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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나무

1197호 · 2023-04-16
신앙논객

꽃보다 나무

지난 몇 주간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거리를 바라보면서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저 꽃들 기껏해야 2주면 다 져서 땅에 떨어지고, 청소부 아저씨들만 괴롭게 될 텐데….’

나이를 먹으면서 감수성이 메마른 걸까 싶겠지만 내 성격은 어렸을 때부터 원래 그랬다. 여행 같은 것도 별로 안 좋아하고, 수려한 경치를 봐도 별 감흥이 없고, 분위기나 무드 같은 것도 잡을 줄 모르고. 꽃이야 시들고 져버리면 쓰레기 아닌가.

그러다 꽃들 사이에 있는 나뭇가지를 보았다. 꽃은 길어야 한 달이면 진다. 잎사귀도 아름답지만 가을 한 철이면 이름 그대로 떨어지는 낙엽이 된다. 그러나 나무는 세월이 지나고 계절이 바뀌어도 그 자리에 그대로 심겨 있다. 물론 겨울에는 앙상한 나뭇가지만 보이지만, 수많은 꽃이 피고 지도록, 또 해마다 나뭇잎이 나고 또 낙엽 되어 떨어지도록 나무는 항상 변함이 없다. 우리 신앙도 그런 신앙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집회나 행사같이 뭐 있을 때만 반짝하는 신앙 말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여전히 자신이 심긴 자리에서 죽을 때까지 주어진 삶을 살아내는 그런 신앙 말이다.

미국의 동화 작가 셸 실버스타인(Shel Silverstein)이 쓴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서 나무는 소년이 노인이 될 때까지 항상 그 자리에 있으면서 소년의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었다. 소년일 때는 나뭇가지로 그네를 타며 놀게 해주고, 자라서는 사과 열매를 모아다가 팔아 돈을 벌게 해주고, 가지를 베어서 신혼집도 만들게 해주고, 얼마 후에는 몸통으로 배를 만들어 훌쩍 떠날 수 있게 해주고, 마지막에는 앉아서 쉴 수 있는 그루터기까지.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도 이와 같다. 때로는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고, 때로는 슬픔과 고통 가운데 위로와 안식을 주시고, 마침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구원과 영생을 주시는 분.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총회장 목사님이 40년 가까운 세월을 변함없이 하나님 말씀에 100% 순종하며 항구여일(恒久如一)하신 것처럼, 우리 신앙도 잠시 잠깐 화려하게 피었다 지는 꽃보다는 북풍한설에도 요동하지 않는 뿌리 깊은 나무와 같은 신앙으로 성장하기를 고대한다.

신혁주 전도사

blessedmic@naver.com

책을 펴다

자네를 믿네

인천교회 부지를 찾아낸 사람들은 서울교회의 국길현 장로와 염상섭 장로다. 꿈에 국 장로가 세 장의 카드를 꺼내면서 나에게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는데, 실제로 부지 세 곳 중에 하나를 택한 곳이 지금의 인천교회 터다.

이제 계약을 해야 하는데 계약금의 일부가 모자랐다. 그때 염상섭 장로가 공장 이전을 위해 가지고 있던 돈을 선뜻 빌려줬다. 나는 그런 그에게 “자네가 가서 계약하게.”라며 거액의 돈을 건넸다. 그랬더니 한 덩치 하는 그가 내 앞에 무릎을 딱 꿇고는, “고맙습니다. 저를 그렇게까지 믿어주실 줄 몰랐습니다.” 했다. “공장에 들어갈 돈까지 빌려줬는데, 내가 자네를 안 믿는다면 누굴 믿겠나?”라고 말해줬다. 그는 성전건축위원장이 되어 자신의 사업은 뒤로한 채 인천성전 건축에 최선을 다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가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예수님이 잡혀가시던 밤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전력이 있는지라 베드로는 당연히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님이 아십니다.”라고 답한다. 그러자 주님이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내 양을 먹이라.”

믿어주신 거다. 그랬더니 베드로가 180도 변했다. 자신을 믿어주신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내던지면서 복음을 전한 것이다. 나도 내가 주님을 믿듯, 주님도 나를 믿어주신다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주님을 위해 이 목숨을 내놓고 죽도록 충성한다.

맞다. 신뢰보다 무서운 파괴력을 가진 것은 없다. 그러므로 일을 맡겼으면 믿어줘라. 그것이 최고의 예우이다.

이초석 목사 저서 ‘뿌리가 썩은 나무에

물을 주지 말라’ 중에서

생명의 말씀

초행길

얼마 전 남원에 장례식 하관예배를 참석하러 갔다. 남원시내에 도착하여 점심 식사 후 장지로 이동하기 위해 차량 내비게이션을 틀었다. 돌아가는 큰 도로 길도 있었지만, 조금 일찍 도착하려고 최단거리로 검색했다. 그 길은 산으로 올라가는 일차선 비포장 도로였다. 이 길이 아니다 싶었지만 일단 진입하고 나니 되돌릴 여유 공간조차 없어서 그냥 진행하기로 했다.

그런데 갈수록 차가 다니기 힘든 좁은 산길만 계속 나타났다. 문제는 높은 산꼭대기를 넘어서 내려가는 길이었다. 오른쪽으로는 깎아지른 절벽같은 낭떠러지였다. 오금이 저려 천천히 운전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사모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이 길이 진짜 맞는 길인지 연신 물었다. 얼마나 긴장되는 시간이었는지, 그럼에도 오직 믿는 것은 내비게이션 하나뿐이었다. 여정은 힘들었지만 끝까지 믿고 따라갔더니 결국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었다.

우리 신앙생활에서 맞닥뜨리는 이런 초행길들이 참 많다. 무언가를 결정하고 행동해야 할 때 전혀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을 말씀이라는 내비게이션 하나만을 붙잡고 가야하는 상황들이 많다. 아브라함도 가나안 땅으로의 여정이 초행길이라 많이 두려웠을 텐데 그의 애굽으로의 피난길까지도 하나님은 동행하셨다. 결코 홀로 두지 않으셨다. 위기에서도 보호하시는 확실한 동행자이셨다. 산을 넘는 내내 나에게 내비게이션은 확실한 동행자 역할을 해주었다. 모든 길을 입체적으로 구석구석 잘 알고 있는 내비게이션은, 지구 밖에서 보내주는 다른 차원의 정보를 가지고 있다. 말씀이라는 정보도 온 우주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보내주신 정확 무오한 이생과 내생의 정보이다. 믿고 따라갈 때 천국까지 가는 길이 열려있다.

장례식장에 도착하여 죽음을 묵상했다. 죽음은 누구나 가야하는 초행길이다. 막막하지만 확실한 정보를 우리에게 주셨다.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나만 믿으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를 위해 거할 처소를 예비하시는 것뿐만 아니라 다시 우리를 영접하러 오셔서 천국까지 동행하신단다. 초행길이어도 초행길이 아닌 삶이다. 이 얼마나 든든한 동행길인지, 찬양하며 걸어가야 할 길이다.

송직화 목사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선택과 집중

대중교통에서 사람들을 관찰하면 공통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 핸드폰을 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핸드폰 하나만 있어도 지루한 이동 시간에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어느덧 디지털 기기는 우리 삶에서 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기술의 발달은 우리에게 많은 편의를 제공합니다. 이전에는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삶에 여유가 생겼을까요? 오히려 분주함은 일상이 되었습니다. 자꾸만 집중을 흐트러뜨리는 일이 생깁니다. 적극적으로 통제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 계속해서 바빠집니다. 중요하지 않은 일로 시간이 낭비됩니다. 내 삶에 자리 잡은 분주함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저는 올해 성경을 최대한 많이 읽기로 다짐했습니다. 왕복 2시간 정도 되는 출퇴근 시간을 활용해 핸드폰으로 말씀을 봅니다. 이때 알람이 떠서 잠깐 확인하면 15분이 훌쩍 지나가고, SNS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시간이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수많은 유혹을 버리고 온전히 집중하지 않으면 결심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성경 어플을 열면 ‘방해금지 모드’가 자동으로 켜지도록 설정했습니다. 핸드폰에 방해금지 모드를 설정하면 모든 알림이 차단됩니다. 그 뒤로는 말씀에 집중하기가 한결 수월해졌습니다.

세상은 멀티태스킹이 능력이라고 합니다. 마치 효율적이고 능력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럴까요? 우리는 한 가지 일에 집중할 때 최고의 효율을 낼 수 있습니다. 최근 한 연구에서 멀티태스킹은 단기 기억력과 주의력을 떨어뜨리고 치매로 이어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분주한 마르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라고 하셨습니다. 중요한 일을 위해서는 부수적인 것은 버리고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무엇을 확인하나요? 바쁘고 분주한 일상에 떠밀려 나도 모르게 중요한 것을 잊고 있지는 않나요?

벌써 2023년도 1/4이 지났습니다. 나는 무엇에 가장 많은 시간을 쓰고 있는지 다시 한번 점검할 때입니다. 올해는 나를 분주하게 만드는 것들과 거리를 두고 진짜 가치 있는 일에 집중하겠다 다짐해봅니다.

전소희

참된 깨달음

미디어와 신앙

정치, 경제, 종교 등 사회의 전 분야에서 유튜브 등의 미디어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조회 수가 곧 돈과 연결되다 보니 자극적이고, 비판적인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저 또한 비판적인 논조에 동화될 때 가슴이 답답함을 느꼈고, 곧 성령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보고 있으면 그럴듯해서 빠져들게 되고, 확신이 믿음이 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믿음은 ‘신념’과 ‘신앙’으로 구분됩니다. 신념은 ‘믿을 신(信)’에 ‘생각할 염(念)’을 쓰는데, 내가 믿는 것대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신념은 가치, 사상, 제도 등 삶의 기준을 말합니다. 신앙은 ‘믿을 신(信)’에 ‘우러를 앙(仰)’을 쓰는데 절대 주권자인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실존하시는 분이며, 변하지 않는 기준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생활입니다.

신념과 신앙이 충돌할 때 3가지 정도의 현상이 나타납니다. 첫째, 성령님께서 함께하는 사람은 신념대로 살아가려 할 때 고난과 수치를 당하게 해서 신념에서 신앙으로 회귀하도록 역사하십니다. 둘째, 말 자체에 능력이 있기 때문에 신념대로 생각하고 말하면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이는 바람에 날아다니는 겨와 같아 결국 천국에는 이르지 못하게 됩니다. 셋째, 마귀가 사람을 속여 죄를 지으면서도 하나님의 허용하심이라는 합리화로 살아가게 합니다. 이런 사람은 인격에 맺어지는 성령의 열매가 없고 교만과 위선이 늘어납니다. 또한 신념이 강할수록 성령님이 개입하실 여지가 줄어듭니다. 세상의 미디어는 신앙보다는 신념을 강하게 합니다. 진리가 아닌 것을 정의라는 이름으로 진리처럼 포장해서 유혹합니다. 신념을 버리고 성경으로, 기도의 자리로 돌아가는 참된 신앙생활을 해야겠습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롬2:7~8).

송명국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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