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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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3호 목차 › 세상을 보는 창

당신의 근원은?

1373호 · 2026-08-30

영국의 런던 템스강 근처에 있는 재판소 뜰에는 유명한 포도나무 한 그루가 있다. 이 포도나무에서 거둔 포도는 다른 지역의 것에 비해 월등히 맛이 좋아 식물학자까지 이 포도나무 종자에 대해 연구할 정도였다.

그런데 연구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지며, 모든 의문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 포도나무의 뿌리가 템스강 밑바닥까지 뻗어 있다는 것이다. 포도나무의 뿌리가 멀리 강 밑바닥까지 뻗어 있어서 수분과 양분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었기에 그렇게 맛있는 포도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이다.

믿음의 뿌리를 깊게 내리면 하나님께 닿을 수 있다. 우리 인생의 뿌리가 하나님께 닿아 있기만 하면 극심한 가뭄이 닥쳐와도 절대 목마르지 않게 된다. 태풍이 와도 쓰러지지 않는다. 우리 삶에 열매가 늘 부실했던 것은 우리 믿음의 뿌리가 깊지 않아서다. 우물가의 여인이 뿌리의 방향을 재조정하고 지난한 삶의 갈증을 일순간 해소했던 것을 보지 않았는가!

당신은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 하나님을 향하라. 하나님께 뿌리를 내려라. 그리하면 당신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이며, 잎사귀가 푸르러 소나기에도 안식을 누리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근원이 좋아야 열매가 좋다. 가장 좋으신,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이 나의 근원이 된다면 우리에게 더 바랄 것이 무엇이겠나.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찌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롬11:18).

이초석 목사 저서 ‘사랑이 무르익어야 결혼에 골인한다’ 중에서

신앙논객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마음

저는 올해 대학청년부 수련회의 조장을 맡아 여러 목표를 세웠습니다. 수련회 목표 인원, 새신자 전도, 영혼 구원과 회복 등. 올해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저는 약 10년 동안 올해와 똑같이 목표를 정하고 적었습니다.

아쉽지만, 그 수많은 목표들은 이루어진 적보다 안 이루어진 적이 많습니다. 특히 10년 동안 이루지 못한 것이 있는데, 수련회 기간에 제 친구를 전도하는 것입니다. 저는 제 친구를 위해 매년 많은 기도와 노력을 했는데, 결과는 둘 중 하나였습니다. 거절하거나, 온다고 했지만 당일에 일이 생겨 못 온다는 연락을 주거나.

이 때문인지 올해도 친구에게 연락을 하려는데, ‘지금까지 안 됐는데 올해라고 될까?’ 하는 부정의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결국 이룬다는 목사님의 설교를 생각하며 다시 연락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흔쾌히 오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당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배 한 시간 전, 친구한테 일이 생겼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역시 이번에도 또 그러네, 이번에도 안 오겠구먼’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예배는 시작되고, 찬양도 다 끝나갈 때쯤 친구한테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10분 후에 도착한다는 것입니다. 친구가 이렇게 일이 생겼다고 전하고도 온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마음으로 기도하길 너무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저는 항상 수련회에 새신자를 데리고 가길 원했지만, 성공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올해는 두 명의 새신자가 수련회 출발 당일에 결정되어 오게 되었습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조원의 동생, 조원들의 친구들이 갑자기 추가되며, 우리 조는 제 예상 인원보다도 20%가 더 넘는 인원이 함께 수련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단순히 목표를 이뤘다는 간증을 하는 게 아닙니다. ‘어제는 안 됐지만 오늘은 된다’는 총회장 목사님 말씀이 맞다는 것을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아산집회와 청주집회를 앞둔 지금, 지난번 집회 때 전도하지 못했던 영혼이라도 이번에는 전도될 것입니다. 저번에는 어려웠던 것이 이번에는 수월할 것입니다. 그러니 모두 부정의 생각을 버리고 포기하지 않는 마음으로 주를 위해 힘써봅시다!

장수정

내가 매일 기쁘게

AI에는 없는 것

이세돌 9단이 알파고를 상대로 1승을 거둔 지 어느덧 10년이 흘렀다. 최근 세계 바둑계는 인공지능(AI) ‘카타고’와 대한민국 신진서 9단의 맞대결로 다시 한번 뜨겁게 달아올랐다. 인간이 2점을 먼저 놓고 시작한 접바둑이었지만, 결과는 신진서 9단의 2승 1패 승리였다.

알파고에 1승을 거뒀던 이세돌은, “AI는 조금이라도 득이 되는 수만 두며 효율성을 추구하지만, 사람은 손해처럼 보여도 가능성을 열어가는 전략적 판단을 한다.”고 평했다. 카타고에 승리한 신진서 9단 역시, “AI의 약점은 완벽함에 있다. 어려운 변화는 피하고 쉽게 가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 지점이 승리의 열쇠였다.”라고 밝혔다. 인간과 AI의 차이를 짚어낸 두 국수의 통찰을 통해 AI가 가질 수 없는 오직 인간만의 위대한 가치를 알 수 있었다. 바로 ‘모험과 도전’이다.

모험과 도전은 효율성과는 거리가 멀다. 불확실하고, 때로는 실패의 위험과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그러나 불확실함을 향해 자신을 내던질 수 있는 모험과 도전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만 허락하신 고유한 특권이다.

총회장 목사님은 늘 성도들과 청년들에게, “도전과 모험 없이 미래는 없다. 배는 항구에 묶어두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변화가 두려우면 그냥 현실에 만족하고 살라!”고 외치신다. 두려움을 넘어 모험과 도전에 나서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성취와 참된 기쁨을 향한 권면의 말씀이다.

우리 신앙에도 도전과 모험이 필요하지 않을까?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함에도 오직 말씀에 순종하여 나아갔듯, 하나님이 펼쳐주신 망망한 바다를 향해, 믿음의 노를 젓는 성도들의 신앙은 빛이 난다.

거친 파도를 두려워하지 않고 나아가는 우리 삶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위대한 역사와 만선의 기쁨이 가득하기를 소망한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전호정 집사
한국교회사
일사각오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

주기철 목사는 1897년 11월 7일 경상남도 창원군 웅천면에서 아버지 주현성과 어머니 조재선 사이의 유복한 양반 가문의 4형제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주기복이었으나, 훗날 기독교에 온전히 헌신하겠다는 의지를 담아 철저히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뜻의 주기철(朱基徹)로 개명하였다. 그는 어린 시절 지역의 서당과 웅천 개통학교를 마친 후,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에 입학한 것이 그의 생애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오산학교는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세운 민족 교육의 요람으로, 고당 조만식 선생 등이 교사로 재직하며 학생들에게 철저한 민족의식과 기독교 신앙을 심어주던 곳이었다. 주기철은 이곳에서 조만식 선생의 인격과 가르침에 깊은 감화를 받았으며,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청년으로 성장하였다.

1916년 오산학교를 졸업한 그는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하였으나, 만성적인 안질(눈병)이 악화되어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좌절을 겪었다. 고향에서 믿음 좋은 안갑수와 결혼생활을 시작하였다.

1920년 당대 최고의 부흥사였던 김익두 목사가 경남 마산 문창교회에서 인도한 부흥회에 참석하면서 성령의 깊은 체험을 하게 된다. 셋째 날 밤 집회에서 김익두 목사는 ‘성령을 받으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장내는 성령의 불길로 휩싸였다. “장님이 눈을 뜨게 만드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이 하시는 일이오! 마음이 가난한 자, 마음이 청결한 자는 지금 이곳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것이오!”

이때 주기철은 바윗돌보다 더 무거운 자신의 죄를 깨닫고 갑자기 통곡과 함께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울고 또 울어도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헤매며 찾던 그 빛, 허망함 속에서 그렇게 갈망했던 그 존재를 드디어 찾은 것이다. 이제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민족의 구원이 정치적 운동을 넘어 영적인 각성과 기독교 신앙에 있음을 깨닫고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1922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 공부를 하면서, 방학에는 고향 웅천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했다. 1925년 12월 22일 평양신학교 제19회 졸업생으로 졸업하고, 12월 30일에 열린 제20회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부산 초량교회의 초청을 받아 1926년 1월 10일 담임목사로 취임하였다. 초량교회 재임 중 100명의 교인을 300명으로 부흥시키고, 경남노회 부노회장을 세 차례 역임했다. 부산 초량교회에서 6년, 고향 마산 문창교회에서 5년 동안 담임목사로 사역하였고, 경남노회 노회장을 지냈다. 가는 곳마다 철저한 말씀 중심의 설교와 성도들을 향한 지극한 사랑으로 주일학교를 부흥시키고 지역 사회의 교육 운동을 주도하며 큰 존경을 받았다.

1933년 5월 안갑수 사모는 34세에 병사하였고, 1935년에 그가 담임하던 마산 문창교회의 집사 오정모와 재혼하였다. 1936년, 스승 조만식 선생의 강력한 권유로 당시 북한 지역 교회의 중심이자 민족 운동의 거점이었던 평양 산정현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된다.

1930년대 후반에 접어들며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조선인들의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그 정점에는 일본 국왕의 조상 등에게 절을 하게 하는 ‘신사참배(神社參拜)’가 있었다. 일제는 종교 단체들을 압박하였고, 결국 1938년 9월 장로교 총회마저 이를 수용하고 가결하는 부끄러운 배교 행위를 범하게 된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는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로 보았고, 조선 민족의 영혼을 말살하려는 행위로 간주했다. 그는 산정현교회 강단과 여러 부흥회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의 절개를 선포하며 성도들을 일깨웠다. 산정현교회에 부임한 주기철 목사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신사참배를 한 신도는 지위와 직분을 불문하고 출교한다’는 당회 결의를 이끌어낸 것이었다.

신사참배 거부 운동의 핵심 인물로 지목된 주기철 목사는 일제 경찰의 집중적인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 그는 1938년 봄 제1차 구속을 시작으로, 평양노회 참배 결의 거부 등으로 인해 총 4차례에 걸쳐 검속(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일제는 교회를 강제로 폐쇄하고 그를 목사직에서 파면하도록 노회를 압박하는 등 물리적, 정신적 압박을 지속했다.

평양형무소에 수감된 그에게 일제는 신념을 꺾기 위해 가혹한 고문을 자행하였다. 대못을 촘촘히 박은 널빤지 위를 걷게 하는 이른바 ‘못판 고문’을 비롯하여 채찍질, 물고문 등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형벌이 이어졌다. 그는 피눈물로 찬송을 부르며 이겨냈다.

“서쪽 하늘 붉은 노을 영문 밖에 비취누나 연약하온 두 어깨의 십자가를 생각하니 머리에는 가시관 몸에는 붉은 옷 힘없이 걸어가신 영문 밖의 길이라네/ 십자가의 고개 턱이 제아무리 어려워도 주님 가신 길이오니 내가 어찌 못 가오리 주님 제자 베드로는 거꾸로도 갔사오니 고생이라 못 가오며 죽임이라 못 가오리.”

주기철 목사는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도 ‘내 주 예수 외에 다른 신은 없다’ 며 묵묵히 고난을 감내하였다.

오정모 사모에게 면회가 허락되었다. 주 목사의 얼굴은 백랍 빛이었다. 안질이 도져 벌겋게 충혈되었고, 저고리는 헐렁하여 허수아비에게 걸쳐놓은 옷처럼 보였다. 오사모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했다. “목사님, 장하십니다. 조선의 교회가 다 무너져도 목사님이 견디시는 한 우리 주님의 교회는 그 자리에 건재합니다. 목사님, 승리하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목사님의 승리를 끝까지 지켜보시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평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오 사모는 한없이 울었다. “주님 용서하세요. 기차 안에서만 울고 평양에 도착하면 눈물을 흘리지 않겠으니 지금만 용서하세요.” (다음 호에서)

김종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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