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함과 좋아함
사랑함과 좋아함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다르다. 좋아하는 것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 차이점은 좋아하는 것은 감정의 차원이고 사랑하는 것은 삶의 차원이다. 좋아하는 감정은 고통이 오면 떠나지만, 사랑은 고통이 오면 껴안는다.”
어느 책을 읽다가 적어 놓은 것인데, 다시 읽어보니 마음에 와닿았다. 특히 ‘사랑은 고통이 오면 껴안는다.’라는 말에 가슴이 찡하며 뭉클했다.
고난은 사랑의 시금석이다. 평소에는 잘 모른다. 모든 것이 순조롭고 평탄할 때는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에 차이를 못 느낀다. 그러나 막상 고난이 닥치고 어려움에 직면하면 그 차이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사랑했던 것이 그냥 감정이었는지 아니면 진실한 것이었는지 밝혀지게 되니 말이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해보았다. “나는 예수님을 좋아하는가, 사랑하는가? 나는 교회를 좋아하는가, 사랑하는가? 나는 맡은 바 일을 좋아하는가, 사랑하는가?”
스스로 점검해보았다. “어떠한 환난과 시련 속에서도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며, 교회를 사랑하고, 나의 사명을 사랑하며 충성을 다 할 수 있는가?” 자문자답하며 사랑을 재확인하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그러나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 별개가 될 수 있지만, 또한 하나가 될 수 있다. 사랑 없이 좋아하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감정에서 끝나지만, 사랑하고 좋아하면 상대방 중심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다. 스바냐 3장 17절에, ‘하나님은 나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나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고 즐거이 노래하며 기뻐하신다’고 했다. 진정으로 사랑하면 좋아하고 기뻐하게 된다.
다시 한번 마음을 살피며 다짐해본다.
“사랑하며 좋아하리라. 사랑 없이는 좋아하지 않으리라. 사랑 가운데 기뻐하고 즐거워하리라.”
우리 주님이 그러하시듯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우리가 되길 소원해본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벧전1:8).
이정금 전도사
jungkm@nate.com
사랑과 공의
자녀들을 양육하다 보니 사랑과 공의를 균형적으로 시행해야 할 때가 있다. 공의가 없는 사랑은 무분별한 온정주의로 기울며, 또한 사랑 없는 공의는 냉혹한 율법주의로만 가기에 교육을 망치게 된다.
20년 전 소천하신 아버님이 생각난다. 딸 여섯에 막내로 아들 하나를 가지셨으니 얼마나 애지중지하게 나를 키우셨을까? 그런데 아들 하나를 강하게 키우셔야 한다는 일념으로 매우 엄하게 나를 대하셨던 관계로 사춘기 시절에는 사실 서운함도 많았다. 그런데 되돌아보면 내가 어려서 아프거나 감기로 고생하고 있을 때 늘 나를 등에 업고 기도하고 찬송을 흥얼흥얼 부르시며 다독거려주셨던 아버지의 따듯한 사랑도 내 기억의 편린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양육 받는 자녀 입장에서는 자기에게 좋은 것만을 선하다고 생각하며 받으려 한다. 그러다 보니 공의의 채찍만이 더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 진실한 사랑을 왜곡하게 된다. 사실 나를 사랑하셨던 그분이, 공의를 시행하시는 그분과 똑같은 분이었는데도 말이다. 내가 부모가 되고 보니 나의 부모님을 한층 더 이해하게 되었다. 나를 너무 사랑하시는 그분이 때로는 맹렬히 진노도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게 온전한 사랑이다.
하나님의 성품은 사랑이시지만, 공의 또한 그분의 성품이시다. 나에게 옳다고 느껴지는 것만이 선이 아니라 그분이 보시기에 옳은 일이 선이다. 그분이 옳으신 일을 시행하셔야 선이다. 그래서 완전히 선하신 분이시지만, 택한 자를 연단하시는 분이시다. 진노의 율법을 주신 분이 사랑의 계명으로 오셨다. 온 세상을 지으신 무관심한 초월자가 아주 작은 나를 아시고 내 안에 오셔서 섬세히 가르치신다. 그분이 바로 그분이시다. 한쪽만을 붙잡으려 하니 하나님을 왜곡하게 된다. 어느 한 부분만을 가지고 그 사람을 설명하는 것은 일리 있는 설명일 수는 있으나 온전한 설명은 아니다. 일리는 진리의 한 부분일 뿐, 그것을 전부라 우기는 건 진리가 아니다. 진리가 진리 되려면 전체를 봐야 한다. 진리에는 사랑의 제한이 있기에, 그 안에 거할 때 자유가 임하는 거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34:8).
송직화 목사
예수로 사는 인생
얼마 전 감기몸살을 심하게 앓았다. 많이 아프고 난 후 위염도 와서 또 며칠간 고생을 했다. 병원에 다녀오는 길에 뭔가 마음이 서럽고 내 모습이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불과 한 달 전쯤에도 머리에 찌릿한 통증이 있어서 신경외과를 다녀왔었는데, 요즘 몸이 왜 이런가 싶어 많은 생각이 들었다.
안 되겠다 싶어 집에 오자마자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몸이 힘드니 기도도 쉽지 않아 평소 즐겨듣는 찬양 영상을 TV로 틀었다. 나지막이 찬양을 따라 하며 가사를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는데 눈물이 흐르며 강한 성령님의 임재를 느꼈다. 그러자 어두움이 떠나고 빛이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고, 몸에도 점점 새 힘이 솟아나 나의 찬양 소리도 점점 커져갔다. 그렇게 집에서 은혜가 넘치는 나만의 찬양 집회가 펼쳐졌다.
“악한 것들아, 아무리 공격해봐라. 내가 눈 하나 꿈쩍 하나. 나는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능히 이겨낼 거다. 어디 한번 해봐라. 누가 이기나 보자!”
이렇게 큰 소리로 선포하고 나니 온몸에 더욱 힘이 생기고 뜨거운 무언가가 샘솟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내 삶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이 감사해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해서 감사의 눈물이 흘러나왔다. 내 마음에 성령님께서 함께하시니 할 수 있는 고백이었다. 마침 그때 틀어놓은 영상에서도 이런 찬양이 흘러나왔다.
‘내 이름 불러주시고/ 내 삶의 주인 되시는/ 내 맘의 노래 되시는/ 그는 크신 나의 예수 / 삶의 무게가 내 맘을 누르고/ 버틸 힘없는 시간을 지날 때/ 예수만 의지하는 삶 되기 원하네/ 주 붙드네/ 주님 시선을 거두지 않으사/ 주의 은혜로 감당케 하시네/ 예수로 사는 인생 책임져 주시니/ 주께 맡기네’
예수로 사는 인생을 책임져주신다는 가사가 너무 은혜로워 또 한참을 울었다. 맞다. 예수로 살면 된다. 어떤 어려움과 역경도 예수님과 함께라면 거뜬히 이겨낼 수 있다. 늘 내 이름을 불러주시고 버틸 힘주시고 함께하시는 예수님이 함께하시는데 무엇이 힘들고 무엇이 어려울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미뤄뒀던 운동을 다시 시작하고 면역력에 좋다는 영양제도 챙겨 먹었다. 청·장년부 새벽기도에도 더욱 열심히 참석하며 기도했고, 청·장년부 전체 기도 제목과 내 기도 제목, 팀원들의 기도 제목을 적어 진심으로 같이 중보기도 했다.
악한 마귀는 지속적으로 기회를 노린다. 하나님의 사람을 쓰러트리려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믿음의 가정을 무너트리려고 기회를 엿본다.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또 육신이 약해 기도가 나오지 않을 때 찬양 주심에 감사했다. 찬양으로도 기도하니 이후에는 기도에도 더욱 몰입할 수 있었다.
예수로 살면 된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내 인생을 책임져주신다. 앞으로도 더욱 예수만 위해 사는, 예수로 사는 내가 되리라 고백해본다.
정효경 집사
happy_holly@naver.com
지금 몇 시?
어떤 사람이 인생을 70년으로 보고 그것을 하루 24시간 안에 축소해 보았다. 그랬더니 이런 결과가 나왔다.
나이가 30세면 오후 1시 25분에 해당되고, 35세면 오후 2시 25분이며, 40세면 오후 4시 16분이요, 45세면 오후 5시 43분이 된다. 또 나이 50이면 오후 7시가 되고, 55세면 저녁 8시, 60세면 밤 10시가 된다. 그러다 70세가 되면 밤 12시 종이 울린다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몇 시의 인생을 살고 있는가? 점심 시간대를 지나고 있는가, 퇴근시간대에 살고 있는가? 아니면 이제 이불을 깔 때가 되었는가? 인생은 결코 길지 않다.
어쩌면 인생이란 이처럼 하루살이에 불과할지 모른다. 곧 날이 저물고 깜깜한 밤 시간대에 이르게 될 것이고, 자정을 알리는 괘종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일할 수 있을 때 힘써 일하라. 힘이 있을 때 주를 위해 힘써라.
후회보다 아픈 것이 없으니.
창세기 3장에 나온 엉겅퀴의 효능은?
창세기에 아담과 하와의 죄로 인해 여자는 잉태의 고통을 받게 될 것이고, 남자는 종신토록 수고하여 그 소산을 먹으리라 하셨습니다. 창세기 3장 18절에는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이라는 구절에서 하나님이 형벌로써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창세기 3장에 나온 엉겅퀴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엉겅퀴는 한약재명으로 대계(大薊)라고 하며 지혈효과가 뛰어나서 산후출혈, 자궁출혈, 코피, 장염, 신장염, 혈변, 종기 등에 사용이 됩니다. 각종 염증을 치료해주며 고혈압에도 사용됩니다.
건강식품 중에서 밀크시슬(milk thistle)로 알려져 있는 것이 바로 엉겅퀴(대계)입니다. 간에 좋은 영양제로 잘 알려져 있으며, 실리마린이라는 성분이 항산화 기능이 있어서 활성산소를 제거하고 간세포를 보호하여 만성피로 회복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밀크시슬인 대계(大薊)의 성질이 조금은 선선하여 몸이 많이 차가운 체질은 일시적으로 복용하는 것이 좋고, 몸에 체열이 있거나 소화력이 좋으신 분들은 장기적으로 복용해도 탈이 없습니다.
세계적으로 많이 팔리는 영양제인 밀크시슬(엉겅퀴)을 하나님께서는 왜 아담과 하와에게 징벌의 하나로써 주셨을까요? 하나님이 밀크시슬(엉겅퀴)의 효능을 모르셨을까요? 아마도 인류에게 내리신 출산의 고통 속에서 출혈과 회복을 도울 수 있고, 평생 노동 가운데 지친 몸을 도와주는 하나님의 숨은 대비책이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때로는 어렵고 힘든 일 가운데 지치고 괴롭고 힘들지만, 그 이면에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와 사랑 가운데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엉겅퀴를 통해 생각해봅니다.
“볼찌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찌니라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욥5:17~18).
Dr. 설재현 집사
단비를 주시는 하나님!
작년 가을 기도원집회에 갈 때 가슴 아팠던 장면을 하나 보았다. 남부 지방 가뭄으로 장성호에 물이 말라버린 것이었다. 물이 아예 하나도 없이 메마른 바닥만 드러내고 있어서, ‘여기가 장성호 맞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아름답던 장성호가 메마르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아파 생각이 날 때마다 기도가 절로 나왔다.
‘하나님, 다음 기도원집회 갈 때는 물이 차 있는 장성호를 보게 해주세요.’라고 말이다.
시간이 지나 이번 5월 춘계산상집회가 열렸고, 집회를 마치고 올라오면서 장성호 옆을 지나가게 되었다. 이전보다는 물이 차오른 장성호를 볼 수 있어 너무 감사했다. 그리고 다행히 집회 기간에는 비가 오지 않았으나 집회가 끝나자마자 남부지방에 많은 비가 내려 가뭄 해갈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뉴스도 보게 되었다. 이 작은 기도 소리도 듣고 응답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어디 이뿐인가? 기도원집회를 통해서는 영적 단비를 내려주셔서 메마른 우리 마음이 성령의 비로 촉촉이 젖게 하셨다. 기도도 많이 하고 은혜의 말씀도 많이 들어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하셨다. 예배만 좋았던 것이 아니다. 무료로 제공해주시는 밥도 맛있고, 커피도 맛있고, 토스트도 좋았다. 새롭게 단장한 화장실도 아름다웠다.
어느 것 하나 부족함 없이 준비해주시고 채워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이 모든 것을 준비하고 제공해주신 분들께도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다음 기도원집회를 또 기대하고 기다린다. 늘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이 더 큰 은혜와 선물을 가지고 우리를 반가이 맞이해주실 것이라 확신한다.
장명훈 집사
jjoshua@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