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 자녀는 망하지 않는다
기도하는 자녀는 망하지 않는다
우리 집은 아침 식사 때 총회장 목사님의 20분 설교를 듣고 나서 예배를 드리고 등교한다.
어느 날, 대화 중에 “하나님이 좋은 길로 인도하실 거야.” 했더니, 아이가 “엄마, ‘하실 거야’가 아니라 ‘하신다!’, 목사님이 설교 때 믿음으로 확신 있게 말하라셨어요!”한다. 아이들이 어른 예배 설교를 알아들을까 하는 우려와는 달리,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말씀을 깨닫게 한 것이다.
어느 권사님이 꿈에 내게 오셔서 자녀의 소속부서를 상의해오셨다. 권사님은 공부보다 자녀의 영혼과 신앙에 대해 깊이 고민하시고 기도하시는 분이었다. 자녀의 기도 제목을 놓고 함께 기도하게 되었는데, 계속 가정예배 감동을 주신다. 감사하게도 그 권사님 또한 기도 가운데 동일한 감동을 받으셔서 자녀와 가정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셨고, 생각했던 것보다 아이가 너무 좋아하며 예배를 사모하더라고 기뻐하셨다. 아이가 어른들 눈에는 걱정스러운 부분도 다소 있다지만, 크게 걱정되지 않는 이유는 그 아이의 신앙관 때문이다. 부서예배와 주일예배만큼은 철저히 드리려 힘쓰고, 아직 믿지 않는 아빠께도 예수 믿어야 천국 간다고, 교회 가야 한다고 담대히 말한다는 것이다. 학원 수강생이 모두 함께 즐기는 할로윈 파티도 누가 말하지 않아도 분명한 태도로 끊어내서 학원 선생님도 이 아이는 예수님을 믿으니 어련히 그런 줄 안다는 것이다. 제사 음식인 왕의 진미를 거절하고 물과 채식만을 택한 다니엘과 같았다. 알고 보니 권사님은 신앙 때문에 핍박을 받으시면서도 갓 태어난 그 자녀를 성전에 데리고 다니며 눈물의 철야기도를 하셨고 지금까지 기도생활을 이어온 것이다.
성경은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잠22:6)고 말씀하신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고 그 말씀을 지켜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신28:1).
하나님 말씀에 의지하여 인내하며 기도하는 모든 부모님들과 그 자녀들, 그 가정에 때가 차매 마침내 교회와 세상 곳곳에서 일어나 빛을 발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깃발이 휘날릴 것을 기대한다. 기도하는 사람의 자녀는 망하지 않는다.
이국진 사모
joyful_jina@hanmail.net
1+1 은총
내가 자주 들르는 편의점에서 항상 구입하는 1+1 제품이 있다. 하나 값으로 두 배로 즐길 수 있으니 정말 행복한 일이다. 하나를 더 공짜로 얻는 기분이기 때문이리라. 1+1 제품은 두 제품을 하나로 단단히 결속해 놓았기에 뜯을 수도 없이 그저 받아들여야 한다. 소비자는 값없이 하나를 더 얻었겠지만, 생산자는 분명 그 해당 값을 지불하여 만든 거다. 그리고 소비자에게 하나를 더 공짜로 누리라고 선물한 것과 같다. 그런데 소비자가 그 공짜에 대한 값을 지불하려 할 때, 생산자의 호의가 얼마나 무의미해지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은, 예수 믿는 첫 순간부터 우리가 아무런 값을 지불하지도 않았으며, 후에 다 갚을 수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죄인인 우리를 의인이라고 취급해주시는 시작에서부터, 거기에 더해 끝까지 책임지시는 일방적인 호의요 은혜다. 죄인에 대한 완벽한 변호로 무죄판결 받게 한 그 변호사가, 석방된 죄인을 죽을 때까지 책임지는 격이다. 바로 1+1의 은총이다. 도저히 끊어낼 수 없는 불변의 결속이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셨기에,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민감해지는 거다. 일단 예수 믿고 나서부터는, 내 노력으로 그 값을 완불하려는 것은 진짜 구원이 아니다.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선행을 낳게 하는 구원이, 진짜 구원이다.
바리새인들은 끝없는 율법준수와 선행의 요구를 했지만, 자신들조차 그 양을 채우지도 못하면서 남들에게 부담감만 부과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선행의 양이 아니라 방향성이다. 선행의 양이라면, 십자가 우편의 강도는 한 것이 없다. 바로, 은혜만 바라보는 상한 심령이다. 믿음을 가지는 것도,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시작된다.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이기에, 은혜 없이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된다. 보석 반지를 보라! 반지가 그 보석을 견고하게 꽉 쥐고 있듯이, 참된 믿음은 그리스도를 떠나지 않고 단단히 붙잡고 있다. 성경은 근본적으로 모순이 없다. 성경을 오해하는 인간 사고의 병일 뿐이다.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말씀과 행해야 구원받는다는 말씀은? 분리된 주제가 아니라, 택함을 받은 자가 누려야 할 1+1으로 결속된 은총인 것이다.
송직화 목사
감옥에 갇힌 가족을 위한 기도
성도 한 분이 음주운전으로 재판을 받아 철창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까워 그의 어머니와 함께 울었다. 이전의 음주운전 전력으로 집행유예 5년을 받았지만, 다시 술 먹으며 정신 못 차리는 모습을 보면서도 제발 무죄나 다시 집행유예가 나오게 끝까지 기도했건만 재판장의 용서도 거기까지였던 것이다.
낙심한 그의 어머니에게 조언을 드렸다. “재판 전에는 무죄나 다시 집행유예 판결을 위해 기도했지만, 판결 후에는 무조건 감사해야 출소 후 더 멋진 인생이 기다립니다. 음주운전은 살인과 같은 것인데 다행히 아무도 다치지 않아 형량이 작게 나왔으니 이 또한 감사할 일 아닙니까? 감옥 갔다 와서 인생에 붉은 줄 생기면 큰일인데 생각할 수 있지만, 아닙니다. 그와 상관없는 영업직이나 사업할 일과 주님이 주실 축복은 너무나 많고, 결혼도 붉은 줄도 뛰어넘는 사랑하는 배필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으로 같이 기도합시다.”
우리는 옥에 갇힌 가족 때문에 슬퍼하며 출소 후의 삶을 걱정만 할 것이 아니라 옥에서 귀인을 만나고, 깨닫고 나오면 더 큰 축복을 주님께서 준비하고 계신다고 믿음으로 선포하고 기도해야 한다. 육신의 감옥에서 요셉은 귀인을 만나 총리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창39:20~41:44).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찬양할 때 옥문이 열리고 나올 수 있었다(행16:19~26). 감옥 밖에서 정신 차리지 못하고 죄짓다가 지옥 가는 것보다 낫고, 감옥 안에서 회개하고 사도 요한처럼 기도하며 계시록을 쓰는 역사가 일어날지 누가 알겠는가?
현실의 상황을 보고 좌절만 할 것이 아니라 나보다 더 힘든 자들을 돌아보며 감사의 이유를 찾아 절대 감사를 해야 나도 살고 옥에 있는 가족도 살게 된다.
교도소만 감옥이 아니라 정신병원도 감옥과 같다. 감옥 같은 침상에 누워있는 환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의 사명은 병든 자들을 위해, 옥에 있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돌보는 것이고,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마태복음 25장의 착하고 충성된 종인 것이다. 시간을 내서 성도들의 재판장, 교도소 면회, 병원 심방을 더 부지런히 다녀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다. 내가 같이 가지 못하면 영치금이라도, 믿음의 편지라도 보내 심방하고, 또 다른 선교지인 감옥에 내가 가든지 보내든지 하여 그들이 출소 후 교회에 나와 다른 부흥을 만들도록 기도해야 한다.
재판을 지켜보며 우리도 재판장이신 주님 앞에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어두운 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고 있으리라’ 판단 받을 텐데,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기도하며 뒤돌아보게 됐다.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면 지옥 가야 할 죄인이지만 육체가 있을 때까지는 회개할 기회가 있기에 우리에게 집행이 유예되고 있다.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더 이상 자비와 은혜가 아닌 행위에 의한 심판과 형벌이 기다리고 있으니 우리는 얼마나 깨어서 기도하며 신앙생활을 점검해야겠는가?
구원의 조건은 없다. 온전한 예수님의 은혜요. 믿음이다(롬1:17). 하지만 마태복음 25장은 영생과 영벌의 조건을 기록하고 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
우리 모두 믿음으로 구원받고, 감옥에 갇힌 자, 병든 자 같은 소자들을 돌보며 영생의 축복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길 예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최연식 목사
권면의 조건
나에게 오는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면, 유명한 사람의 명언, 각종 정보, 권유 등 다양한 내용이 들어온다. 대부분 좋은 말이고 유익한 정보지만, 보내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정독하기도 하고 대충 읽기도 하며, 어떤 메시지는 아예 읽지 않고 바로 지우기도 한다. 같은 내용이라도 보내는 사람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재산이 별로 없는 사람이 나에게 투자를 조언한다면, ‘본인 재산이나 잘 관리하지.’라는 생각과 함께 그 조언을 무시할 것이다. 반면에, 투자에 성공해서 많은 부를 축적한 사람의 조언이라면 그 글을 정독하는 것은 물론이고 감사한 마음에 선물까지 하고 싶은 생각이 들 것이다.
이시대 목사님이 설교 중에, “권면은 상대방이 자격을 부여한 사람의 말일 때 효과가 있다. 부모라도 자녀에게 존중과 신뢰를 받을 때 말에 권위가 생기고, 자녀가 조언을 받아들인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조언과 권면에도 조건이 있다. 내가 어떤 일에 대해 조언할 만큼 전문 지식이 있는지, 상대방이 나를 인정하고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봐야 한다. 요즘 나는 타인은 물론이고 자녀들에게도 충고나 조언을 하기 전에 내가 조언할 만한 사람인지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된다.
아이들이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신발장부터 방까지 긴 줄이 생긴다. 신발은 뒤집혀있고, 책가방, 겉옷, 양말 등을 벗으면서 방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한마디 하려다, 퇴근하고 거실 소파에 앉아 양말을 벗어던졌던 내 모습이 생각나서 아이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지 못하고 남에게 이런저런 충고를 했던 모습이 떠오르며 매우 부끄러웠다. 자녀들에게는 물론이고 세상에서도 조언받을 만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며 정진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눅6:42).
송명국 집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