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 말고 기회 있을 때 주님의 일 하자(행1:8~14)
지금도 가슴에 꼭 품고 있는 꿈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래전에 꾼 꿈입니다. 제가 예수님과 한 상에 앉아 회의를 하다가 너무 피곤하여 쉬고 싶은 마음에 다리를 쭉 뻗고 누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피곤하면 쉬어라. 너 아니면 사람이 없는 줄 아냐?” 하시며 벌떡 일어나 나가시는 것 아닙니까? 얼마나 소스라치게 놀랐는지…. 잠에서 벌떡 깼습니다.
‘맞아, 사람이 없어서 나를 쓰시는 게 아니야. 내가 잘 나서도 아니야. 하나님이 나에게 기회를 주신 거지.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야 해.’ 그 꿈은 저를 달리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맞습니다. 이초석이 없으면 지구촌에 복음 전할 사람이 없을까요? 천천만만입니다. 모세가 끝내 못하겠다고 했더라면 하나님은 아론을 들어서라도 출애굽의 대역사는 이루셨을 겁니다. 하나님은 사울 대신 다윗을 통해서 일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모르드개도 에스더에게 ‘네가 안 하면 다른 사람을 들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다’라고 경고했습니다.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에4:14).
우리가 지난주 함께 봤던 2003년의 우크라이나 키이우(키예프) 집회는 수월하지 못했습니다. 애당초 집회를 배설하기로 한 목사가 방해하는 세력에 넘어가 집회를 무산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큰 종인 비탈리 목사를 들어 집회를 성공적으로 열게 하셨습니다. 왜냐?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섭리는 누구도 막을 수 없고, 어떠한 경우에도 멈추거나 변개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4장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는데 청함을 받은 자들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주인이 “사람들이 없으니 이 잔치를 접읍시다.”라고 말했습니까? 아니오.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눅14:21)고 했습니다. 잔칫집에 초청받은 자들이 거부했다고 해서 잔치가 취소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거부하면 다른 사람을 채워서라도 주인의 잔치는 배설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자리가 남으면 길과 산울가로 나가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잔칫집을 채워서 주인의 계획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의 계획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지금도 쉼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구원받을 하나님의 백성이 차기까지 기다리고 계시고, 누군가를 통해서 이 과업은 꾸준히 진행하고 계십니다. 저는 그 ‘누군가’가 이초석이길 바라고, 나의 사랑하는 성도들이길 바랍니다. 우리는 반드시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주님 앞에 섰을 때 우리의 눈을 바라보시며 “넌 뭐하다 왔느냐?”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그때 뭐라 하시겠습니까? 우물쭈물하실 겁니까? 저는 당당히 답할 준비가 다 되어 있습니다. “주님, 보셔서 아시지 않습니까? 저 정말 죽을힘을 다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가족과 친구에게 버림을 받았을 때도, 이단이라고 정죄 받고 제명당했을 때도, 최루탄으로, 칼로, 총으로 위협을 당했을 때도, 비바람이 몰아쳐 마이크가 나가고 단이 무너졌을 때도, 차가 전복되었을 때도, KGB에 갇혔을 때도, 빈대가 온몸을 물어도 목이 터져라 복음을 전했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겁니다. 그러면 주님이 “그래, 그때 너를 보았노라.” 하실 겁니다.
저만 주님 앞에서 이렇게 당당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제가 기른 양떼들도, 제가 아비의 심정으로 기른 자식 같은 성도들도 주님 앞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그 자리가 두려운 자리가 아니라 저는 여러분을 자랑하고, 여러분은 저를 자랑하는 멋지고 신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사도 바울이 꾸었던 그 꿈이 우리에게도 있지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8).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님과 한 상에 앉아 떡을 떼고, 함께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는 자리까지 나가는 것이 제 꿈이요, 목표입니다(눅22:29~30).
여러분,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이 손을 내미실 때 드려야 합니다. ‘나는 별로 가진 게 없다’라고 말하지 마세요. 무화과나무는 예수께서 열매를 달라 하실 때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하다가 뿌리까지 말라 죽었습니다. 그러나 건넛마을 어린 나귀는 아직 사람을 태워보지 않았으나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자신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이 벗어 놓은 옷가지 위를 걸었고 ‘호산나’ 찬미를 들었지 않습니까?
여러분에게 건강을 준 것은, 지식을 준 것은, 지혜를 준 것은, 물질을 준 것은 여러분만 누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주의 나라를 확장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더구나 성령을 주신 것은 그 은사로, 그 열매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눈으로 보여주며 복음을 전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기회 주셨을 때 그 기회를 잡으세요. 기회가 기회인 줄 모르고 있다가는 나중에 후회합니다. 늘 말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고, 가장 아픈 거랍니다. 그러니 지금 기회를 잡으세요.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전도하라, 헌신하라’고 닦달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 목사님은 해도 해도 너무해, 우리를 너무 달달 볶아.’ 그렇게 말할지 몰라도 그날에는 오히려 저에게 감사할 겁니다. ‘이래서 그러셨구나.’ 할 겁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계22:12). 논공행상(論功行賞)은 이 땅에서는 물론 내세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법이니까요.
솔직히 똑같은 상을 준다면 저도 이렇게 살지는 않습니다. 대충, 좀 쉬어가며 해도 누가 뭐랄 사람 없습니다. 그러나 이 나이에 3월 20일 일본을 시작으로 멀리 페루까지 집회를 잡아놓은 것은 일한 만큼 상을 주신다는 그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9:24).
하나님이 손을 내미실 때 난색을 표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손을 내미실 때가 우리에게는 기회요, 그것은 우리에게 한없는 은혜입니다. 그때 감사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손에 내 육체를, 내 시간을, 내 물질을, 내 지식을 기쁨으로, 아낌없이 얹어드려야 합니다. 내가 거부하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시지 나에게 사정하지 않으십니다. 저도 사람에게 사정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정하실까요?
찬송가에도 있습니다. ‘어둔 밤 쉬 되리니 내 직분 지켜서 찬 이슬 맺힐 때에 일찍 일어나 해 돋는 아침부터 힘써서 일하라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리라’, 그렇습니다. 세상의 징조를 보아도 일할 수 없는 밤이 곧 옵니다. 그러므로 일할 수 있을 때, 기회가 주어졌을 때 열심히, 최선을 다해,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일해야 합니다.
“네 육체 좀 쓰자.”, “네 물질 좀 쓰자.”,
“네 시간 좀 쓰자.” 그때 기쁨으로 주님께 내어드리는 자가 됩시다. 누가복음 14장의 사람들처럼 ‘내가 밭을 사서’, ‘내가 소 다섯 겨리를 사서’, ‘내가 장가를 들어서’라고 말하지 말고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쓰소서.’ 하고 기꺼이 드리는 자가 됩시다. 많은 사람 중에 나를 써 주심에,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데 내가 도구되게 하심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는 자가 됩시다.
이제는 자다가 깰 때입니다. 코로나로 인하여 3년이란 세월 동안 우리 모두가 너무 무뎌지고 굳어졌습니다. 이제 묵은 지경을 갈아엎고 열심히 씨를 뿌려야 합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씨를 뿌려야 합니다. 봄을 이길 겨울은 없으니까요. 할렐루야!
봄을 이길 겨울은 없고
자식 이길 부모는 없다
하나님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