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善)을 악(惡)으로 갚지 말라(롬12:9~21)
목회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불일 듯 교회가 부흥하자 기성 교단과 기독교 언론으로부터 모함과 핍박이 시작되었습니다. 가짜니, 살인자니, 사기꾼이니, 이단이니 하며 저와 우리 교단을 난도질했습니다. 정말 부아가 치밀어 참을 수 없었습니다. 당장 달려가 그들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래, 나도 신문사나 하나 차려 맞대응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날 저녁, 억울한 마음에 펑펑 울며 기도하는데, 주님이 찾아와 말씀하셨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갚아라.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그리고 너는 선한 목자가 되어 양을 먹여라.”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나를 찾아오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해서 울고, 내가 당한 것들이 억울해서 울고, 악에 그대로 대항하려던 내가 부끄러워 회개하느라 울고….
‘선한 목자’라는 찬송이 그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믿음의 어머니가 생전에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어느 사람이 문제가 생겨 궁지에 몰리자 그만 믿음의 어머니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우고 발뺌을 하는 통에 어머니께서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믿음의 어머니에게 신세를 아주 많이 진 자였습니다. 어머니가 이모저모로 많이 도와준 사람인데 그리한 것입니다. 제가 ‘어머니께 진실을 밝히면 되지, 왜 고통을 당하시느냐?’고 속상해서 말씀드렸더니, 어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이 참 놀라웠습니다. “이 목사, 그 사람이 살겠다고 나를 밟은 것인데 나마저 살아보겠다고 그 사람을 밟으면 그 사람은 어디로 가란 말인가?” 믿음의 어머니는 선을 악으로 갚은 자까지도 용서하신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셨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12:17~18).
그러나 살다 보면 선을 악으로 갚는 사람이 종종 있습니다. 성경에도 있습니다. 나발이란 사람입니다. 다윗이 광야에 있을 때 나발의 양 떼를 지켜주었습니다. 약탈자에게서도 보호해주었습니다. 나발의 가족과 종들도 이 점을 인정했습니다.
“우리가 양을 지키는 동안에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어 밤낮 우리에게 담이 되었음이라”(삼상25:16). 다윗이 보이지 않는 울타리가 되어준 것입니다.
어느 날, 나발의 집에서 양털 깎는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다윗은 정중하게 사람을 보내 최소한의 호의를 요청합니다. 그런데 나발의 반응이 아주 냉혹했습니다.
“다윗이 누구냐? 요즘 주인을 떠난 종들이 많다던데, 그도 그런 자가 아니더냐? 그런 자에게 내가 왜 주냐?” 은혜를 모욕으로 갚은 것입니다. 다윗이 그때 화가 치밀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 자의 소유물을 광야에서 지켜 그 모든 것을 하나도 손실이 없게 한 것이 진실로 허사라 그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는도다”(삼상25:21).
분노한 다윗은 군사를 이끌고 나발을 치러갑니다. 그런데 도중에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중재로 피를 흘리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이 다윗이 악을 악으로 갚지 못하게 아비가일을 통해 차단하신 것입니다. 그 후 나발은 그 소식을 듣고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더니 한 열흘 후에 죽었습니다(삼상25:37~38).
사울도 그랬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악신이 임했을 때 수금을 타 악신을 쫓아주었고, 골리앗이 하나님의 이름과 이스라엘 군대를 얕잡아 볼 때 골리앗을 물리쳐주었습니다. 사울도 다윗이 은인인 걸 압니다. 그래서 사위까지 삼은 것 아닙니까? 그런 사위를 업고 다녀도 시원찮을 판에 다윗을 시기하고, 그것도 모자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받아 왕권을 빼앗겼고, 자식과 함께 죽음을 맞아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습니다. 성경은 엄히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악으로 선을 갚으면 악이 그 집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17:13).
그러나 악을 선으로 이긴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셉입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아 구덩이에 던져지고, 돈 몇 푼에 팔려 노예가 되었습니다. 팔려간 곳에서도 묵묵히 충성했지만,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인생이 됩니다. 후에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은 형제들에게 복수할 명분도, 또 그러할 능력도 충분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자기 형들을 용서하고 그들이 두려워할 때 그들을 위로했습니다.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창45:8).
세월이 흘러 아버지 야곱이 죽자 혹시라도 요셉이 악을 갚겠다 할까 봐 형제들이 불안해할 때, 요셉은 다시 형제들에게 말합니다.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창50:19~21).
요셉은 형제들의 악을 선으로 덮었습니다. 또한 누명을 씌운 보디발의 아내에게도 어떠한 보복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받은 축복을 볼까요? 그는 애굽의 총리대신의 지위로 그의 가문뿐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을 일으켰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이유 없이 쫓김을 당하고, 생명의 위협을 받았지만, 두 번이나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악을 행치 않았습니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기회다.’라며 보란 듯이 칼을 뽑아 들었겠지만, 다윗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삼상24:6). 그런 그가 받은 축복은 너무 잘 아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
여러분,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마5:44).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원수가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는 것이고(롬12:20), 오른뺨을 때리는 자에게 왼뺨도 돌려주는 것이고, 오리를 가자고 우기는 자에게 십리까지 가주는 것이고, 속옷을 빼앗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도 아직 부족합니다(마5:39~41).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해주는 것입니다(마5:44). 가능하시겠습니까?
저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선’을 앞에 두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해야 선한 쪽인가를 고민합니다. 그러나 때론 선의 경계가 애매할 때도 있는지라 저는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예수님은 선으로 악을 이기신 분이십니다. 자기를 파는 제자를 끝까지 건지려 하셨고, 배신한 제자도 품으셨으며,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눅23:34). ‘그 예수님이라면 이럴 때는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하면 답이 나옵니다. 그 답은 언제나 선한 것이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하니 모든 것이 가능합디다. 배신한 자들을 용서하게 되고, 혹 그들이 잘못되어 어려움에 처하면 돕게 되고, 다시 기회를 주게 됩디다.
“그러다 억울해서 내 속이 터져버릴 거예요.” 하시는 분들, 제 말을 들어보세요. 나발을 누가 쳤습니까? 다윗인가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삼상25:38). 사울도 하나님이 치셨습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롬12:19) 하셨습니다. 그러니 억울해할 것 없이 선을 행하면 됩니다.
여러분,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악인의 소행이요, 선을 선으로 갚은 것은 보편적인 사람의 행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악을 선으로 이겨야 합니다. 늘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하면 능히 악을 선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배움의 끝은 실천입니다. 부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할렐루야!
만인에게 좋은 것을 주자
인생사 자업자득이다
가시나무 씨를 심고
포도를 거두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