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는 자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는 자
우리는 너무나 편리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스마트폰 하나로 가정의 전기 제품을 컨트롤 할 수 있다. 기차도 비행기도 예약할 수 있다. 안마의자에 앉으면 알아서 구석구석 안마를 해준다. 인터넷으로 주문만 하면 모든 것을 집으로 배달해준다. 마귀는 이 편한 세상 마음껏 즐기며 살라고 속삭인다. 불편하면 하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불편한 삶을 선택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말씀을 따르는 것은 불편한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하기 싫은 것을 하라고 하고, 하고 싶은 것은 하지 말라고 한다. 불편하다. 불편하지만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라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이다. 내가 새롭게 되는 길이고 교회가 새롭게 되는 길이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여 주의 율례들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시119:33). 그리고 이렇게 고백한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라”(시119:72). 천천 금이 단지 물질적 가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삶 가운데서 추구하는 모든 소중한 가치들을 포괄하는 것이다. 시인은 그 모든 가치들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좋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119:11) 하며 그리스도인으로 살겠노라고 다짐한 모습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삶의 기준이 있다. 사람이 그냥 살아가는 것 같지만 그 기준에 따라 살아간다. 세상 사람들은 삶의 기준이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준은 동일해야 한다. 아니 이미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준은 정해져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준은 하나님 말씀이다. 하나님 말씀이 기준이라면 하나님 말씀을 먼저 알아야 한다. 기준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그 기준대로 살 것 아닌가. 대한민국은 법치국가이다. 법을 어기면 처벌을 받는다. 고로 법을 어기지 않기 위해서는 법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내가 몰라서 법을 어긴 것도 내가 책임져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알기 위해서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읽어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 체면 세워드리기
저에게는 캐나다 유학 중인 늦둥이 딸아이가 있습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캐나다 유학길에 올라 어느덧 졸업반입니다. 딸 아이가 다니는 대학은 캐나다 사립대학인데 1년 3학기 쿼터제 학사일정으로 1년에 3번 등록금을 납부해야 합니다. 4개월에 한 번씩 등록금 고지가 옵니다. 어떻게 보면 참 가관입니다. 소위 말하는 등골 브레이커입니다. 한 학기 등록금에 1,400만 원이 들어갑니다. 요즘 환율과 금리가 올라서 4개월마다 1,500만 원의 비용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딸아이의 등록금 청구는 당당하고 간단명료합니다.
“아빠! 이달 20일까지 1,500만 원 대학 등록금계좌로 돈 보내! 알았지?”
마치 내게 맡겨놓았던 돈을 돌려달라고 하는 느낌입니다.
딸아이가 아버지에 대해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이 아버지의 능력을 인정하며 아비의 체면을 세워주는 것입니다. 자식이 아비에게 당당하고 당연하게 요구하는 것은 자식의 권리이고, 이를 들어주어야 하는 것은 부모의 의무이고 도리이며, 부모의 흐뭇한 열심이며 보람입니다. 부모가 등록금을 마련해줄 형편이 안 된다는 것을 안다면 아예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할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부모님 전상서. 부모님, 기체후 일양만강하옵시고 평안하옵신지요? 두 분 모두 건강하옵시고 댁내 두루 평안하옵신지요? 가을 환절기 일교차가 심한 계절이온데 건강에 유의하시옵소서. 다름이 아니옵고 이번에도 등록금이 고지되었사옵나이다. 경황이 없으시고 버겁고 힘드신지 아오나 부모님께서 또 한 번 힘써주시기를 앙망하옵나이다.”
많이 들어본 문장이지요?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방식입니다. 자녀로서 아버지에게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웃의 친척 어르신에게 미사여구를 사용하여 말을 빙빙 돌리면서 중언부언하며 되면 좋고 안 되어도 그만이라는, 그저 선처와 처분만을 기다리는 넋두리입니다. 이런 편지나 문자를 받는다면 부모의 심경이 어떠할까요?
‘이 녀석이 나를 무척 존경하며 어려워하는구나.’ 하며 기뻐할까요? 아니면 ‘내가 자식을 너무 어렵고 인색하게 대했나보구나.’ 하며 탄식하게 될까요?
고아원에서 지내던 한 청년이 친부모의 집요한 수소문과 여러 곳의 탐색을 통해 친부모의 가정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물론 호적에도 자녀의 신분이 복원되었습니다. 그리고 친부모의 노력과 헌신으로 사회적 배려자 특례로 명문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에 벌어집니다. 이 청년이 대학에 가서 공부는 안 하고 매일 부모님 방 앞에 무릎 꿇고 앉아서 자신의 소소한 잘못을 매일 여러 시간 회개하며 아뢰고, 회개가 끝나면 대학에 들어가게 해주신 부모님 은혜만을 반복적으로 칭송하고 찬양하며 ‘아버지, 어머니!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을 수 있을까요?’ 하며 학교는 가지 않고 부모님을 붙잡고 늘 이렇게 허구한 날 반복되는 회개와 감사의 기도만 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 부모는 속이 타고 얼마나 힘이 들까요? 친자녀의 신분을 회복한 이 청년이 부모를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반찬투정도 하고 당당하게 용돈과 여러 필요경비를 달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안 주신다고 해도 떼를 쓰며 달라고 강청하고, 때로는 삐져서 ‘나, 밥 안 먹어!’ 하며 부모를 협박(?) 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또한 회개와 감사의 기도보다는 대학교에 다니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건강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며 자녀가 하는 일이나 업적으로 부모의 이름을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는 어떠합니까? 친부모에게 간구하는 강청의 기도입니까? 아니면 이웃의 어른에게 헛일 삼아 안 되면 말고 식의 부탁드리는 넋두리 기도인가요?
기도는 자녀가 부모에게 맡겨놓은 것을 되돌려달라고 청구하는 것이며, 때로는 간절한 심정으로 떼를 쓰며 강청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9~11).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찌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눅11:7~8).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18:3~8)
주님께서 주신 이 말씀 붙잡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하게, 하나님께 맡겨놓은 것을 되찾듯이 기도하는 믿음을 보여드려야 합니다.
‘하나님! 기체후 일양만강하옵시고’ 식의 서술 아부형 기도는 이제 그만해야 합니다. 그리고 너무 회개와 감사 일변도로 치우치는 기도도 지양해야 합니다. 자녀로서 아버지께 말씀드리면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부모와 대화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때로는 떼를 쓰며 울고, 간혹 절박한 순간에는 ‘나 밥 안 먹어! 들어주실 때까지 물 한 모금도 안 마실 거예요!’ 식의 협박(?)과 큰 소리로 울며 간구하는 강청의 기도가 사실은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의 본질입니다. 이런 강청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아버지이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이 확인됩니다. 이 모두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공로입니다. 은혜입니다.
하나님을 그저 의붓아버지로 생각하고 두렵고 어렵게 대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절대 아닙니다. 떼를 쓰고 강청하며 맡겨놓은 것을 되찾듯이 하나님께 당당하게 달라고 하는 기도가 하나님 자녀로서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을 인정하며 진정 하나님의 체면을 세워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십니다. 우리의 본분은 열심으로 살아내며 우리 삶 속에서 실력 있고 내공이 있는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이 세상 속에서 높여드리는 것이 자녀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녀된 본분에 충실한 예수중심교단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신우신경외과 재활의학과
(메디스템 줄기세포센터)
대표원장 안계훈
예수 믿으세요
목사님이 노환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목사님 병실 문밖에는 ‘면회사절’이란 글귀와 함께 ‘다만 불신 친구나 친지는 면회가능.’이라고 쓰여 있었다.
마침 예수를 믿지 않는 목사님의 친구가 면회를 왔다.
“어째서 신자에게는 사절된 면회가 불신자인 나에게는 허락되었는가?”,
“신자는 천국에 가서 다시 만나지만, 자네 같은 불신자는 만날 수 없기 때문일세. 자네, 우리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예수를 믿지 않겠나?”,
“자넬 만나기 위해, 지옥 가지 않기 위해 예수를 믿겠네.”
“그럼 됐네. 이제 나가보게. 나는 또 다시는 못 만날 사람을 만나야 하니까.”
사람이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죽은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 우리의 구원은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예수 믿으세요!
미리 준비하심
과거에 취업할 때 있었던 일이다. 대학 4학년 때 취업하고 싶은 한 회사만 놓고 담당 목사님과 함께 1년 가까이 기도했었고, 다행히 해당 회사 서류 전형에 통과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면접 심사가 남았다.
면접 당일, 세 명의 면접관이 있는 방에 5명의 응시자가 함께 들어갔다. 여러 질문과 답변이 오가다가 마지막쯤 나온 한 질문을 듣고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바로 술 잘 먹냐는 질문이었다. 제조업 분야라 회사 생활을 위해선 필요하다면서 말이다. 당연히 나는 성령 받은 후부터 술을 완전히 끊은 상태였다.
내 옆 다른 응시생들은 다 잘 마신다고 했다. 내 차례가 오기 전, 그 짧은 시간에 머릿속에서 여러 생각들이 오고 갔다.
‘그들이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나도 잘 마신다고 할까?’ 하는 생각과 떨어질 때 떨어지더라도 그냥 정직하게 이야기하자는 두 가지 생각 중 고민하다가 결국 교회 다닌 후에 술을 다 끊었다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면접관들의 이상한 반응이 나타났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 대체 왜 그러냐며 면접관들 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가? 성경에 그런 얘기가 어디 있냐며 등등 말이다. 들어보니 면접관 한 분이 독실한 신자였고 기분 나쁘지 않게 서로 타박하며 웃으며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면접은 끝났고 술 문제 때문에 떨어지는 건 아닌가 걱정했으나 결국 합격했다. 그리고 나는 그 독실한 면접관이 담당하고 계신 부서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그분을 통해 회사 신우회도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내가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그분을 면접관으로 미리 예비하셨고, 내가 솔직히 하나님을 인정했을 때 그걸 보시고 합격시켜주신 것이라 확신한다. 늘 더 좋은 걸 예비하시는 참 좋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장명훈 집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