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들고 세상으로
빛을 들고 세상으로
어느 날, 상사분이 다른 직원과 나를 부르셔서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조용히 식기도를 하고 눈을 뜬 순간, 다른 직원은 흠칫 놀라는 기색이었고, 상사분 역시 말없이 굳은 모습이었다. 이후 원래 얘기됐던 근무 조건이 예고 없이 변경되고, 힘든 일을 요구되고 일이 추가되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육체의 상전에게 성실함으로 주께 하듯 하라’,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순복하라’는 말씀이 떠올라 날마다 맡겨진 일에 집중했다. 반응은 고객들로부터 먼저 나타났다.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신 분들이 상사에게 나에 대한 좋은 말을 아끼지 않으셨고, 다른 일터로 데려가거나 추천하고 싶다고도 하셨다. 나는 주일에 일하는 곳은 갈 수 없다고 그리스도인임을 명확히 언급했고, 일의 결과에 만족하신 상사분께서는 흡족해하시며 이후 나를 더욱 신뢰해주셨다.
일할 때 요셉, 다니엘, 느헤미야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떠올릴 때가 있다. 그들은 세상 가운데서 자신이 맡은 일들을 어떠한 마음과 태도로 감당했을까? 그들의 일은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았고, 그들의 일터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신앙을 증명하는 곳이었다. 요셉이 일하는 중에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하자, 내가 어찌 ‘하나님 앞에 득죄하리이까’ 하며 뿌리쳤던 사건, 왕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면 사자굴에 던진다는 조서가 내려졌어도 변함없이 하루 세 번 기도하며 일했던 다니엘, 그리고 왕의 술 관원장으로 섬기던 느헤미야가 왕의 물음 앞에,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루살렘 성 중건을 요청했던 일이 그 증거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그들을 당신의 크신 계획을 이루는 자들로 사용하셨고, 세상과 만인은 그들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을 찬양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때때로 맡겨진 삶이 지치고 실망스러울 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께서 친히 내 안에 와 계심을, 그분이 나보다 앞서 길을 내시고, 나와 함께 가시며, 나를 통해 당신을 드러내셔서 찬양과 영광을 받고자 하심을, 이 사실을 상기할 때 지치고 상한 마음이 소생되고 세상을 넉넉히 이길 힘을 얻어서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삶의 예배를 살아낼 수 있다. 오늘도 빛을 들고 직장으로, 학교로, 가정으로 나가 나의 신앙이 삶으로 증명되는 멋진 하루를 살아보자.
이국진 사모
언젠가는 바로 오늘일 수 있다
최근에 잠시 병원에 입원할 일이 있었습니다. 전혀 생각지 못한 때 입원하게 되어 저도 그렇지만 주변에서 너무 놀랐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될 것을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건강하지 않은 습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모습으로 계속 살아간다면 ‘언젠가 이상이 있겠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언젠가’라고 생각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말 그대로 ‘언젠가’이기 때문에 그게 내일이 될지, 조금 더 먼 미래가 될지 모르지만, 당장은 눈에 띄는 문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확실히 문제가 될 일이었고, 습관을 바꾸지 못한 저는 결국 입원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병원에 누워서 저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회개 기도를 할 때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용서해주시고, 깨닫는 은혜를 허락하셔서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지 않게 해주세요.”
살아가면서 알고도 짓는 죄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사소하다 생각하고 쉽게 넘기게 될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니까 회개하면 되고, ‘언젠가 고치면 되겠지’ 하며 순간순간을 넘어갔습니다. 그 가운데 만약 이번에 겪은 일이 입원이 아니라 죽음으로 끝났다면 과연 나는 어땠을까요?
사람이 언젠가 죽는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입니다(히9:27). 그런데 그게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모레가 될지, 혹 또 먼 미래가 될지는 하나님만이 아십니다(마24:36). 그렇기 때문에 총회장 목사님께서 늘 말씀하시는 것처럼, 작은 것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눅16:10, 마5:19).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부터 말입니다.
윤에녹 전도사
원망과 선함
새신자 중에 80대 어르신 한 분이 계신다. 평생 예수를 모르셨던 분인데, 그 연세에 전도되어 교회에 나오시고 예배를 잘 드리시는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한날은 그 어르신과 같이 식사를 하는데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 어르신의 할아버지는 참봉이셨는데, 강릉에서 삼천석 땅을 가진 가장 부유한 집안이었고, 그 마을의 유력자였다고 한다. 그런데 ‘부자가 망해도 삼대 간다’는 옛말이 무색할 정도로, 그렇게 큰 부자였던 집안이 아버지 대에 폭삭 한순간에 망했단다. 그 이유를 말씀해주셨는데, 이유가 참 놀라웠다. 강릉에서 대관령으로 가는 수백 수천 명이 다니는 큰 길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사유지라고 그 땅을 막으셨다고 한다. 그래서 온 마을 사람들이 아주 먼 길을 돌아서 다니게 됐고, 먼 길을 돌아서 다닐 때마다 참봉댁을 원망했다고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그 길을 막고 나서부터 그 집안이 갑자기 몰락했다는 것이다.
나는 생각이 깊었다. 마을 사람들의 원성으로 삼천석 땅을 가진 그 부잣집이 한순간에 망할 수도 있는데, 우리 크리스천들은 더더욱 원망들을 행동을 하면 안 된다. 더 나아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한다.
매주 수요일마다 젊은 집사님들과 권사님들이 ‘할렐루야’ 어깨띠를 매고 교회 주변 공용주차장과 동네 구석구석을 청소하는데 그렇게 흐뭇하고 보기 좋을 수가 없다. 온갖 폐기물과 쓰레기가 쌓여있는 더미들을 싹 걷어내고 빗자루질하니 주차 공간도 넓어지고 주차할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고 우리 교회 청년에게 1층에 가게가 있는 우리 교회 건물 앞을 매일 청소하라고 했는데, 나는 이것이 교회와 예수님의 얼굴을 빛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겨울에 눈이 와서 길이 미끄러울 때는 일찍 나와서 교회 앞 주차장에 쌓인 눈부터 쓸어내고 염화칼슘도 뿌려놓는다. 1층 식당 손님들도, 우리 교회 성도들도 활짝 웃게 되고 예수님도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결코 원망 들을 일일랑 하지 말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며, 이런 작은 친절과 배려, 희생과 섬김을 통해 복음을 더욱 널리 전파하는 우리 예수중심교단 전 성도가 되기를 축복하고 기도한다.
장순천 목사
걱정이 있으신가요?
요즘은 사람들이 고민과 걱정이 생길 때 인공지능에게 털어놓고 위로받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제 주변만 해도 챗GPT 등 인공지능에게 상담을 받고, 그것을 맹신하는 바람에 웃지 못할 일이 왕왕 벌어집니다. AI는 대량의 데이터를 학습해서 답변을 생성하는데,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의존해 버린 케이스죠. 변화하는 시대에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것은 중요하고 꼭 필요한 능력입니다. 하지만 인공지능에게 의존하게 되는 순간, 수단과 목적이 뒤바뀝니다. 특히 그것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순간, 문제는 심각해지죠. 걱정 근심, 염려가 생기면 다른 누구보다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저도 최근 몇 가지 고민이 있었습니다. 머릿속으로 혼자 여러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주변에 조언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문제가 해결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면서 눈을 떴는데 빌립보서 4장 6절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와 간구로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잊고 염려하는 자녀에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또 원망인지 불평인지 모를 기도 대신 감사함으로 아뢰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럴 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고 하십니다.
사실 걱정의 90%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유명한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 파도치듯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거죠. 하지만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아뢸 때, 내 마음과 생각을 평강으로 지켜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내 생명의 근원인 마음만 잘 지켜도 생명력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가장 지혜로운 자는 만든 자의 말을 듣는 자’라는 총회장 목사님 말씀처럼, 염려가 생기면 먼저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로 아뢰는 것이 지름길입니다. 그래서 매일 성전에서 기도할 수 있는 것은 큰 복입니다.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면 자연스럽게 내 염려와 근심을 털어놓게 되기 때문입니다. 종종 다른 교회에 다니는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자유롭게 기도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거나, 장소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우리 교회는 목사님께서 기도를 늘 강조하시기 때문에 기도하는 문화가 잡혀 있고, 어떻게든 한 번이라도 더 기도할 수 있음에 감사했습니다.
염려하거나 근심하지 말고 모든 걱정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세요. 내 염려를 주께 맡기시면 주께서 나를 돌보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대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 나의 필요를 채우신다’ 약속하셨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평안 가운데 서는 한 해가 되길 축복합니다!
전소희
관계의 거리
나에게는 누나와 남동생이 있다. 보통의 형제자매가 그렇듯 어렸을 적에는 종종 티격태격 싸운 적도 많았지만, 커 가면서, 특히 엄마가 돌아가신 후부터 우리 삼남매는 똘똘 뭉쳐 서로 힘을 주고받으며 잘 지내왔다.
그러던 어느 날 언짢은 대화가 한 번 있은 후, 그다지 화해를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억울한 점도, 오해도 있었을 수 있겠지만, 대화하지 않고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거리가 멀어졌다. 아내는 내게 ‘화해하라’고 다독였지만, 막상 또 싸운 것도 아니어서 화해한다는 것도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지금은 누나와 동생이 내 아내, 그리고 아이들과는 왕래하지만, 나는 예전처럼 그들과 소통하진 않는다. 싸운 것도, 억울한 것도, 오해도 없이 그저 사이가 멀어진 채로, 다시 가까이 가려고 하지도, 서로의 삶을 공유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가족의 끈으로 묶여만 있을 뿐, 예전처럼 친하지 않다. 아마 원인은 대화인 듯하다. 더 자세히는 대화하려는 의지와 노력의 문제인 듯하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저 그렇게 사이가 멀어진 채로 있는 사람들이 있다. 공예배는 참석하여 끈으로는 묶여있으나 하나님과 친하지 않다. 하나님 말씀이 함께하는 것이 곧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이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건만, 머리로만 원하고 말아버린다. 어느 부서이든, 구역이든 속하지도 않아 서로의 삶을 공유하는 성도의 교제도 없다. 그렇게 관계가 멀어져 가고, 멀어진 채로 있지만, 딱히 개선을 위한 의지와 노력은 없다.
다시 친해지려 하니 어색하고 불편한 마음이 든다. 그래도 해야겠지? 아니! 해야한다. 가족이 남이 되면 안 되니.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면 안 되니.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약4:8).
박찬영 집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