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과 논리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후10:3~8)
어떻게 태양을 멈출 수 있습니까? 어떻게 홍해가 갈라질 수 있습니까? 어떻게 죽은 사람이 살아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보지 못하던 사람이 보며, 듣지 못하던 사람이 들을 수 있습니까?
이걸 어떻게 이론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 못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이를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건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시는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론과 논리 속에 계시는 분이 아니다
여러분, 이론과 논리를 앞세우면 하나님을 알래야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론과 논리 속에 거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가끔 우리의 이론과 논리를 하나님 앞에 들이대며 말합니다. "하나님,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세요. 내 경험이 하나님의 한계가 아닙니다. 내 지식이 하나님의 능력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내가 모른다고 해서 하나님도 모르시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할 수 없다고 해서 하나님도 못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10:4~5). 이건 사도 바울의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이론과 논리가 '견고한 진'이라고 단정하고, 이걸 깨부수라고 합니다.
이론이나 논리로 따지자면 사도 바울을 당해낼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그는 금수저 집안에 배운 것도 많고, 아는 것도 많은 사람이었습니다(빌3:5~6). 그런 그가 하나님을 만나자 완전히 변했습니다. 자신의 간판과도 같았던 종교적 배경이나 학문적 배경들을 다 더러운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자신이 가진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데 걸림돌이 될뿐더러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비하면 그것들은 냄새나는 배설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빌3:8~9). 그래서 다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고후1:19).
여러분,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을 체험하려면 하나님이 일하셔야 하는데, 하나님이 일하시게 하려면 먼저 순종부터 해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하는데요?", "그게 가능해요?"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먼저 '예'부터 해야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예'라고 대답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이고, 하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어느 날, 처녀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 "너에게 아들이 있으리라"라고 말했습니다. 놀란 마리아는 "무슨 말씀입니까? 아직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눅1:34)라고 말했습니다. 마리아의 말은 합당한 말이었습니다. 남녀가 합해야 아이가 생긴다는 것은 초등학생도 아는 이론입니다. 그러자 천사가 말합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눅1:37). 이 말에 마리아는 자신의 이론을 내던지고 말합니다.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 마리아는 여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 말씀에 '예' 했습니다. 그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이 마리아를 통해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열국의 아비가 된다고 하셨고, 하늘의 뭇별과 같이 많은 자손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창15:5).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쭈글쭈글한 자신을 봐도, 경수가 끝난 아내를 봐도 아이를 낳는다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과학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아브라함이 옳았습니다. 그래서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았고, 첩 하갈에게서도 자식을 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100세가 되었을 때 아들 이삭을 주셨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자신의 모든 이론과 논리를 깨부수고 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했을 때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예' 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에는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히11:19)라고 적혀있습니다. 과거 죽은 몸 같았던 자신과 아내의 몸을 통해 아들을 주신 하나님을 경험했기에 아들을 바치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아브라함은 어마어마한 복을 받았습니다(창22:17~18).
여호수아 6장을 보십시오. 우리 이론으로는 철옹성인 여리고 성을 공격하려면 그에 걸맞는 무기를 가지고 공격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엿새 동안 여리고 성을 한 바퀴씩 돌고, 일곱째 날에는 성을 일곱 바퀴 돌고 나팔을 불며 소리를 지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그런다고 무너지나?" 그러나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예' 했고 그대로 행했더니 성벽이 정말 무너졌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 보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비결은 내가 가진 이론을 버리고 '예'하는 것임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이 시몬, 곧 베드로의 배에서 말씀을 전하시고는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리고 고기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그때 베드로는 말합니다. "주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습니다."
베드로는 어부였습니다. 그는 물고기 잡는 일에는 전문가였습니다. 어디에서 물고기가 잡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질도 해본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경험으로 보면 지금 그물을 내리는 것은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말합니다.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눅5:5). '내 경험으로는 말이 안 되지만, 주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순종하겠나이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해서 그물을 던진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그 말씀이 자신의 경험과 일치하지 않지만, 그는 그물을 던졌습니다. 이해되지 않지만 순종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가 잡혔습니다. 두 배에 가득 채웠습니다. 그가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스스로를 죄인이라 고백하며,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른 이유입니다. 체험했으니까. 경험했으니까.
하나님을 체험해야 하나님을 전할 수 있다
신학적인 지식이 많다고 해서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직접 체험해야 전할 수 있습니다. 판매사원이 자기가 써보고 좋을 때 입에 거품을 물며 상품을 광고하는 것처럼. 사람을 기피하던 우물가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고 경험하자 동네로 들어가서 복음을 전파한 것처럼.
하나님을 경험하려면 먼저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던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비가 죽었습니다(요11). 이 소식을 듣고도 이틀이나 더 머무시다가 그곳에 가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덤의 돌을 옮겨놓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자 마르다가 말합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요11:39). 누구나 마르다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릴 겁니다. 이론적으로 맞거든요. 그러나 주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11:40). '네 이론을 버려! 순종해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이 큰 소리로 나사로를 부르시니 죽어 냄새까지 난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와 걸었습니다. 이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십니다. 그래야 나아만 장군처럼 문둥병이 사라집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하나님은 창조주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그 하나님으로 하여금 마음껏 일하실 수 있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처럼 "그러나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자신의 이론과 논리를 내려놓는 여러분이 되기를, 그래서 그 믿음의 경험을 통해 세상으로 나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