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자는 어리석다
“슬프다 이 성이여 본래는 거민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히 앉았는고 본래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고 본래는 열방 중에 공주 되었던 자가 이제는 조공 드리는 자가 되었도다 밤새도록 애곡하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 중에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도 다 배반하여 원수가 되었도다 유다는 환난과 많은 수고로 인하여 사로잡혀 갔도다 저가 열방에 거하여 평강을 얻지 못함이여 그 모든 핍박하는 자가 저를 쫓아 협착한 곳에 미쳤도다 시온의 도로가 처량함이여 절기에 나아가는 사람이 없음이로다 모든 성문이 황적하며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심하며 저도 곤고를 받았도다 저의 대적이 머리가 되고 저의 원수가 형통함은 저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곤고케 하셨음이라 어린 자녀들이 대적에게 사로잡혔도다 처녀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감이여 저의 목백은 꼴을 찾지 못한 사슴이 쫓는 자 앞에서 힘없이 달림 같도다 예루살렘이 환난과 군박을 당하는 날에 옛날의 모든 즐거움을 생각함이여 백성이 대적의 손에 빠지나 돕는 자가 없고 대적은 보고 그 황적함을 비웃도다”(애1:1~7).
위 본문은 예루살렘의 멸망 이후, 그 슬픔과 처절함을 본 예레미야 선지자의 애가(哀歌)로, 전에는 영광스러웠고 번영했던 예루살렘이 죄로 인해 무너지고, 외로움과 수치 속에 처한 모습을 그려냈습니다.
이 말씀을 읽노라니 우크라이나가 생각났습니다. 2011년 우크라이나 목회자세미나 영상에서 봤듯이 우크라이나는 자유를 구가하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노란 스카프를 매고 함께 찬양하고, 함께 기도했던 우크라이나 목회자들은 성경 대신 총을 들고 전쟁터로 나가 싸우고, 그들 중에 상당수가 전사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또한 슬라바 목사가 이끌던 우크라이나의 최대 교회인 드네프로 예수중심교회는 이제는 노인들만 남아 교회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슬라바 목사까지 소천했으니 예레미야처럼 제 마음에도 눈물이 강을 이룹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감성에 빠져있을 때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우크라이나 사태를 거울삼아야 합니다. 전 세계가 지켜본 우크라이나 사태는 주님의 말씀이 얼마나 현실적인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정치적 갈등과 이념적 분열로 전쟁의 빌미를 제공했고, 결국 전쟁으로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고, 수백만의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 파괴되었습니다. 전쟁이 시작된 후에야 그들은 평화의 소중함을 말하고, 상처가 깊어진 뒤에야 하나됨을 이야기하는 모습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어리석음을 보는 듯해서 가슴이 저립니다.
여러분, 후회는 늘 일이 벌어진 다음에 찾아옵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 바로 그것 아닙니까? 소가 있을 때 소가 잘 있나 살피고, 소가 나가지 않게 외양간을 살펴야지,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면 뭐 하겠습니까?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마12:25).
이 말씀은 분열과 갈등의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지를 깨닫게 합니다. 예수님은 분쟁하는 나라는 무너지고, 분열된 공동체는 결코 지속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영적인 원리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와 역사의 본질을 꿰뚫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분열하면 100% 공멸합니다. 여네 야네, 진보네 보수네 하고 싸우면 이 나라가 어찌 서겠습니까. 우리가 서로 싸우면 윗동네가 신나서 ‘어서 더해라, 더해라.’ 합니다. 노사가 서로 싸우면 경쟁업체만 좋은 일 시키는 것인데, 왜 한배를 탄 사람들끼리 다투고, 왜 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끼리 대립하고, 한 가족끼리 대결합니까?
어부지리(漁父之利)라는 말 아시지요? 도요새와 조개가 서로 물고 싸우니까 지나가던 어부만 횡재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가정에서 부부가 서로 싸우면, 회사에서 노사가 싸우면, 정부와 국민이 대치하면, 국민끼리 싸우면, 교회에서 다툼이 일면 마귀와 귀신이 어부지리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싸우지 않은 겁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함께 거할 때, 그들의 소유가 많아지다 보니 아브라함의 가축을 기르는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롯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창13:8). ‘피붙이끼리 싸우지 말자, 싸워서 좋을 게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고,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리라”(창13:9)하며 싸움을 피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하나 되어야 할 때입니다. 하나 되면 못할 것이 없습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하는데, 그건 사공들끼리 하나가 되지 못해서 그런 겁니다. 하나만 되면 누구보다, 어떤 배보다 빨리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2장에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네 명의 친구를 보십시오. 넷이서 서로 협력하니까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일을 이뤄내지 않습니까? 네 명이 협력하고 협동하니 사람이 많은 중에도 지붕을 뚫는 기지를 발휘하여 예수님 앞에 친구를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초대교회가 외부의 핍박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은 내부적으로 하나 되었고, 말씀과 기도로 굳건히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4~47). 그들은 마음이 하나였고, 방향이 하나였기에 핍박 중에도 무너지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래야 합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4:12). 이는 숫자적 개념이 아니라 결속의 힘을 말씀한 것입니다. 얇은 종이 한 장은 그냥 찢어지지만, 그 종이를 겹겹이 쌓으면 총알도 막아낼 정도로 단단해진다고 합니다. 성경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전4:9). 한 사람보다 두 사람이 일하면 두 배가 아니라 열 배, 스무 배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이니, 우리가 하나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 되게 하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21~22).
그러나 마귀는 서로 다투게 하고, 갈라지게 합니다. 성경은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약3:14~16)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대립과 대결은 멸망이요, 불행만 초래할 뿐입니다. 바다에 사는 게는 물고 뜯는데 선수랍니다. 그래서 게를 두 마리 이상만 넣어 놓으면 거의 도망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서로 물고 뜯기 때문입니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5:15).
우리, 대결의 구도를 피하고 협력의 구도로 갑시다. 서로 연합하여 단단한 국가, 기업, 가정과 교회를 만듭시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맙시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133:1~3). 할렐루야!
대결은 멸망과 불행
협력은 성장과 행복
고래 싸움에
새우 등만 터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