내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했는가?” 만 물어서는 안 되며, “내가 지금 하는 이 말과 행동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약1:19~20). 이 말씀은 ‘사울 왕’과 ‘갈렙’을 생각나게 한다. 사울은 백성들이 다윗을 칭찬하자 시기와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그 감정을 다스리지 못했다. 결국 시기는 미움과 분노로 커졌고, 자신의 왕권을 지키려는 두려움에 끌려가면서 그의 마음은 점점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다. 이처럼 감정이 믿음을 압도한 경우다.

그러나 가나안 정탐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움에 빠져 원망하며 소리칠 때 갈렙은 달랐다. 그는 백성들을 향해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갈렙에게는 ‘다른 마음’이 있었다.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민14:24). 갈렙의 마음에는 감정보다 믿음이 있었고, 두려움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기대가 있었으며,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신뢰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면 갈렙이 품은 마음처럼 오늘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하나님은 갈렙처럼 감정보다 믿음을 앞세우며 성실하고 충성되게 말씀을 따르는 마음을 기뻐하신다.

감정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중요한 것은 감정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감정을 다스리는 것이다. 갈렙이 두려운 현실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던 것처럼, 우리도 감정이 넘치는 시대 속에서 사람을 상처 입히기보다 살리고, 공동체를 흔들기보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워가는 ‘남과 다른 마음’을 품고 살아가길 소망한다.

이정금 전도사
소망의 언덕

오늘부터 일하시는 하나님

이 표어를 가슴에 품고 기도의 무릎을 꿇은 지 어느덧 9개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눈앞의 현실은 그대로이고, 아무런 변화의 조짐조차 보이지 않아 마음이 지치고 낙심될 때가 있습니다. 마땅히 기도의 마지막 스퍼트를 올려야 할 때, 힘을 잃고 주저앉고 싶은 유혹이 우리를 찾아오기도 합니다.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수1:5). 참으로 위대하고 가슴 벅찬 약속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이 선포되자마자 여호수아가 곧장 모든 백성의 인정을 받고 영광의 자리에 올라선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약속과 성취 사이에는 여전히 불어난 요단강이 가로막혀 있었고, 묵묵히 견뎌야 하는 침묵과 훈련의 시간이 존재했습니다.

그 약속이 현실의 능력이 된 순간은 바로 여호수아 3장에 이르러서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전체의 로드맵을 다 알지 못했지만, 눈앞의 말씀에 순종하여 제사장들과 함께 거센 요단강 물에 먼저 믿음의 발바닥을 내디뎠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은 선언하십니다.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로 알게 하리라”(수3:7).

하나님의 ‘오늘부터’는 약속을 가슴에 묻은 채 포기하지 않고 순종의 첫발을 내딛는 그 순간에 시작됩니다. 홍해처럼 길이 먼저 열린 뒤에 건넌 것이 아니라, 넘실대는 물줄기를 향해 발을 들여놓았을 때 비로소 위에서부터 흐르던 물이 멈추어 섰습니다.

지난 9개월간 쉼 없이 기도해 왔음에도 여전히 사방이 막혀 있는 것처럼 느껴지십니까? 낙심하여 멈출 때가 아니라, 다시 한번 순종의 발을 물가에 적셔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은 일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온전히 자기를 비우고 순종의 발을 내딛는 바로 그 ‘오늘’을 기다려 오셨습니다.

한 해의 결승선을 향해 달려가는 지금, 믿음의 마지막 걸음을 내딛읍시다. 여호수아에게 임했던 그 기적의 ‘오늘부터’가,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우리 삶과 공동체 위에 새롭게 시작될 것을 확신합니다.

이현승 목사
내가 매일 기쁘게

은혜의 선순환으로

작년 이맘때, 꽤 독하게 다이어트를 했다. 스트레스를 핑계로 밤마다 폭식을 일삼았다. 먹고 자니 살이 찌고, 몸이 무거워지니 움직이기 싫고, 체력이 떨어졌다. 체력이 떨어지니 다시 스트레스를 받고, 또 먹었다. 돌이켜보면 살이 찐 데에는 나름의 ‘악순환’이 있었다. 결국 건강에도 좋지 않은 신호들이 찾아왔다.

보다 못한 아내가 어느 날 퇴근길에 내 손을 잡고 체육관으로 끌고 가 PT를 결제해주었다. 그것도 적지 않은 돈을 들여서 말이다. 이제는 도망갈 구멍이 없었다. 그 체육관에는 회원들끼리 일정 기간 감량을 경쟁해 성적에 따라 레슨비를 환급해주는 독특한 제도가 있었다.

처음 운동을 시작했을 때는 현기증이 날 만큼 체력이 형편없었고, 터져 나오는 식욕을 억누르는 것은 고문에 가까웠다. 하지만 ‘아내가 쓴 비싼 돈을 기필코 되찾아 오겠다’는 의무감 하나로 운동을 하고, 식단을 지키고, 또 운동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체중계의 앞자리가 두 번이나 바뀌었다. 비록 나보다 1kg을 더 감량한 회원에게 환급의 영광을 양보해야 했지만, 그 과정에서 돈보다 훨씬 값진 것을 배웠다. 바로 ‘순환’이 가진 무서운 힘이다. 악순환이든 선순환이든, 한 번 방향이 잡힌 흐름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우리 삶에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 악순환은 어떻게 멈출 수 있을까? 팽팽하게 당겨진 사슬에서 먼저 끊어지는 곳은 ‘가장 약한 고리’ 이다. 악순환의 굴레를 벗어나려면 내 삶의 가장 약한 고리부터 찾아 과감히 끊어내야 한다.

선순환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다. 악한 것들도 우리의 ‘약한 고리’를 공략해온다. 약한 고리는 남들이 보기에 부족한 부분이 아닌, 나만 은밀히 알고 있는 치부, 남들 앞에 자랑하고 싶은 교만의 지점이 영적 약한 고리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날마다 우리의 약한 고리를 주님 앞에 내어놓아야 한다.

내 삶에서 끊어야 할 악순환의 약한 고리는 무엇인지, 새롭게 연결해야 할 믿음의 고리는 무엇인지 돌아본다. 죄의 습관을 끊고, 삶의 궤도를 수정하기 위해선 총회장 목사님께서 늘 말씀하시듯 단호한 ‘결단’이 필요하다. 그 결단이 마침내 우리 인생을 은혜의 선순환으로 이끌어갈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작은 눈덩이였던 은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그 은혜의 눈덩이에 우리 모두 기꺼이 휩쓸리길 간절히 소망한다.

전호정 집사
참된 깨달음

함께 살아간다는 것

같은 이름의 색이라도 빛은 저마다 다르다. 사람의 마음도 그렇다. 누군가는 사랑을 말로 건네고, 누군가는 묵묵히 곁을 지키며 전한다. 같은 말도 금세 마음을 여는 사람이 있고, 오래 생각한 뒤에야 대답하는 사람이 있다. 표현이 다르다고 사랑의 깊이까지 다른 것은 아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기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남을 판단한다. 낯선 마음을 틀렸다고 단정해 버린다. 그러나 관계에는 내 마음을 전하는 일만큼 상대의 마음을 묻고 듣는 일이 필요하다. 나 역시 관계 속에서 누군가를 판단하기도 했고, 반대로 오해를 받으며 마음이 상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서로의 마음을 조금만 더 헤아렸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사랑은 상대를 나와 같은 색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마음을 조금 더 이해하려 애쓰는 과정이다. 사람의 가치는 나와 얼마나 닮았는지로 정해지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 다르기에 서로가 필요하다.

하나님은 우리가 더 나은 모습이 된 뒤에야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다. 지금 그대로를 사랑하신다. 그 은혜의 깊이를 안다면, 타인의 부족함도 조금은 너그럽게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행동을 받아들인다는 뜻은 아니다.

지난 주일 설교 말씀처럼 쓴소리를 할 줄도, 들을 줄도 알아야 한다. 진실을 말하되 상대의 존엄을 지키고, 잘못을 바로잡되 회복의 길을 열어두는 것 또한 사랑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한 가지 색으로만 지으시지 않았듯, 우리도 서로를 함부로 규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 번의 실수로 그 사람의 전부를 기억하지 말고, 지금의 모습만으로 그의 내일을 단정 짓지 말자. 서로의 마음을 살피고, 각자의 속도를 기다려 주자. 내가 미처 이해하지 못한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손길은 머물러 있다. 그 사람만의 빛깔로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일이 있다.

양은정 전도사
치우치지 않는 저울

당신의 일터가 선교지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5:13).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나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두 개의 직업이 아니라 하나의 소명만 있습니다.

직업이라는 ‘보케이션(Vocation)’은 어원이 ‘부르심’을 뜻합니다. 중세 시대에는 신부만 부름 받은 성직이고 농부나 상인은 먹고살기 위해 일하는 속된 존재로 여겼지만, 종교개혁자 루터는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선포했습니다. 회사에서 일하는 것과 주일에 봉사하고 말씀 듣는 것은 두 개의 다른 영역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하나의 현장이 서로 다른 장소에서 펼쳐지는 것입니다. 일터는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버티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파송하신 거룩한 선교 현장입니다.

이제 우리는 ‘먹고사는 것’을 넘어 ‘누가 주인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바울은 사도였음에도 고린도에서 스스로 천막을 만드는 노동을 선택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일을 하느냐, 안 하느냐가 아니라, “주님, 제가 지금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묻는 순종의 태도입니다.

돈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이 악한 것이지, 땀 흘려 정직하게 돈을 벌고 그곳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은 가장 강력한 예배입니다. 생존이 걸린 치열한 시장 속에서 정직을 지키는 것, 그것이야말로 성령의 능력 없이는 불가능한 진짜 선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일터는 어디입니까? 책상 앞입니까, 매장입니까, 혹은 거실입니까? 우리를 부르신 곳은 단지 돈을 벌어오는 무의미한 공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세상 속 파송 사도로 삼아 보내신 최전방 선교지입니다. 오늘 하루, 일터로 나아갈 때 이 한 가지만 기억하십시오. “이곳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나는 이 일터에 파송된 선교사입니다.” 이것을 알면 우리가 그곳에서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나옵니다.

목사님은 수십 년을 교회 지을 물질로 선교하시겠다는 사명으로 비디오테이프를 무료로 보내고, 세계로 나가 선교 사역에 매진하셨습니다. 지역마다 부흥회 포스터가 사라지고, 해봤자 돈 낭비고 사람도 안 모인다며 점점 교회와 교단들이 위축될 때, 다시 지역 목회자들을 깨우시며 한 사람만 변화시켜도 된다는 마음으로 사명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아산 집회, 이번 청주 집회가 그런 것입니다. 이건 다른 지역, 남의 일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돕고 내 지역에도 집회를 열어 좀 더 많은 이에게 복음을 전하리라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각자 삶의 자리에서 정직과 사랑으로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세우는 우리가 교회입니다. 몸 된 교회로 주님의 사명을 모두 감당하는 한 주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최연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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