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심을 버려라
테레사 수녀가 고아들에게 먹일 것을 얻으러 어느 빵 가게에 들어갔다. 테레사 수녀는 사연을 말하자 주인은 욕을 하면서 수녀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그러나 테레사 수녀는 얼굴에 묻은 침을 닦으며 다시 주인에게 사정했다. “저를 위해서는 침을 주셨으니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는 빵을 좀 주세요.” 이런 상황인데 아무리 표독한 자라도 어찌 빵을 주지 않겠는가. 그 주인은 얼굴을 붉히면서 테레사 수녀에게 빵을 주었고, 그것으로 하루 고아들의 식사를 해결하였다. 훗날 테레사 수녀는 그날의 일을 이렇게 추억했다. “내가 빵 가게에 간 것은 굶주린 아이들의 허기를 채울 빵을 얻기 위함이었지, 내 자존심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위 이야기를 들으니 우리가 잘 아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자식을 살릴 수만 있다면 자존심이 무슨 대수냐며 예수님께 매달렸던 위대한 여인 말이다.
대인(大人)에게는 필요하다면 자존심 따위는 내놓는 대범함이 있다. 한(漢)나라의 개국공신인 한신 장군이 어린 시절, 살고 싶으면 바짓가랑이 밑으로 기어가라는 동네 깡패의 말에 그대로 무릎을 꿇어 바짓가랑이 밑을 기어갔다. 살고 봐야 하니까.
가장 크신 이, 예수님을 보자.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런 분이 자존심을 버리고 오로지 인류구원이라는 목적을 위해 모든 수욕을 참고 견디셨다(히12:2).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고, 하늘과 땅과 땅 아래의 권세를 받으셨다.
목적이 있으면 자존심을 버렸다고 자괴감까지 들지 않는다. 자존심을 버리는 것도 목적을 이루는 한 수단이니까.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하던 길에 블레셋 성읍 중의 하나인 가드로 피난하여 그곳의 왕인 아기스를 찾았는데,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을 알아보고는 왕에게 고했다. 상황을 파악한 다윗은 살기 위해 그들 앞에서 침을 흘리며 대문짝을 흔들고 갖은 미친 짓을 다 했다. 나도 교단의 주의 종들이 잘못했을 때 대신 가서 무릎을 꿇고 사과한다. 교단을 살려야 하니까.
목적을 이루려면 자존심을 버려라. 자존심이 밥 먹여주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