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좋으면 다 좋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다 좋다’는 속담이 있다. 이 말은 내일을 보며 오늘을 인내하고 견딜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당신의 눈에는 현재의 고난이 보이는가, 내일의 영광이 보이는가? 예수는 부활의 영광을 보았기에 고난의 십자가를 지실 수 있었다.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을 보았기에 사울을 통한 어려운 환경에서 견뎌낼 수 있었다.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니라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니 결과를 바라며 보이는 과정에 끝까지 최선을 다하라. 눈앞에 보이는 작은 것들에 연연하지 말고 믿음의 눈을 뜨라.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생각지 못하였던 예비된 하나님의 복으로 채우실 것이다.
우리는 항상 끝이 좋다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일의 시작과 과정은 수고롭지만 끝은 반드시 하나님의 능력으로 열매를 거두기 때문이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욥8:7).
우리가 믿음으로 열심을 품고 주의 일에 충성할 때면 간혹 어떤 이들은 오해하여 아부한다고 빈정거리며 조롱한다. 그러나 아부도 끝까지 하면 충성이고, 충성도 중간에 그만두면 그것이 바로 아부임을 기억하자. 그리니 무엇을 하든지 믿음을 더하여 끝까지 충성하라. 물러서지 말라, 타협할 생각도 말라. 죽으면 죽으리라 결단하고 주님만 붙잡으라.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붙잡으라”(히3:14). 또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20)고 말씀하셨다. 사람은 시작을 보지만 하나님은 끝을 보시는 분이다. 그러니 이제 우리 모두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마25:21)라는 칭찬을 듣도록 끝까지 충성하자.
김상욱 목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결혼 첫해, 하나님께서는 남편에게 성탄절 성극의 연출을 맡겨주셨다. 배역과 스테프들은 매일 모여 기도하고 늦은 시간까지 연습하던 어느 날, 기도 중 주님께서 남편에게 말씀하셨단다. “내가 주인공이 되는 성탄절을 만들어주렴.”
그 순간 남편은 영혼을 향한 주님의 사랑이 느껴져 뜨거운 눈물을 쏟았고, 반드시 예수님이 주인공이 되는 성극을 만들리라 결단했단다. 그 결과 ‘천국과 지옥’이라는 성극을 통해 많은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첫사랑을 회복하는 성탄절이 되었다.
그렇다. 하나님의 마음은 크리스마스가 행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병들고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고, 죄 가운데 있던 영혼이 예수 생명의 길로 돌이키는 데 있다. 그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니까(마1:21).
나도 주님의 그 마음을 깨닫는 계기가 있었다. 깊은 어둠의 터널을 지나던 중,
‘하나님, 제가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을 때 어디 계셨던 거예요!’라며 몸부림치며 기도하는데 주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을 알게 하셨다. 바로 내 곁에서 나보다 더 아파하시며 우시는 주님의 마음을, 또한 우리가 죄 가운데 있는 것을 무척 가슴 아파하시는 마음을 말이다. 그 순간 내 영혼과 육체는 자유를 얻고 치료를 받았다. 그 일로 십자가는 ‘내 죄를 사하시기 위한’ 십자가로, 또 우리의 질병을 담당키 위해 맞으셨던 그 채찍은 진정 ‘나를 위한’ 것이 되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빛으로 오셔서 죄과 고통, 질병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시고 그들의 심령과 육체를 일으키셨다. 수가성 여인, 삭개오, 혈루증 여인, 백부장 등 신분과 계층도 각기 다른 이들은 예수님을 만난 후 그 일대의 전도자들이 되었다. 우리 역시 이들과 마찬가지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은혜를 입은 자들이다. 이런 우리에게 주님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명하신다(마28:18~20).
한 영혼이라도 더 건지시려는 주님의 심정으로 우리 목사님도 이번 성탄절을 총력전도주일로 선포하셨다. 한 영혼이라도 주님 앞에 올려 주님의 기쁨과 축복이 충만한 성탄절이 되기를 원한다.
“Merry Christmas!”
이국진 사모
joyful_jina@hanmail.net
예수가 없는 교회
어느 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한참 예배를 드리는데 누군가 문을 세게 두드렸다. 문을 하도 세게 두드리니 목사님은 설교하다 말고 말했다.
“누가 좀 나가 보세요.”
그래서 한 안내집사가 교회 밖으로 나가보니 술에 만취한 사람이 비틀거리며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봐요. 지금 예배 중이라고요. 들어가시든지, 아니면 돌아가시든지 그러셔야죠. 이러시면 안 돼요.”
그러자 술 취한 사람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말했다.
“내가 만날 사람이 있어서 그래.”
“도대체 누굴 만나겠다는 거예요? 여긴 교회예요. 잘못 찾아오신 거 아녀요?”
“나도 알아, 여기가 교회인지. 그러니까 만나겠다는 거 아냐? 왜? 안 돼?”
“그러니까 누구요?”
안내집사는 계속 반말로 떠들어대는 그 사람에게 조금 짜증이 났다.
“예수라는 사람 만나러 왔다. 만나면 안 되냐고. 그 사람 좀 나오라고 그래.”
그러자 이 안내집사의 말이 가관이다.
“이봐요. 우리 교회에는 그런 사람 없으니 다른 데 가서 알아보세요. 어디 와서 술주정을 부려요? 어서 가요, 어서.”
웃을 일이 아니다. 정말 예수 없는 교회, 예수 없는 성도가 많다. 교회는 번지르르한 데 예수가 없는 교회, 분명 주일마다 교회는 다니는데 예수가 없는 성도가 많다.
예수가 없는 교회는 건물이고, 예수 없는 성도는 그냥 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광야에서도 예수가 함께 하시면 거기가 교회이고, 예수와 함께 하는 자가 진정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래서 천국에 가면 깜짝 놀란단다. 꼭 있어야 할 사람이 천국에 없어서 놀라고, 생각지도 않은 사람이 천국에 와 있어서 말이다.
성탄절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을 기리고, 축하해야 할 이 성탄절에 예수님은 없다. 산타클로스가 예수님 자리에 대신하고 있고, 연인들이 성탄절의 주인공이 되었다. 선물 받고, 밤새 즐기고, 여행하는 것이 크리스마스의 행사처럼 돼버렸다. 도대체 예수님은 어디 계신단 말인가?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
내가 주를 찾을 때
얼마 전 주일예배 중에 가슴 뭉클한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내 앞에 앉았던 젊은 부부의 일이다. 그들은 초등학생 자녀를 둔 부부였고, 자녀는 유초등부 예배를 따로 드렸다. 간혹 유초등부 예배가 어른 대예배보다 빨리 끝날 때, 자녀들이 예배 중에 아빠 엄마를 찾으러 다니곤 하는데 이번에도 그런 경우였다.
어린 자녀가 넓은 체육관에 들어와서 아빠 엄마를 찾기 시작했고, 아빠 엄마가 먼저 자녀를 발견했다. 하필 자녀는 아빠 엄마가 있는 쪽이 아니라 저 멀리 반대쪽에서 그들을 찾고 헤맸다. 아빠 엄마는 예배 중이라 움직이지는 못하고 손을 이리저리 흔들며 자녀가 본인이 있는 곳을 발견하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듯했다. 이미 그들은 그 순간 예배고 뭐고 안중에 없어 보였다. 자기 자녀가 멀리서 헤매며 본인을 찾고 있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모든 신경이 그곳에만 집중되어 있어 보였다.
결국 자녀가 부모를 발견했고 와서 아빠 엄마 사이에 앉았다. 그리고 그제야 부모 마음이 편해 보였다. 이걸 보며 느꼈다. 자녀가 간절히 부모를 찾을 때 부모의 심정이 어떨지를,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간절히 찾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고 계실지를 말이다. 누가복음에 탕자가 아버지를 찾아 돌아오는 모습을 멀리서 봤을 때 아직도 그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는 그 모습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진심 어린 사랑이 아니겠는가?
얼마 전 예배 중에 총회장 목사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네 기도 듣고 있는 걸 믿어!’ 그렇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 그리고 우리가 주를 찾을 때, 하나님이 듣고 계시는 걸, 우리를 바라보고 계신 걸 우리가 믿어야 한다. 그가 듣고 가장 좋은 때에 응답해주실 것을 확신하는 믿음 있는 자녀가 되도록 하자.
장명훈 집사
kseolmed@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