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심을 버린 자들의 결과를 보라(눅18:1~8)
엉덩이에 종기가 난 여자 둘이 병원을 찾았습니다. 의사가 진찰을 해야 하니 옷을 벗으라고 하자 남자의사인 터라 두 여자는 갈등했습니다. 그러나 한 여자는 살고 보자는 심정으로 부끄러움과 자존심을 내려놓고 옷을 벗고 치료해서 완치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여자는 망측해서 도저히 못하겠다면서 병원을 나왔고, 종기가 악성으로 발전해서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어른들이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오장육부를 빼내면 세상 살기가 아주 편하단다. 오장육부 빼내고 가서 빌어. 가서 도와 달라고 해.” 맞습니다. 오장육부, 즉 자존심만 빼내면 일은 의외로 쉽게 풀립니다. 살아보니 자존심이란 것이 별 것 아닙디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들은 자존심이 짓밟힐 때마다 그것을 사다리 삼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간 것입니다.
제가 목회가 아주 쉽다고 말하지요? 솔직히 말처럼 쉬웠겠습니까만, 일찍이 자존심을 기도원에 만들어놓은 가묘에 묻어버렸더니 말대로 쉽습디다. 잘못했으면 성도들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고, 교단과 교회를 위해서라면 머리를 조아렸더니 얽힌 문제들이 해결되었습니다.
여러분, 자존심이 뭡니까? 자존심이란 스스로 자(自), 높을 존(尊), 마음 심(心)으로, 남에게 굽힘이 없이 자기 스스로 높은 품위를 지키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아봐서 알겠지만, 남에게 굽히지 않고 늘 꼿꼿하게 품위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습디까? 이것은 마치 한 번도 좌회전, 우회전하지 않고 직진으로만 운전하여 목적지에 이르겠다는 것과 동일합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과부를 보세요. 그 과부에게는 억울한 사연이 있었나 봅니다. 그것을 풀어줄 만한 인물을 찾다가 한 재판관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 재판관은 사람을 우습게 알고 하나님도 무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힘없고 돈 없고 빽 없는 과부를 사람 취급이나 했겠습니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데 그녀라고 왜 자존심이 없었겠습니까만, 그래도 과부는 하루도 빠짐없이 재판관을 찾아갔습니다. 그랬더니 결국 그런 재판관도 과부에게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원한을 풀어줬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 그녀는 배울 만큼 배우고, 살 만큼 사는 여인입니다. 자존심이라면 누구 못지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귀신 들린 어린 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많은 병자를 고쳤다는 소문을 들은 그녀는 물어물어 예수님을 찾아가 딸을 치료해주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이 정말 뜻밖이었습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7:27) 하셨습니다. 개 취급하며 경멸하신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난리가 났을 겁니다. “안 고쳐주면 되지, 왜 사람을 무시하냐?”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녀는 달랐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막7:28)라고 답했습니다. ‘자식이 낫기만 한다면 내 자존심이 무슨 대수냐?’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를 보시고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이것은 성경에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부도 직전인 우리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가 도움을 요청코자 저에게 상담을 했고, 이야기 끝에 별로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이 돈이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무조건 가서 도와달라고 해라.”고 했습니다. 그는 망설이다가 그를 찾아갔습니다. 안 좋은 사이인데 한 번에 “그래, 빌려줄게.” 했겠습니까? 처음에는 쳐다도 안 보고, 사람 취급도 안 했겠지요. 자존심이 많이 상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 찾아가 강청했고, 그러면서 서서히 상대의 마음이 열려 부도를 막을 만큼 돈을 빌렸습니다. 저는 그 소식을 접하고는 “자존심이 밥 먹여주냐? 잘했다 잘했어.” 했습니다. 그가 지금은 회생하여 큰 기업이 되었습니다. 자존심 버리는 것은 잠깐입니다. 그도 자존심을 사다리 삼아 한 계단 성장한 것입니다.
코스타리카 집회를 마치고 루이스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그 대통령은 저에게
“이번에 UN 총회에 가는데 어떻게 해야 국가를 살릴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자존심을 버리고 선진국에 도와달라고 하시오.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되지 않습니까? 경제를 살리고 볼 일입니다. 사회주의국가라고 제외시키지 말고 경제에 도움이 된다면 손을 잡으십시오. 대한민국도 그렇게 도약의 발판을 만들었습니다. 독일에 광부를 보내고 간호사를 보내며 차관을 들여오고 원조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36년 동안 강점했던 일본에게도 차관을 요청했습니다. 한 국가의 자존심, 대통령으로서의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도 자존심을 버리고 유학시절 쌓아둔 인맥들에게 하소연해서 이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자 애썼습니다. 이것은 대한민국이 세계 10대 경제대국이 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자존심, 자존감은 대단합니다. 일단 잘 살고 보십시다.”라고 말해줬습니다.
성경도 말씀합니다.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겔16:6). 일단 살고 보라는 말씀입니다. 살아야 후일이 있으니까요. 인격적으로 피투성이가 되어도, 다시 말해 자존심이 짓밟혀도 일단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살아라 이 말입니다.
해외 집회를 하러 가다 보면 비행기 안에서 정치적, 경제적 거물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어떤 일로 가시냐 물으면, 때론 그들의 답이 이렇습니다. “빌러 갑니다. 자존심은 대한민국에 두고 갑니다. 국가를 살리고 봐야죠. 일단 기업을 살려놓고 생각해야죠.” 합니다. 내 자존심 다 챙기고, 내 체면 다 살리면서 일을 처리할 수는 없습니다. 버려야 한다면 당연히 자존심을 버려야죠. 그게 지혜요, 합당한 처사입니다. 다윗이나 히스기야처럼 잘못한 일이 있으면 하나님 앞에든, 사람 앞에든 납작 엎드려 빌어야 합니다. 잘못한 것을 잘못했다고 하는 용기가 진정한 용기요, 그것이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존심을 챙기다가 말로가 좋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사울과 가룟 유다입니다. 사울이 아말렉 군대를 치고 전리품을 취해 돌아옵니다. 모든 소유를 가리지 말고 다 진멸하라는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것입니다. 추궁하는 사무엘에게 사울은 변명만 늘어놓습니다(삼상15:15). 사무엘은 하나님이 당신을 버렸고, 다른 사람으로 왕을 세울 것이라는 하나님 뜻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도 사울은 자존심 챙기기에 바쁩니다. 그가 사무엘에게 한 말입니다. “내가 범죄하였을찌라도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의 앞과 이스라엘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삼상15:30). 하나님이 버렸다는데, 폐위한다는데 이 상황에 자존심을 챙기고 있으니…. 그의 비참한 말로는 이미 예견된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놓고 잘못한 줄 알았습니다. 후회했습니다. 그러면 얼른 ‘잘못했습니다.’ 했어야 합니다. 베드로처럼요. 돈 주고 팔아먹은 사람이나 세 번이나 부인하고 배신한 사람이나 똑같은 죄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존심이고 뭐고 없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해서 죄를 사함받고 은총을 입어 수제자로 거듭났고, 가룟 유다는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일을 마무리한 것입니다. 자살해서 끝날 일이면 좋겠지만, 내세가 있으니…. 가룟 유다 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을 잘못해서, 부정한 일을 벌이다 그것이 들통나면 자살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잘못했습니다.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하면 될 것을…. 왜 그런지 압니까? 자존심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남’이기 때문입니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 ‘남들이 뭐라 할까?’ 생각하기 때문에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하는 겁니다.
여러분, 자존심은 성공의 걸림돌입니다. 그것을 빼버리세요. 그것에 걸려 인생을 망치지 마세요. 나아만 장군처럼,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처럼, 누가복음 11장에 보리떡을 구하러 간 자처럼, 그리고 우리 주님처럼 자존심을 버려 목적한 바를 성취하세요. 할렐루야!
자존심을 버리고
후일을 도모하라
자존심은 순간이나
꿈은 영원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