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가 거울이 될지언정 노예는 되지 말라(사43:18~19)
계곡 없는 산은 없듯, 흠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실패나 상처 없는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나 부끄럽고, 숨기고 싶은 과거가 다 있습니다.
그런데 늘 그 과거에 계속 발목이 잡혀 있다면, 그것이 올무가 되어 있다면 과연 그 사람에게 미래가 있을까요? 그것은 마치 말뚝에 밧줄을 단단히 묶어 놓은 배와 같습니다. 그 배는 밀물이 되어 파도가 밀려와도 절대 너른 바다로 나갈 수 없듯, 과거에 묶여있는 사람은 미래를 향해 절대 나갈 수 없습니다. 그것을 풀어내야지요. 그러므로 과거가 거울이 될지언정, 과거의 노예가 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베드로가 어린 비자 앞에서 스승인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죽기까지 따르겠다며 당당했던 베드로가 어린아이 앞에서 저 살겠다고 스승을 부인하고, 그것도 모자라 저주까지 했습니다. 대역 죄인이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베드로는 그 죄에 눌려 살았습니다. 예전처럼 고기 잡는 어부로 돌아갔지만, 아무 의욕도 없이 그저 그물만 던져놓고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미래는 없었습니다. 마지못해 사는 거였지요.
어느 날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물고기를 구워 허기를 채워주신 후에 묻습니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무려 세 번이나 동일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눈물을 흘리며 대답합니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요21:17). 이 말인즉, “제가 비록 죽을죄를 지었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주님을 너무 사랑합니다.”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그렇다면 나도 너의 죄를 용서하니 이제 죄의식을 벗어던지고 너른 대양으로 나가라.”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묶여있던 밧줄을 풀어주신 겁니다. 밧줄이 풀린 베드로는 너른 대양으로 나가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길을 갑니다.
여섯 남자를 데리고 살던 여인이 과거에 사로잡혔다면 나가 복음을 전할 수 없었을 거고, 일곱 귀신이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가 과거에 발목이 붙들렸다면 성경에 기록될 만한 위대한 여인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던 바울이 과거를 잘라내지 못했다면 전도자로서 새 일을 이룰 수 없었을 겁니다. 바울의 말입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저 역시 과거를 들추자면 감히 하나님의 종이란 사명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만은 잘 압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면 어떠한 과거든 다 잊으신다는 것을, 그리고 죄가 없는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다는 것을.
이건 제 신조나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정말 그런 분임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미7:18~19).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8:12).
더 말할까요? 요한일서 1장 9절에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셨고, 예수님도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눅9:62) 하시며 과거의 사슬을 끊어버리라 촉구하셨습니다.
바울은 우리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말해줍니다.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3~14).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잘한 일이든 잘못한 일이든 일단 뒤엣것은 잊어버리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과거를 잘라내라는 겁니다. 과거 때문에 주눅 들거나 죄책감에 사로잡히지 말고, 또 과거로 인해 우쭐거리지도 말고 오직 푯대, 즉 새로운 목표를 세워 달리라고 합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말이 있습니다. 옛것을 되새기며 새로움을 깨닫는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과거를 거울삼을 필요는 있지요. 그러나 과거가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미래로 도약하기 위한 디딤돌이 되어야 한다는 거죠.
성경도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사43:18~19). ‘옛적 일’, 즉 과거를 잘라내야 하나님이 새 일을 행하신다는 겁니다.
다윗을 봅시다. 다윗은 충신인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처, 밧세바를 자기 아내로 취했는데 그 둘 사이에 아이가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이미 선지자 나단이 하나님의 진노로 인하여 죽을 것이라 예고된 아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이를 치시매 그 아이가 심히 앓자, 다윗은 아이를 위하여 금식하고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이레 만에 죽었습니다. 다윗의 신복들이 아이가 죽은 것을 차마 고하지 못하고 있을 때, 수군거림을 듣고 다윗이 묻습니다. “아이가 죽었느냐?” 신복들이 아이가 죽었다고 하자, 다윗은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하나님 전에 들어가 경배하고는 돌아와서 음식을 먹었습니다.
신복들이 보기에 다윗의 행동은 정말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아니, 아이가 앓아누워있을 때는 금식하고 난리더니, 죽었다니까 오히려 괜찮네?’ 그러자 다윗이 말합니다.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삼하12:22~23).
맞습니다. 다윗의 말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니 과거를 잊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미 나단이 책망할 때 침상을 적시는 회개를 했기 때문에 더는 과거의 일을 되새김질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솔로몬 같은 더 좋은 아들을 주사 위로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자”(히12:1) 했습니다. 경주를 하려면 몸이 가벼워야 합니다. 그래서 마라톤 선수들이 아무것도 어깨에 메거나 들지 않고 달리고, 산 정상에 오르는 자도 최소한의 짐만 꾸리는 것이며, 수영선수들이 옷을 최대한 가벼운 재질로 만들고, 심지어는 몸의 솜털까지 미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상 위의 주자입니다. 그런데 철갑처럼 무거운 죄의 옷을 입고 어찌 경주하겠고, 한쪽 다리는 과거라는 말뚝에 묶어두고 무슨 경주를 하겠습니까? 히브리 기자는 그것들을 ‘당장 벗어버리라’ 말합니다. 회개하고, 회개했으면 잊으라는 것입니다. 가끔 꺼내서 들춰보지도 말고, 아예 깡그리 잊으라고 합니다. 그런 자가 완주할 수 있고, 경주에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2026년,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어제까지는 과거입니다. 그것을 다 잊고 새로운 꿈을 향해 달리세요. 흘러간 물로는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으니까요. 과거는 부도난 수표이니까요.
다시 아픈 과거, 부끄러운 과거를 갖지 않으려면 사슴을 쫓다가 토끼에게 맘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목표만 바라보며 달려야 합니다. 주위 사람들 말에 흔들리지도 말고 푯대만 바라보고 달리세요. 그러면 목표한 바에 이를 것이고, 분명히 당신이 서 있는 자리가 기름지게 될 것이며, 당신으로 인해 당신의 주변이 기름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할렐루야!
흘러간 물로는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
강을 건넜으면
뗏목을 불살라버려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