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리천리(毫釐千里)
호리천리(毫釐千里)
호리천리(毫釐千里)라는 말이 있다. 처음에는 티끌 하나의 차이가 후에는 천 리만큼의 엄청난 격차로 벌어진다는 뜻이다. 도화지에 연필로 자 없이 직선을 그어봤는가? 짧은 직선은 제법 반듯하게 그릴 수 있지만, 조금 긴 직선을 그리려면 쉽지 않다. 펜을 잡은 당사자가 느끼지 못하는 미묘한 각도 차이, 방향 차이가 직선 궤도를 이탈하게끔 만들기 때문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께 쓰임 받다 버림받은 자들, 타락하고 변질된 인물 중에서 처음부터 완전히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거나 평행선을 탄 경우는 거의 없다. 지극히 작은 것, 어찌 보면 별것 아닌 것 때문에 축복이 저주로 바뀌고, 환희가 재앙으로 바뀐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따먹은 선악과는 동산의 수많은 나무 실과 중 하나였을 뿐이고, 제사장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제단에 단지 다른 불을 담아 분향했을 뿐이다. 사울이 하나님 말씀대로 100% 순종하지 않고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지 않은 데에는 하나님께 좋은 것으로 드리려 한다는 자기 나름의 합리적인 명분이 있었고, 아나니아와 삽비라 또한 하나님께 드리려고 자기들의 소유를 팔아 아예 안 드린 게 아니라 다만 그중에서 얼마를 감추었을 뿐이다.
그들과 대척점에 있는 인물들의 면면을 보라. 노아는 방주를 만들 때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다 준행하여 인류의 새 시대를 열었고,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에 충성됨으로써 하나님과 대면하여 아시던 자로 기록되었다.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고 여겨질 정도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전쟁 중에도 묻고 또 물었으며,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며 복음을 전하는 데 목숨까지 아끼지 않았다. 작은 차이가 결국 큰 차이를 만든 것이다.
하나님이 총회장 목사님을 들어 쓰시는 가장 큰 이유를 꼽자면, 목사님이 좋아하시는 사자성어처럼 하나님 앞에서 초지일관(初志一貫), 항구여일(恒久如一)하게 100% 순종하시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그럴 수 있을까. 목사가 돼도, 어디를 가도, 무슨 일을 당해도 늘 한결같을 수 있을까.
우리 모두 목사님의 자세를 본받아 티끌만큼의 삐뚤어짐이나 기울어짐 없이 바른길, 옳은 길을 따르는 신앙의 일직선을 그리길 소원한다.
신혁주 전도사
blessedmic@naver.com
가치 있는 삶
얼마 전 저는 사랑하는 제자 원복이를 천국으로 보냈습니다. 스무 살 청년의 장례식은 매우 특이했습니다. 아이를 먼저 보내는 부모도, 일가친지들도 모두 슬픔에 젖어 애통해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서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는 찬양과 예배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장례식이었습니다.
임종예배에서 이시대 목사님은 ‘사람의 수명은 정해져 있으며, 그 수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간만 살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왜 원복이를 이렇게 빨리 데려가시나?’ 하는 의문이 풀렸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수명이 얼마인지는 아무도 모르기에 매일 주어진 삶을 잘 살아가야 한다’는 목사님의 말씀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주어진 20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원복이는 하나님을 사모하고 사랑하며 삶으로 예배하며 갔습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사그라지지 않았고, 마지막 순간도 하나님을 찬양했으며, 대학부 친구들과 작별 인사에서 천국에서 만나자고 웃으며 이야기했습니다. 원복이는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시는데 자신이 포기할 수 없다며 수면제를 거부하고, “나는 포기하지 않았어! 나를 위해 기도해줘.”라며 마지막까지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원복이가 마지막에 회개했던 기도 제목은 “하나님, 제가 예배 시간에 딴생각해서 죄송해요~!”였습니다. 그 아이의 순수한 고백을 보며, 짧지만 ‘참 가치 있고, 순수한 삶을 살았구나! 참 멋있는 삶을 살다 가는구나~!’ 하는 마음과
‘나도 저렇게 주님 품에 안기고 싶다, 주 앞에 갈 때 나도 저런 모습이어야 한다’는 마음이 몰려왔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고 최선을 다해 믿음의 싸움을 한 우리 원복이가 천국에서 나를 보고 있을 때 부끄럽지 않은 목사가, 종이 되고 싶습니다.
“원복아! 지금도 보고 있지? 곧 다시 만나자! 그때까지 너에게 부끄럽지 않은 종으로 살다 갈게. 함께 일해줘서 고맙다. 천국에서 만나자! 사랑해.”
이현승 목사
coollee0817@naver.com
Good News
평생을 사찰에서 목탁 치던 스님도 얼음 위로 강을 건너다 얼음이 깨져 죽을 지경이 되면, ‘아이고 하나님, 살려주시오.’ 한다는 말이 있다.
평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섬기지도 않다가 목숨이 경각(頃刻)에 다다라 위급할 때면 그가 섬기던 석가모니를 찾지 않고 하나님을 찾는다. 이것이 인간 본연의 부르짖음이다. 평소에는 ‘하나님이 어디 있어? 다 쓸데없는 소리다.’하던 사람도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다 지은 농작물이 침수되어 녹아버리고, 수마로 가옥이 무너지고, 가축이 죽어 떠내려가고, 사람도 익사를 당하면 하는 말이, ‘하나님이 해도 해도 너무한다.’라며 하나님께 탓을 돌린다. 또한 가뭄이 들어 기근으로 산짐승, 들짐승이 마실 물이 없어 쓰러지며, 사람도 마실 물을 얻기 위해 저수지 밑바닥을 파다 기진맥진하여 결국 하는 말이,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다 죽어가는데 이럴 수가 있느냐?’며 하나님을 원망한다.
왜 사람들은 홍수가 나면 하나님 탓으로 돌릴까? 왜 사람들은 기근이 오면 하나님을 무심하다며 원망할까? 왜 목탁 치던 스님이 다급하면, ‘아이고 하나님! 살려주시오.’ 할까? 이것은 인간 본연의 부르짖음이다. 자기 인격은 하나님을 모르지만 자기 영혼은 하나님을 찾고 있는 신음소리다. 죽음 앞에서 자기 영혼이 하나님을 찾는 부르짖음이다. 바로 이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 믿고 천국 가자면, ‘천국이 어디 있어?’라고 말하면서도 예수 믿지 않고 죽으면 지옥 간다고 말하면 기분 나빠 화를 내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영혼의 감정이다.
그렇다. 지옥에 가기 싫은 것은 인간 본연의 몸부림이다. 예수 믿고 천국에 가자면 천국이 없다고 하면서 지옥에는 가기 싫어하는 것이 인간 본연의 몸부림이다. 성경에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인들이 있었다(마22:23). 사두개인들은 부자로 살면서 부활도, 천사도 없다고 주장하던 자들이다. 예수께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니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들이 비아냥거렸다. 이처럼 사람들은 세상에서 살만하면 하나님을 찾지 않지만 죽음의 문턱에서는 하나님을 찾게 되고 살려고 몸부림치는 것이다.
이승효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