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직 ‘예’뿐이었다(고후1:18~20)
목회 40년을 돌아보며 여러분 앞에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저는 주님의 말씀에 ‘No’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직 ‘Yes’만 했습니다. ‘가라’ 하시면 이유 불문하고 갔고, ‘가지 말라’ 하시면 안 갔습니다. ‘하라’ 하시면 하고, ‘하지 말라’ 하시면 안 했습니다. 잘 달린다고 명마겠습니까? 잘 짓는다고 명견이겠습니까? 일만 잘한다고 참 종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주인이
‘가라’ 할 때 가는 말이 명마요, 주인이 짖으라고 할 때 짖는 개가 명견이요, 주인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종이 참 종입니다.
1991년, 서울교회 창립을 앞두고 기도할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방언을 통해 생소한 올림픽공원에 입성을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타이밍도 절묘하지요, 바로 그때 어떤 분이 제가 서울교회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현금 300억을 들고 찾아와 교회를 지으라고 했습니다. 당시로는 교회를 짓고도 남을 큰돈이었습니다. 올림픽공원으로 갈 것이냐, 300억 원으로 교회를 지을 것이냐? 선택은 오롯이 제 몫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일절 망설임 없이 하나님 말씀대로 올림픽공원으로 들어갔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Yes’ 했습니다. 지금까지 교회가 없는데 당시의 일을 후회하지 않느냐고요? 절대 후회하지 않습니다. 다시 똑같은 상황이 닥쳐도 저는 하나님 말씀에 당연히 ‘Yes’할 것입니다.
또한, 일본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제게 떨어졌습니다. 솔직히 저는 일본에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36년 동안 억압한 일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싫었습니다. 마치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이 마땅치 않았던 것처럼 저 역시 그랬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이 어떻든 하나님 명령은 떨어졌고, 저는 ‘아니요’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에 복음을 전했고, 지금 일본에 많은 지교회를 두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은 우리의 신앙자세가 어떠해야 함을 잘 말하고 있습니다. 당초 바울의 계획은 에베소에서 마게도냐를 거쳐 고린도를 방문한 뒤 마게도냐에 돌아왔다가 다시 고린도를 방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에 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16장 6~10절에 자세히 쓰였듯이 성령께서 마게도냐로 먼저 가라고 지시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계획을 접고 ‘예’하고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행위를 비판하고, 우유부단하다고 하는 적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바울이 한 말이 이것입니다.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1:19~20).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하나님 말씀에 무조건 ‘예’, ‘아멘’ 해야 합니다. 토도 달면 안 됩니다. ‘아멘’이 뭡니까? ‘옳습니다’,
‘그렇게 되길 원합니다’, ‘따르겠습니다’,
‘순종하겠습니다’라는 의미가 아닙니까?
예수님과 어머니 마리아가 가나 혼인잔치에 가셨습니다. 아마도 친척뻘 되는 집인 듯합니다. 그런데 잔치가 무르익을 무렵, 그만 포도주가 동나고 말았습니다.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다급해진 마리아는 예수님께 이 사실을 알렸고, 그 집 하인에게는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따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6개의 돌항아리에 물을 아귀까지 채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인들은 영문을 몰랐지만, 분부한 대로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물을 연회장에 내다주라고 하셨습니다. 이쯤 되면 하인들의 머릿속도 복잡했을 겁니다. ‘술 대신 물을 내가라고?’ 그러나 하인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물을 떠서 연회장으로 갖다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이전 포도주보다 더 좋은 포도주로 말입니다.
우리 신앙이 이 하인들과 같아야 합니다. 물을 연회장에 떠다주라고 하면 떠다주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그 뒷일은 명령하신 자가 책임지실 것이니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그곳에 영광을 나타내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75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명령에 질문도 하지 않았고, 망설임도 없이 ‘Yes’ 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11:8). 또한 아브라함은 100세에 얻은 귀한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했을 때도 마음에 갈등 없이 ‘Yes’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에게 복의 근원의 축복을 내리셨고, 하늘의 뭇별과 같은 자손의 축복을 주셨으며, 영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창22:18)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이사야서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8~9)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땅이 하늘을 어찌 이해하겠습니까? 우리 성도들도 저를 이해 못하는데, 자식이 부모 생각을 이해 못하는데 피조물이 창조주를 어찌 이해하겠습니까? 그저 ‘Yes’ 할 뿐입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자입니다. 바다나 고기잡이에 관해서 그는 한마디로 베테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베드로의 배에 오르셔서 그에게 이르시기를,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하셨습니다. 그때 시몬 곧 베드로가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눅5:5)라고 했습니다. 이해는 안 되지만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예비해놓으신,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베드로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만들라고 명하신 방주는 엄청난 규모의 배였습니다. 노아는 방주가 왜 필요한지, 어떻게 쓸 것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흔들림 없이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예’하고 준행했습이다(창6:9~22). 그래서 노아를 비롯한 가족들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말씀에 왜 쉽사리 ‘Yes’가 잘 안될까요? 그것은 내 자아가 살아있어서 그런 겁니다. 사울이 그랬습니다. 자기 나름의 생각이 있었고, 여전히 내가 살아있다 보니 구구절절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며 ‘No’를 외쳤던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의 징조는 예수님의 말씀에 토를 달면서부터 아닙니까. 하나님 앞에 ‘No’를 외치는 자의 최후는 사울처럼, 가룟 유다처럼 비극으로 끝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10:4~5). 내 생각, 알량한 내 지식을 버리고 오직 예수께 붙잡혀야
‘아멘’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2:20)고 덧붙인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에 ‘아멘’으로 대답하셨고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과 땅 아래의 모든 권세를 부여받으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사도 바울과 많은 믿음의 선친들처럼 오직 ‘예’, ‘아멘’하는 삶을 삽시다. 그것이 참 신앙입니다.
‘기도해라.’ ‘예!’, ‘봉사해라.’ ‘예!’, ‘전도해라.’ ‘예!’, ‘용서해라.’ ‘예!’, ‘사랑해라.’
‘예!’, ‘기뻐해라.’ ‘예!’, ‘감사해라.’ ‘예!’ 그러면 하나님이 ‘예!’하는 자에게 신명기 28장의 복을 꼭 안기실 것이고, 전대미문(前代未聞)의 기적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 도와달라기 전에
먼저 하나님 편에 서라
‘아멘’ 하는 자는
기적의 영광을 맛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