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화복은 내가 선택한다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신30:15).
하나님은 우리 앞에 생사화복을 두셨고, ‘너희 맘대로 택하라’ 하십니다. 어느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질문 자체가 의미가 없지요? 누구나 생명과 복을 택할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과 복을 택하고도 실제 삶에서는 사망과 화를 거두는 자들이 있습니다. 왜 이런 모순이 발생할까요? 그건 자신과의 싸움에서 졌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 우리 인간의 마음에는 두 마리 짐승이 살고 있습니다. 선과 악이라는 짐승입니다. 이 둘은 서로 주도권을 잡기 위해 늘 싸우는데, 누가 이기느냐? 내가 먹이를 많이 주는 놈이 꼭 이깁니다. 선에게 먹이를 많이 주면 선이 악을 이겨 선한 자가 되고, 악에게 먹이를 많이 주면 악이 선을 이겨 악하고 거짓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이란 짐승에게 먹이를 주는 것, 그래서 선이 악을 이기게 하는 과정은 고통스러운 나와의 싸움이 동반됩니다. 오 리를 가자고 할 때 ‘미쳤어? 내가 왜?’ 하는 나와의 싸움이거든요. 나와의 싸움에서 이길 때 십 리를 가주게 되지요. 왼뺨을 맞으면 바로 양쪽 뺨을 쳐서 갚아주는 것은 반사적으로 일어나지만, 오른뺨까지 대주는 것은 나와의 싸움이거든요. 세상 모든 싸움에는 상대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싸움이 쉽습니다. 상대가 있으니까. 상대가 보이니까. 그런데 나와의 싸움은 싸울 상대가 나이므로 싸우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니까 봐주거든요. 나니까 용납하거든요. 나니까 이해하고 느슨해지거든요. 그래서 우리 삶에서 최대의 적은 바로 나인 것입니다. 오죽하면 사도 바울도,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21~24) 하며 탄식했겠습니까? 사도 바울도 예외 없이 두 마리 짐승으로 인해 늘 고심했던 흔적이 보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자유의지란 남의 강요 없이 내가 자발적으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선에게 먹이를 주는 것, 악에게 먹이를 주는 것, 그것은 내 자유의지입니다. 누가 강요하지 않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요셉은 형들에 의해 애굽의 노예로 팔렸습니다. 이건 내 의지대로 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노예로 팔린 다음 요셉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했습니다. 물론 요셉의 마음에도 두 마리의 짐승이 있었습니다. ‘불평하고 낙심하고 있을 것이냐, 아니면 열심히 살아 기회를 엿볼 것이냐?’ 그러나 요셉은 악이라는 짐승은 아예 아사시키고 선이란 짐승만 돌봤습니다. 그래서 어디서나 열심히, 진실되게 일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이 있을 때도 ‘타협할까?
진실될까?’ 두 마리 중 당 연히 선을 택했습니다.
그것을 보신 하나님이 선의 열매를 거두게 하사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는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삼손을 볼까요? 삼손은 요셉과 정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환경에 던져졌지만, 그 환경 속에서 선을 선택했습니다. 반면 삼손은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능력과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욕정을 이기지 못해 악을 선택했습니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패배한 것입니다. 삼손의 마음속에도 ‘절제할 것이냐, 내 욕망대로 살 것이냐?’ 두 마리의 짐승이 싸웠습니다. 그러니까 들릴라가 힘의 근원을 물었을 때 엉뚱한 말로 몇 번 대꾸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결국 삼손은 선의 짐승을 키우기보다 욕정의 짐승을 키웠습니다. 들릴라에 대한 욕정과 미련을 끊어내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능력을 잃고 두 눈이 뽑히고 쇠사슬에 묶여 블레셋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삼손을 무너뜨린 것은 블레셋 군대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입니다. 요셉도 자기 의지대로 선택했고, 삼손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선을, 삼손은 욕정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선택한 결과가 어떤지 아시지 않습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5~6).
인생의 가장 큰 싸움은 남과의 싸움이 아니라 바로 나와의 싸움입니다. 광주니다. “나와 싸워 이기면 됩니다. 나와 싸워 이기면 세상에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랬더니 그 장로는 이름도 아승(我勝)이라 개명하고는 열심히 헌신 봉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이기면 세상에 못할 게 없습니다. 악으로 향하는 나를 이기면 하나님 뜻대로 살게 되고, 게으른 나를 이기면 부지런하여 목적한 바를 이룰 것이고, 대충하는 나를 이기면 뭐든 완전할 수 있고, 거짓된 자를 이기면 진실된 자로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잠시 배고픈 나를 이기지 못해서 장자권을 팔아먹은 에서, 순간의 욕정을 이기지 못한 다윗, 세상적인 야망을 이기지 못한 가룟 유다의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이들 모두 어떤 외부적인 압력에 의해 결정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으로 스스로의 삶을 만든 것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스스로가 선택하고 결정하여 하나님을 속였고, 그 일로 인해 같은 날 죽게 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악을 버리고 선을 예수중심교회에어느장로가에게 ‘어떻게 해야느냐?’고 묻길래, 제가 이렇게 말해줬습택할 수 있을까요? 사실 인간의 힘으로는 그게 쉽지 않습니다. 생각보다 악의 유혹, 세상의 유혹이 심하거든요. 보암직하고 먹음직해서요.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7:25~8:2). 결국 예수님이 보내주신 성령을 힘입는 것만이 답입니다. 성령을 힘입을 때 악으로 달려가는 나를, 유혹이 심한 세상저으로 향하는 나를 이겨 선을 행하게 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신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앙생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활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8:12~14).
시편 1편의 말씀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자가 부르는 노래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1:1~2).
잘할 악인의 꾀를 좇지 않으려고 나와 싸워 이기고, 죄인의 길에 가지 않으려, 오만하수있지 않으려고 성령충만하여 말씀을 상고하여 나를 이기는 자가 복 있는 자요, 그러한 자가 받는 축복은,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1:3)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앞에 생명과 사망, 복(福)과 화(禍)를 두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신30:19).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과 복을 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려면 나와 싸워야 합니다. 나와의 싸움은 영적 싸움입니다. 영적 싸움에서 이겨야, 즉 영혼이 잘 되어야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한 축복이 이뤄집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왜냐? 우리는 늘 기도하여 성령충만하기 때문입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4:23).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