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王)의 자격
왕(王)의 자격​
대한민국 헌정사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순간이 다시 한번 재현되었다. 국민의 손으로 뽑았던 대통령이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통해 파면된 것이다. 이유야 어찌 됐든, 또 그에 대한 평가가 어떠하든 민주주의 체제에서 이런 사태가 발생한 것 자체가 안타까울 따름이다. 헌법 제1조 제2항에 명시되어 있듯이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대통령도 국민이 뽑은 것이다. 고로 주권자인 국민의 마음에 합하지 않으면 심판을 면키 어렵다.
사무엘상 8장에는 늙은 사사 사무엘이 그의 자식들을 사사로 세워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는데, 그들이 제대로 통치하지 못하자 백성들이 불만을 품고 다른 이방 나라들처럼 우리에게도 왕을 세워달라고 사무엘에게 요구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무엘이 상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8:7).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백성들의 요구를 묵살하지 않으시고 사울을 왕으로 세우셨다. 그런데 사울은 재임기간 중 주권자인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다. 자기를 왕으로 세운 분이 하나님이신데, 그의 말씀에 역행했다. 하여 하나님이 그를 왕 세우신 것을 후회하신다는 평가까지 받게 된다. 그 결과 그는 파면되었다.
그러나 다윗은 주권자로부터 가장 좋은 평가를 받은 왕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행13:22)고 말씀하실 정도로 하나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했던 왕이다. 그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여쭈었고, 성전 건축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 있었음에도 하나님께서 막으시니까 기꺼이 포기했다. 용맹스럽게 잘 싸워서, 지혜가 충만해서가 아니라 주인 되신 하나님 뜻에 합했기 때문에 위대한 왕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떠한가? 당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했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만왕의 왕으로 세워주셨다.
주권자의 뜻을 거스르면 파멸뿐이다. 우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 영원한 복락을 누리자.
신혁주 전도사
blessedmic@naver.com
에벤에셀의 은혜
이스라엘이 대적 블레셋에게 승리를 거둔 날, 사무엘 선지자는 지금까지 자신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기념비를 세우고 에벤에셀-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이라 불렀다(삼상7:12).
내 삶도 에벤에셀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으로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또 한 분, 나의 어머니가 계시다.
나는 철저하게 어머니의 기도로 만들어진 사람이다. 자식을 위해 나보다 많이 기도한 사람은 없을 거라고 하실 만큼, 어머니는 하나뿐인 딸이 잘 되기를 밤낮으로 간구하셨다. 매일 아침 들려오는 방언 기도 소리를 알람 삼아 눈을 떴고, 그 눈물의 기도가 내 삶을 지켰으며, 이제는 가장 복된 길을 걷게 되었으니 어머니의 기도가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이다. 나는 얼마나 복 있는 사람인가? 그랬던 철부지는 어느덧 부모님의 은혜를 헤아릴 수 있는 나이가 됐다.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잠23:25)는 말씀대로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 성실하게 살았고, 자주 어머니를 모시고 다녔다. 내 입에 맛있었던 곳이나 근사한 경치의 카페라도 갈 때면 눈을 반짝이는 어머니를 보는 것이 참으로 행복했다. 다만 평범한 일상에서 멀어진 딸이 된 것에 죄송한 마음이 들지만,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내 어머니를 가장 복되게 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사무엘이 돌을 세우고 여기까지 인도하심에 감사한 것을 본받아 올해에는 지금까지 길러주신 은혜에 더욱 감사하며 카네이션을 달아드리도록 해야겠다.
김혜리 교육전도사
joyjoy222@hanmail.net
오직 예수뿐이네
저에게는 문화생활을 아주 적극적으로 즐기는 친구가 있습니다. 페스티벌과 콘서트도 다니며 누가 봐도 재밌고 신나게 삶을 꽉꽉 채워 사는 친구인데요. 얼마 전 그 친구에게 힘든 일이 생겼습니다. 감정적으로 많이 우울해 약속도 더 잡고, 재밌는 곳도 더 자주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람들을 만나 종일 웃다가도 집에 혼자 있으면 불안하고 우울하고, 재밌는 걸 보다가도 핸드폰을 끄면 눈물이 났다고 합니다. 세상에 즐거운 것들이 너무나도 많지만 제 친구의 마음을 달래주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저는 그 친구에게 교회를 나가보라고 권유했습니다. 세상 것들은 물론이고, 친구인 저도 그 마음을 치료해주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친구는 제 말에 심드렁하게 답했지만, 저는 제 친구가 교회에 나가 예수님을 영접하길 원합니다. 예수님이 주신 완전한 평안은 세상 것과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능 프로그램 보는 것을 정말 좋아합니다. 하지만 마음이 힘들 땐 그런 프로그램들이 당장 저를 깔깔 웃게는 만들어도, 저를 괜찮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제가 완전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경우는 딱 한 가지입니다. 바로 기도의 자리에 나가 눈을 감고 예수님을 떠올릴 때입니다.
마음이 복잡할 때는 기도의 자리에 나가 모든 기도 제목과 복잡한 생각들을 다 접어놓고 일단 예수님을 떠올립니다. 눈을 감고 내 주변에 사람도 없고 오직 예수님만 내 주변을 꽉 채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나의 문제들은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않고 내 삶을 주관하시는 예수님만이 저를 채우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두려움과 불안함은 사라지고 평안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 평안은 저를 다시 강하게 합니다.
세상에 날 즐겁게 하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위로가 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나에게 완전한 평안을 줄 수 없습니다. 참된 평안과 위로 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뿐입니다. 그래서 결국엔 나에게 필요한 건 오직 예수뿐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장수정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듯이, 시기, 질투는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런데 시기, 질투하는 마음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이웃과 공동체에 여러 가지 해악을 끼치게 됩니다. 성경은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다’고 말합니다. 사울은 시기로 일생을 다윗을 죽이려는 일에 매진했습니다. 유대인과 바리새인도 시기심에 눈이 멀어 예수님의 일을 사사건건 방해했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는 악행을 저지릅니다.
반면, 세례 요한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갈 때, 예수님을 견제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애쓰지 않았습니다. 숫자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지도 않았습니다. 인간적인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그저 하나님께만 시선을 두며 말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세례요한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지만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평안과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이와 반대되는 감정도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쌤통’이라고 하며 독일어로는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이나 고통을 보며 기쁨을 느끼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 역시 시기, 질투에서 비롯됩니다. 저도 가끔 이런 감정을 느낄 때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는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가족을 떠올렸습니다. 가족에게는 시기나 질투를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족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됩니다. 이를 통해 제 안에 사랑이 부족함을 깨달았습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보다 작은 일만 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나보다 더 큰 일도 하리라”(요14:12)고 말씀하셨습니다. 총회장 목사님도 “나보다 더 큰 일을 하는 자가 돼라.”고 하십니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을 바라는 스승의 마음, 자녀가 잘되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결국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대할 때, 시기와 다툼이 아닌 화평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전소희
어린이
나도 어린이였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람은 엄마였고,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세고 멋진 사람은 아빠였다. 편식을 많이 해도 엄마가 해주는 음식이 제일 맛있었고, 아빠는 뭐든지 척척, 못하는 것이 없는 맥가이버였다.
온종일 어두워질 때까지 친구들과 노는 게 그렇게 즐거웠던 때가 있었고, 아이스크림 하나에, 라면땅 하나에 그렇게 행복해하던 때가 있었다. 어둠을 무서워해도 망토만 두르면 날 수 있는 초능력을 상상했고, 고추잠자리에 실을 묶어 달렸고, 연을 잡고 신나게 뛰던 때가 있었다. 자전거만 있으면 세상 어디든 갈 수 있었고, 모든 마음을 다 주는 친구가 있었고, 친구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밤에 잠이 잘 왔고, 감정선이 복잡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대로 또 흡수하였다. 한 밤, 두 밤 세는 간절함이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을 때 의심보다도 신기해하였다.
미숙하지만 아름다웠던, 순박하고도 순수했던, 다시 돌아오지 않는 그때, 나의 어린 시절. 우리 모두는 그렇게 어린아이였을 때가 있었다.
이 세상 모든 아이들을 축복하고 사랑하는 어린이날에,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다시 어린이가 되는 상상을 해본다. 마음과 생각이 육신을 따라가는 것일 뿐, 우리 영혼은 나이를 먹지 않기 때문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막10:15).
박찬영 집사
cross35@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