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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가 있으면 변한다

1245호 · 2024-03-17
책을 펴다

목표가 있으면 변한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초나라 장왕은 처음 왕위에 올라 나랏일은 돌아보지 않고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세월을 보냈다. 충신들은 나라의 앞날이 캄캄하여 진언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그러기를 3년, 한 신하가 죽기를 각오하고 장왕 앞에 나가 간했다.

“전하, 큰 배에 선장이 갑자기 죽어 부선장이 선장이 되었습니다. 부선장은 기뻐 매일 잔치만 벌였습니다. 워낙 큰 배라 현재는 별 탈 없지만, 조만간 암초 많은 바다에 이르게 될 터이니 이 어찌 위태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제 집 뒤 숲속에 크고 멋진 새 한 마리가 있는데, 이놈이 3년 동안이나 날지도 아니하고 노래도 아니합니다. 이 새를 어찌할까요?”

장왕이 이 소리가 무엇을 말하는지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장왕이 이르기를

“그대 집 뒤 숲속의 새가 3년이나 날지도 않고 노래하지 않은 것은 더 높이 날고 더 아름답게 노래하기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 같소. 그대는 이제 곧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듣게 될 것이요.”라고 답했다. 이날 이후, 장왕에게는 초나라라는 큰 배의 키를 잡아야겠다는 목표가 생겼고, 목표가 생기자 장왕은 변하기 시작하여 천하를 굽어보는 대붕(大鵬)이 되었다.

누가복음 13장에 어느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는데, 3년이 지나도록 열매가 없어 찍어버리려고 하자 과원지기가 이에 깨닫고 두루 파고 거름을 주어 꼭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다고 했다. 분명히 열매를 맺었을 거라 생각한다.

목표를 정하라. 그러면 너의 삶이 달라지고, 미래가 달라질 것이다.

이초석 목사 저서 ‘사랑이 무르익어야

결혼에 골인한다’ 중에서

한국 교회사

한국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 로버트 토마스 목사

한국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 로버트 토마스 목사, 개신교 성직자로서는 처음으로 한반도에서 순교의 피를 흘린 선교사다. 한국 이름은 최난헌이다.

토마스 목사는 박해를 피해 산동성으로 피난 온 조선 천주교인을 만나 조선의 사정을 듣게 되었고, 조선에 대한 선교의 뜻을 품게 되었다.

1865년 가을에 황해도 연안에 도착한 토머스는 한문 성경을 나누어주며 선교도 하고 천주교 신자들도 만나 한국어도 열심히 배웠다. 그의 관심은 온통 조선 선교에 있었다고 한다.

토마스 목사는 때마침 미국 상선인 제너럴셔먼호가 무역을 위해 한국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1866년 8월, 그는 이 배의 통역 겸 안내자로 동승하여 선교의 열정을 불태우던 한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약 일주일 후 제너럴셔먼호는 대동강 입구 용강군에 당도하였다. 제너럴셔먼호는 계속 강 상류로 거슬러 평양성으로 항진하였다. 배가 머물자, 평양 감영의 문정관이 등선하여 목적지, 항해의 목적 등을 묻자 토마스 목사는 서툰 우리말로 통역을 하였다. 문정관들은 우리나라는 외국과의 무역은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으므로 퇴각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제너럴셔먼호는 이를 무시하고 강 깊이 항진을 계속하였다.

그런데 제너럴셔먼호는 무역선답지 않게 중무장을 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문정관 중군 이현익을 억류하고 강압적인 자세를 보였다. 이렇게 되자 강변의 병졸들과 성민들이 물러가라고 고함을 치면서, 돌을 던지고 활과 화승포를 쏘기 시작하였다. 위협을 느낀 제너럴셔먼호에서도 소총과 대포로 응사를 시작하였다.

이런 와중에 홍수로 불었던 대동강 물이 줄어들고, 서해의 썰물 때가 되자 강물이 급격히 줄어 제너럴셔먼호는 강바닥에 좌초하고 말았다. 평양감사 박규수의 명에 따라 군은 상류에서 작은 배 여러 척을 연결하고 그 위에 나무를 쌓아 불을 붙인 신탄선을 떠내려 보냈다. 이 신탄선이 제너럴셔먼호 닿자 배가 불타기 시작하였다.

불이 크게 번지자 선원들은 어쩔 수 없이 강으로 뛰어내려 강변으로 헤엄쳐 나왔다. 대기하고 있던 병졸들이 뭍에 오르는 선원들을 닥치는 대로 칼로 쳐 죽였다. 토마스 목사도 더 이상 배에 있을 수 없어, 성경 몇 권을 품고 강으로 뛰어내려 헤엄쳐 나왔다.

강변에 이른 토마스 목사를 박춘권이 칼로 죽였다. 그 시체는 토막 내 강변에서 불태워졌다. 이로써 토마스 목사는 한국 초기 선교 역사에서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개신교 성직자 순교자가 되었다.

토마스 목사는 품고 온 성경을 강변 여기저기에 뿌렸다. 자기를 죽이려는 박춘권에게도 한 권을 주었으나 받지 않자 그대로 모래사장에 던지고, 순교의 길에 들어섰다. 박춘권은 자기 칼을 맞고 죽어가는 서양 사람이 건네주는 책을 받지 않았으나 상황이 끝나고 돌아갈 때, 하나를 주워 집으로 가져갔다. 갖고 간 성경을 정독한 그는 후에 예수를 영접하고 독실한 신자가 되어, 안주교회 영수(장로)가 되었다.

이때 군중 속에 열두 살 난 소년, 최치량(장로)이 있었다. 그는 토마스 목사가 뿌린 성경 세 권을 주워 갖고 있다가 한 권을 박영식에게 주었다. 박영식은 그 성경을 한 장씩 뜯어 벽지로 발라 썼다. 후에 박영식의 집터에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이 세워졌다(장대현교회).

토마스 목사는 개신교 목사로서 조선 땅에 최초로 순교의 피를 흘리고 죽어갔는데, 이때가 1866년 9월 2일로 그의 나이 27세였다.

그는 이렇게 숨져 갔지만, 그가 전해준 복음은 한국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그가 순교한 대동강 물을 마신 평양 성민 다수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

평양은 한국교회의 중심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해방 때까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가 흘린 순교의 피가 한국교회 복음의 씨앗이 되어 교회의 부흥과 전 세계 선교의 헌신의 제물이 되었다.

김종춘 목사

소망의 언덕

“그때 그 마음 여전하니?”

작년 어버이날 부모님 댁에 갔을 때 일입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부모님께 얼마 되지 않는 용돈과 편지를 챙겨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어머니께서는 잠시만 기다려보라면서 안방에 들어갔다 나오셨습니다.

그러고서는 흰 봉투 하나를 제게 내미셨습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흰색 편지봉투 겉에는 ‘당직비’라고 적혀있었고, 그 안에는 빳빳한 1,000원짜리 구권 네 장, 4,000원이 들어있었습니다.

“네가 신학교에 입학하고 첫 당직비라며 가져왔던 돈이란다. 이 귀한 걸 엄마가 어떻게 쓸 수 있겠니? 잘 넣어뒀다가 이제 네게 돌려줄 때가 된 것 같아서 돌려준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는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소재했던 전도단 본부 건물에서 신학교도 함께 운영하였습니다. 그 당시 남자 신학생들은 돌아가면서 당직 근무를 섰습니다. 교회 본부 직원들이 퇴근할 때부터 다음 날 출근할 때까지의 임무를 마치고 나면 당직비로 4,000원이 지급되었습니다. 지금처럼 계좌이체가 아니라 매번 흰 봉투에 깨끗한 돈으로 챙겨주셨습니다. 그때 당시 4,000원이면 십일조를 제하고도 라면에 주먹밥까지 배불리 한 끼 식사를 하거나 밤을 지새우며 찌뿌둥해진 몸을 풀어줄 사우나에 갈 수 있는 돈이었기에 물질의 훈련을 받는 생도들에게는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신학교 1학년 때 첫 당직비를 받고서 ‘첫열매’로 헌금하고, 두 번째 받았던 당직비를 어머니께 가져다드린 기억이 났습니다. 22년 전에 드렸던 그 봉투를 지금까지 ‘언급’조차 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가지고 계셨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어머니께서 왜 그 봉투를 그대로 간직하셨는지, 그리고 그날 돌려주셨는지 그 깊은 속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었지만 마치 제게 이렇게 묻고 계신 것만 같았습니다.

“아들아~, 그때 그 마음 여전하니? 처음 주의 종의 길을 가겠다고 마음먹었을 때처럼 여전히 하나님만 사랑하니?”

아무것도 모르고 신학교에 입학했던 제가 어느덧 20여 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흘러 목사안수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혹시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적으로 나태해지거나 마음을 빼앗겨 경건의 모양만 남아있는 삯꾼 목자가 되지는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으로 부드럽고도 엄한 사랑의 채찍질을 해주셨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머니께서 20년이 넘도록 보관하셨다가 돌려주신 그 당직비 4,000원 덕분에 저의 신앙을 다시 돌이켜보니 회개가 절로 터져 나왔습니다.

“남들이 뭐라 해도 좋아/ 내 모습 이대로 주님 사랑하여 주시니…/ 내 귀한 것 잃어도 좋아/ 가장 귀한 분 오직 주님뿐이야~”

그때 당시 한 복음성가의 가사처럼, 주님께 모든 것을 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늘 제 중심에 있었습니다. 정말 모든 면에 부족했지만 늘 진실하려고 애썼었습니다.

그런데 정직하게 들여다본 제 마음에는 찬양 가사와는 정반대로 그만 ‘귀한 것’을 잃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어느새 싹터있었습니다. 젊은 날부터 ‘헌신’할 수 있었던 특권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보상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다른 말로 포장하려 해도 나의 모든 생각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저 자신을 속일 수 없었습니다. 저 자신도 정직하게 용기를 갖고 제 마음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기 전에는 제가 ‘여전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제 마음 깊은 곳까지 비춰보니 변질된 곳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습니다.

그날 저녁 기도회에서 저는 하나님께 회개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 하나님은 이번에도 따뜻하게 제 회개를 받아주셨고 다시 한번 첫사랑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그때 그 마음 여전하십니까?”

이현승 목사

진리에 이르는 지식

루터의 종교 개혁(1)

면죄부는 현세의 죄로 인한 벌의 일부 또는 천주교 신부에 의한 사면이 요구되는 고해성사에서 돈을 주어 죄의 무게를 경감시키는 것을 말한다. 면죄부는 교황의 권위로 인정되었으며 신임장을 가진 대행자에 의해서 집행되었다.

중세기를 통하여 교황청의 재정난이 점점 더 악화되고 면죄부 판매가 너무 잦을 때 루터는‘진실을 밝힐 목적으로 ’95개 논제를 작성하여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의 모든 성인들의 교회 문에 게시하였다. 교황은 루터에게 로마 출두를 요구하는 소환장을 아우크스부르크에 있던 카예타누스 추기경에게 보냈다.

심문에 응한 루터는 면죄부에 대한 토론을 하게 되었다. 루터는 공로 없이 주시는 은사와 오직 믿음으로 얻는 의를 주장했다. 루터는 교황청의 면죄부와 잘못된 교리에 항변하였고, 교황청은 루터의 주장을 꺾을 목적으로 로마로 압송할 계략을 꾸미게 되었다. 그러할 때 작센의 참정관들은 루터에게 그가 쇠사슬에 묶여 로마로 압송될 것이라는 소문을 전해주었다. 결국 루터는 친구들의 강권에 못 이겨 성채 뒷문을 통해 아우크스부르크를 탈출했다.

루터는 단순히 성경 말씀을 마음에 품고 신앙은 성경대로 믿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반인이 읽지 못했던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해 누구나 읽도록 했으며 찬송곡도 일반인에게 보급했다. 루터의 주장은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어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2:38)라는 성경이었다. 교황청은 교인들이 성경을 읽지 못하게 했으나 루터는 교인들에게 성경을 읽게 했다. 천주교는 신부들만 성경을 읽을 수 있었고, 교인들은 성경을 읽지 못하도록 했었다. 교인들이 성경을 읽지 못하므로 신부들이 가르치는 것이 교리가 되었고 법이 되었다. 그래서 면죄부를 사야만 죄가 경감되는 줄 알았던 것이다. 이렇게 잘못이 계속되는 것을 보고 루터는 95개 논제를 작성하여 1517년 10월 31일 모든 성인 교회에 게시하게 되었다. 루터에 의하여 종교개혁이 시작된 것이다.

이승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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