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과 저주가 내 입에 있다(시23:1~6)
저는 결혼식장에서 이런 비유를 잘합니다. “가장 지혜로운 자가 누군지 아십니까? 만든 자의 말을 듣는 자입니다. 전자회사에서 제품을 110V에 꽂으라면 110V에 꽂아야 합니다. 굳이 자기가 220V에 꽂아놓고서는 고장이라고 회사를 탓하는 자가 있는데, 그는 참 어리석은 자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자를 향하여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
(잠19:3)고 탄식하십니다. 만드신 자의 말을 듣는 것이 지혜요, 고장나지 않고 사는 길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면 공경해야 하고, 남편에게 순종하라 했으니 순종하면 됩니다. 아내를 사랑하라 하셨으니 사랑하면 됩니다.”
그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곧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하여 만족하게 되느니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잠18:20~21). 생사화복(生死禍福)이 말로 인해 결정된다, 말로 인생이 변화된다 는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23:1~6).
이는 다윗의 시입니다. 글을 보면 상황이 아주 좋을 때 쓴 것 같지만, 실상은 말 그대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쓴 시입니다. 그는 ‘비록 지금 사망의 골짜기를 다니지만,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잘 된다’라고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고난이 지나고 말년까지 부하고 존귀하게 살았습니다.
이게 어떤 원리로 이렇게 되느냐 하면, 누에가 자기 입에서 뿜어내는 실로 자기 몸을 칭칭 감아서 그 안에 갇힌 것과 같이, 지금 내가 하는 말이 나를, 내 삶을 옴짝달싹 못하게 동여매기 때문입니다.
다른 원리로는 말은 ‘배의 키’와도 같기 때문입니다. 이는 야고보 선지자의 말인데요(약3:4~5). 요즘은 기술의 발달로 인해 웬만한 빌딩 크기보다 더 큰 배를 만듭니다. 그러나 수백 톤 혹은 수천 톤의 거대한 배라도 작은 키 하나로 움직입니다. 키를 왼쪽으로 돌리면 왼쪽으로 가고, 키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오른쪽으로 가는 겁니다. 우리 인생이라는 배도 우리가 하는 말에 의해 희망의 나라로도 갈 수 있고, 절망의 나락으로도 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을 잘해야 하겠지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원리가 여기 있습니다. 바로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14:28)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말을 다 듣고 계실 뿐 아니라 천사를 통해 매일 보고 받으십니다(마18:10). “누가 오늘 이렇게 말하던데요.” 하면, 하나님이
“그래도 해줘라.” 이런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굳이 자초하여 사(死)와 화
(禍)를 택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입방정을 떠는 경우 말입니다.
열왕기하 7장을 보면 사마리아 성이 아람 군대에 포위되었을 때 먹을 것이 없어 서로 자식을 잡아먹는 지경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때 왕이 하나님께 그 모든 책임이 있다고 하자 엘리사가 “내일 이맘때에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풀어주실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한 장관이 이 말을 듣고는 코웃음을 치며,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라고 했습니다. 절대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죠. 죽음과 저주를 아주 싹 쓸어 담은 말입니다. 그러자 엘리사가 그에게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너는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고 예언했는데, 정말 엘리사의 예언대로 하나님이 아람군대로 하여금 병거소리와 말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심으로 그들이 짐을 꾸릴 여유도 없이 퇴각하는 바람에 그것들이 다 이스라엘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장관은 어찌 되었을까요? 그는 성문을 지키다가 백성들에게 밟혀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런 걸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 지금 당신이 하는 말이 당신의 미래입니다. 그런데 지금 어떤 말을 하고 있습니까? 말이 씨라고 어른들이 말씀하시죠? 맞습니다. 지금 호박씨를 뿌리면 훗날 호박이 나고요, 지금 사과씨를 뿌리면 몇 년 후에 사과가 납니다. 제가 70 넘게 살았는데 배추씨를 뿌렸는데 당근 나는 걸 못봤습니다. 사과를 심었는데 포도가 열리는 경우도 못 봤습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는 말씀은 변개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말로 생사화복만 갈리는 게 아닙니다. 말로 영생과 영멸도 갈립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두 강도를 아시죠? 십자가에 못 박힐 정도이니 세상에서 아주 못된 짓만 하던 놈들입니다. 그런데 한 강도는 예수님에게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23:42)라는 ‘말 덕분에’ 구원을 얻습니다. 그런데 다른 강도는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눅23:39)는
‘말 때문에’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
그러니 자식에게, 남편에게, 아내에게, 직원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나가 죽어라’, ‘빌어먹을 놈’,
‘싹이 노랗다’ 등등…. 사랑해야 할 사람들에게 무의식 속에 저주를 퍼붓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사랑하니까 그런다나요? No! 억지로 씨를 뿌려도 씨는 나고, 실수로 뿌린 씨도 나는 법, 그 결과가 어떤 줄 압니까? “저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 아니하더니 복이 저를 멀리 떠났으며 또 저주하기를 옷 입듯하더니 저주가 물 같이 그 내부에 들어가며 기름 같이 그 뼈에 들어갔나이다”(시109:17~18). 그러니 당연히 자식이 잘 될 리 없지요. 남편이 잘 될 리 없습니다. 그러니 집안이 지옥이지요. 그래서 성경에는 “저주하지 말라”(롬12:14)고 하십니다.
이제 정리해봅시다. 일단은 나에게 좋은 말을 합시다. 저는 아침이면 거울을 보고 “너 참 잘 생겼다. 오늘도 좋은 일만 있을 거야.”라고 말합니다. 그걸 수십 년 하니 정말 제 얼굴이 온화해지고 멋져졌습니다. 누군가 저더러 링컨과 칭기즈칸을 섞어놓은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웃자고 한 이야기지만, 기분 좋은 이야기입니다.
힘들 때도 좌절하거나 포기하는 말을 삼가야 합니다. 자갈을 물고서라도 ‘죽겠다’, ‘안 된다’, ‘내 주제에….’ 이런 말을 삼가야 합니다. 그 열매가 맺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잘 될 수밖에 없어.’, ‘하나님이 도우시니 잘 될 거야.’ 해야 합니다. 매일 시편 23편을 노래하면 다윗처럼 좋은 날이 옵니다.
그리고 내 주위 사람들에게도 좋은 말, 예쁜 말, 격려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과학자들이 그럽디다. 물에게 ‘고맙다’라고 말하면 물은 아름다운 육각수의 결정체를 보이지만, ‘망할 놈!’ 하고 말을 던지면 물의 결정체는 산산이 부서지면서 아주 괴상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고요. 밥을 떠놓고 거기다 저주를 하니까 밥에 시꺼먼 곰팡이가 피는데, 사랑의 말을 전하면 하얀 곰팡이가 조금 핀다고 합디다. 선인장도 사랑한다고 계속하면 가시가 다 떨어진다고 합디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
인생은 말(言)을 타고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말이란 것이 야생마처럼 다스리기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만(약3:7~8), 결심하고 노력하면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명심합시다. 말이 인생을 바꾸고, 말이 인생을 이끌고 다닌다는 것을요. 말이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도 만든다는 것을요. 그러니 우리, 말을 잘합시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벧전3:10~11). 할렐루야!
생사화복이
네 혀에 달려 있다
인생은
말로 채색되는 예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