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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지중에라도 하나님을 업신여기지 말라

1289호 · 2025-01-19

부지중에라도 하나님을 업신여기지 말라

(2025. 1. 12 이시대 목사 설교)

총회장 목사님이 “나도 알고 하나님도 아는 죄는 회개하면 된다. 그런데 나는 모르고 하나님만 아는 죄가 있다. 내가 죄를 지은 줄 모르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으니 그게 문제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내가 모르고 하나님만 아는 죄, 그것이 ‘부지중에 저지르는 죄’입니다. 죄가 죄인지 모르니 당연히 회개하지 않죠. 그러니 문제가 큰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일부러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즉 부지중에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느 경우냐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일이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일입니다. ‘그게 그렇다고?’ 하며 화들짝 놀라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네, 그렇습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제가 누군가에게 뭔가를 지시했는데, 그 사람이 그걸 실행하지 않았다고 합시다. 그럼 그 사람이 저를 무시한 것 맞지요?

사무엘하 10장에 보면 다윗은 자신이 암몬 왕 나하스에게 받은 은총을 생각하여 나하스가 죽자 애도를 표하기 위해 조문사절단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인 하눈의 신하들은 이것을 호의가 아니라 정치적 계략이라고 보고했고, 하눈은 다윗의 사절단을 철저하게 능욕했습니다. 이 소식에 다윗은 분노하였습니다. 조문사절단을 보낸 다윗을 멸시한 처사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고, 암몬의 패배로 끝났습니다.

법궤가 들어올 때 기뻐 춤을 추다가 몸이 드러난 것을 본 미갈이 다윗을 업신여기자 다윗이 평생 미갈 처소에 들지 않아 자식이 없었습니다(삼하6:23).

사람을 멸시해도 이런 보복을 당하는 겁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멸시하면 어찌 될까요?

사무엘하 12장에 보면 다윗이 밧세바를 취하기 위해 치밀하게 작전을 짜서 그의 남편인 우리아를 죽입니다. 그러나 눈을 만드신 하나님이 이를 어찌 안 보셨겠습니까. 다윗에게 선지자 나단을 보내는데 나단의 말이 이랬습니다.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삼하12:9). 10절에는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업신여기지 않았습니다. 다만 욕망에 사로잡혀 저지른 죄이건만 하나님은 ‘간음하지 말라’는 당신의 계명을 어긴 다윗에게 업신여김을 당했다고 말씀하시고,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대가를 지불케 하셨습니다.

사무엘하 6장에는 하나님의 궤를 다윗성으로 옮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실어 옮겼습니다. 분명 2절에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궤는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어 옮기도록 하나님이 지시하셨는데, 막상 옮길 때 어깨에 메지 않고 새 수레에 실은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거지요. 그러니 갑자기 수레를 끌던 소가 뛰고, 하나님의 궤가 흔들리니 웃사가 그것을 잡다가 죽고…, 하나님의 징계가 따른 것입니다.

다윗이 이를 보고 다윗성으로 하나님의 궤 옮기기를 두려워하여 오벧에돔의 집으로 어깨에 메어갔습니다. 하나님의 법대로 하니 오벧에돔의 집이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14:21~24)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백세에 얻은 아들을 제물로 드리라는 하나님 말씀에 바로 순종한 것은 그의 마음에 늘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장에 애굽왕이 산파들에게 히브리 여인들이 아들을 낳거든 죽이라고 했지만, 그들은 그 명령을 어기고 살렸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애굽왕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출1:17) 그리한 것입니다. 21절에는 그 두려운 것이 ‘경외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넘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부지중에라도 하나님을 업신여기지 않으려면 늘 마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김창옥 장로님이 과로로 인해 중환자실에 입원 중이십니다. 저도 한 번은 뵙고 싶어서 가족의 양해를 얻어 중환자실에 가서 뵈었는데, 때마침 인공호흡 관을 제거하게 되었습니다. 자가호흡이 가능하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인공호흡 관을 뗀 김창옥 장로님의 첫 마디가 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였습니다. 그분의 마음속에 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간신히 입을 연 순간 그 말부터 나온 겁니다. 그런데 기쁜 소식을 중환자실 밖에 있던 장로님의 아내분에게 전했더니 갑자기 전화기를 꺼내 전화를 하시는 겁니다. 저는 자녀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나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목사님, 김창옥 장로가 깨어났어요.” 하는 것 아닙니까. 늘 총회장 목사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으니까 먼저 알려드리고픈 마음이 든 것입니다.

마음에 있는 것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거지요. 그래서 마음에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엘리사가 물의 근원에 소금을 던져 물을 고친 것처럼, 우리 마음을 고쳐야 죽음이나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짐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22:4)고 하셨으니까요.

전대미문의 복을 받기 원하십니까? 전대미문의 기적을 원하십니까? 부지중에라도 하나님을 업신여기지 맙시다. 늘 그분을 존귀히 여기는 마음을 지니고 삽시다. 하나님은 그런 자에게 넘치도록 축복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말3:16~18).

함께 기도하여 서울성전을 지읍시다

성도들은 우리 총회장 목사님 은혜를 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열 문둥병자를 조건 없이 고쳐주셨는데, 그중에 아홉은 어디로 가고 오직 한 명만 예수님께 찾아와 사례하였습니다.

시편 49편 20절에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했습니다. 돼지, 소를 왜 키웁니까? 잔칫날 잡으려고 키웁니다. 에스더를 왜 왕후로 세웠습니까? 유다 민족이 멸절되게 생겼을 때 살리기 위해 세웠습니다. 우리에게 왜 은혜를 주셨습니까? 우리에게 왜 성령을 주셨습니까? 필요할 때 쓰시려고 주신 것입니다. 바로 지금이 우리가 필요할 때입니다.

나라는 위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는 망하지 않습니다. 왜냐고요? 우리 예수중심교단의 성도들이 이처럼 깨어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의인 한 사람만 있어도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하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 교단이 있는 한 우리나라는 안전합니다.

멕시코 정부가 미국 정부에게 ‘당신 나라 국민이 우리나라에 와서 아주 큰 범죄를 저질렀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사형시킬 수밖에 없다’고 통보했습니다. 미국 정부에서 ‘안 된다’고 하자 멕시코 정부에서는 ‘어쩔 수 없다’고 했습니다. 미국 측에서

‘그러면 하루만 시간을 달라. 사형을 하루만 연기해달라’고 하고는 미국 정부에서 파견된 사람이 멕시코로 넘어가 그 사형수 몸에 미국 국기를 덮었습니다. 그리고는 ‘죽이려면 죽여라’ 했습니다. 멕시코 정부는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그를 죽이는 것은 미국을 죽이는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끌어내 자유를 주셨고, 광야생활 40년 동안 먹고 마시는데 부족함이 없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광야생활 40년을 마치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우리 예수중심교단은 체육관을 전전하며 40년을 지냈습니다. 2025년, 우리에게도 성전을 건축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총회장 목사님께서 노량진교육관에서 기도의 불을 붙여주신 것입니다. 창세기 21장 19절에 보면 하갈이 쫓겨나간 광야에서 물이 떨어졌을 때 방성대곡하고 울었더니 하나님께서 하갈의 눈을 여시고 샘을 발견하게 하셨습니다. 노량진교육관에서 새벽과 저녁에 총회장 목사님과 우리 성도들이 방성대곡하고 울 때 하나님께서 하갈의 눈을 열어 샘을 발견한 것처럼, 성전 터를 보게 우리들의 눈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우리 함께 기도 모임에 동참합시다. 불평하지 말고, 오직 순종하여 대업을 이뤄봅시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가장 아름다운 서울성전부지를 보게 하시고, 얻게 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평택예수중심교회 박종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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