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라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라
배우나 대중가수, 스포츠 스타들이 좋은 작품이나 우수한 경기 결과를 통해 얻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국위선양, 마을의 자랑, 가문의 영광도 될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일이 자기 자신에게 영광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은 자기의 영광이 아닌, 그 일을 맡기신 하나님의 영광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며, 당신의 영광을 다른 사람이나 우상에게 주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신4:24, 사42:8).
성경에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자기 영광을 구하다 비참한 종말을 맞이한 자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사무엘상 15장에 사울 왕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을 책망하러 온 사무엘 앞에서 핑계와 변명에 급급한 것도 모자라 백성들 앞에서 자신을 높이고 체면을 세워달라고 졸랐다. 하나님은 그를 왕 삼은 것을 후회하셨고, 그의 왕좌를 빼앗아 범사에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다윗에게 주셨다. 사도행전 12장에는 유대의 왕 헤롯이 백성들 앞에서 연설하는 것을 백성들이 듣고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신의 소리와 같다.”고 칭송했다. 그런데 막상 그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자 즉시 주의 사자가 그를 쳐서 죽고 만다.
어떻게 하면 영광을 내가 아닌 하나님께 돌릴 수 있을까? 먼저 준비하는 과정부터 달라야 한다. 세상일은 연습과 훈련을 반복해서 잘 준비하면 그만이겠지만, 하나님 일은 거기에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하심을 구하는 기도가 수반되어야 한다. 목사님께서 한 번의 설교를 위해 6~7시간씩 기도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다. 또한 그 일로 인해 나의 명성이 높아질지라도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사용해야 한다. 세계적인 부흥사이기도 하신 목사님께서 기도원에 미리 만들어놓으신 묘비에는 ‘예수의 종 이초석’ 외에 다른 수식어가 없다. 일평생 죽을 때까지 주인 되신 예수님 뜻대로 살다 가겠다는 목사님의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똑같이 봉사하고 헌신해도 자기 영광을 구하는 자와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의 결국은 다르다(요7:18).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 나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가 되자.
소망이 주는 힘
추석을 전후로 연이어 태풍 소식이다. 한반도를 할퀴고 간 힌남노로 피해가 엄청나다. 그중 극적으로 생존한 소식도 접했다. 14시간 동안 침수된 지하 주차장 천장의 배관을 붙잡고 버텨야만 했던, 생존을 위한 힘겨웠던 사투의 이야기다. 그 두려웠을 고통의 시간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생을 포기하고도 싶었지만, 아이들을 생각하며 버텼다고 한다. 누구도 도울 이 없는 극한의 환경 속에서도 작은 소망이 생존의 끈이 된 것이다. 눈으로 보여지는 확증이 있으면 누구나 안심하겠지만, 보이지 않는 소망을 바라야만 하는 것은 참으로 힘겨운 일이다. 인내하고 버텨야 할 과정으로서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리라.
하나님께서 영원한 가치로 우리에게 주신 세 가지 덕목이 있다. 믿음, 소망, 사랑인데, 그중에서 어찌 보면 소망은 제일 비인기 종목이다. 보통 신앙생활의 제일 가치로서 믿음을 든다. 믿음이 있어야 구원받고, 천국 가고, 상 받고, 열매 맺는다 한다. 믿음 여부가 인간의 공로와 직결되는 것 같기에 드러내 놓고 자랑할 만도 하다. 또한 신앙의 완성이요 결론으로서 셋 중에 제일인 사랑을 많이 강조한다. 사랑이 전부라 하기에, 사랑의 덕목을 풍성히 지니면 왠지 성인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소망은 왠지 우리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듯하다. 어떤 소망을 가졌다고 하면 아직은 자랑할 일이 못 된다. 과정 중에 있기에 드러낼 열매도 없다. 사실, 믿음은 내 안에서 본질적으로 나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하나님이 아니면 아가페 사랑도 불가능하다. 사실 본래적으로 내 것은 없다.
그런데 어찌 보면 우리 삶의 태도를 바꾸는 건 소망이다. 소망이란 다가올 미래의 일을 현재로 끌고 들어와서, 현재 내 삶의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소망 때문에 미래를 앞당겨 살았던 아브라함, 요셉은 가나안 땅에 매장지를 사고 유골을 묻었다. 지금은 부재하신 예수를 소망하는 삶은, 우리를 천국이라는 미래로 이끄는 원동력이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8:24~25).
송직화 목사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
대학교 복학을 앞두고 스물네 살이 된 저는 마음이 괴롭고 불안했습니다. 1년간 손 놓았던 전공 공부를 잘 해낼 수 있을지, 후배들과 함께하는 학과 생활을 잘 적응할 수 있을지, 이듬해 취업 준비를 잘 할 수 있을지, 모든 게 막막하게 다가왔죠. 10대 때 상상했던 스물네 살의 저는 좀 더 어른스럽고 프로페셔널한 모습이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고, 불안정하고 어설픈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30대가 돼서도 지금 모습과 같다면 싫을 것 같았죠. 그때 저는 일기장을 펼치고 제가 바라는 30대의 모습을 하나하나 적어 내려갔습니다.
30대의 나는, 1. OO광고회사에 다닌다. 2. 옳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 주저 없이 말하는 사람이다. 3. 프리랜서로 종종 글을 쓴다. 4. 맡은 일을 잘 처리해 어딜 가나 사랑받고 인정받는다. 5. 바빠도 친구들은 한 달에 한 번씩 만난다. 6. 학자금 대출을 전부 갚고 주택 자금을 알뜰히 모은다. 7. 내가 번 돈으로 독립해서 생활하며 부모님께 용돈을 드린다. 8. 영어와 일본어 회화가 가능하다. 9. 인도, 네팔, 필리핀, 일본, 미국, 유럽, 멕시코, 아프리카 등을 두루 여행한다. 10. 나의 재능으로 교회에 봉사한다. 11. 온유하고 긍정적이며 좋은 언어만 사용한다.
뒤이어 이렇게 썼습니다. “하루아침에 이런 사람으로 변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오늘도, 내일도, 내일모레도 최선을 다해 살아야겠다. 지금의 내가 미래의 나를 만들 수 있다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일기장 귀퉁이에는 ‘30대 때 읽어보기’라고 표시까지 해두었죠.
당시 저는 위에 쓴 11가지 중 단 한 가지에도 속한 게 없었기에 제 손으로 일기를 쓰는 와중에도 과연 내가 이렇게 될 수 있을까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바라는 것을 적었을 뿐이었죠. 두 달 뒤 복학을 했고, 전공과 부전공 공부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들었습니다. 자주 좌절했고 가끔 뿌듯해하며, 도망치지 않고 주어진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갈 뿐이었죠.
서른 중반이 넘은 어느 날, 지난 일기장을 뒤적이다가 ‘30대 때 읽어보기’라고 쓴 일기를 읽고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불가능하다고 느꼈던 모든 게 현실이 되어 있었고, 스물네 살의 제가 꿈꿨던 모습보다 훨씬 나은 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라던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에세이 책을 썼으며, 교회 신문에 글 쓰는 봉사를 하고 여러 나라를 여행했죠. 학자금 대출을 갚았고 넉넉히 벌면서 내 집 마련을 위해 종잣돈을 모으고 있고요. 그런데 사실, 이 모든 게 하루아침에 이뤄지진 않았습니다.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이 걸렸죠. 그리고 여전히 노력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얼마 전, 20대 초반의 청년들과 예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20대라는 것만으로도 정말 아름답게 빛나더라고요. 한편으로는 불확실한 미래가 불안할 수 있는 나이겠구나 싶었습니다. 저의 20대가 그랬던 것처럼요. 그 친구들에게 얘기해주고 싶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30대의 모습을 일기장에 적어보라고요. 미래의 나에게 편지를 보내보라고요. 지금은 그것이 불가능하게 보이겠지만, 분명 원하는 대로 될 테니까 자신을 믿어보라고요. 너에겐 너의 미래를 원하는 대로 만들 능력이 있다고요. 물론 하루아침에 되진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섣불리 포기하지 말고, 주어진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가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이 오래 참음으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을 모두 받아 누렸던 것처럼, 우리도 그러자고요. 마음 깊이 응원합니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히브리서 6장 11~12절).
신은혜
happy_holly@naver.com
삶을 대하는 태도
가끔, 기독교인과 아닌 사람과의 차이점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마치 하나님의 영광을 감추어 버리는 세상의 풍습과 관례의 수건을 목에 걸고 있다가 필요할 때 그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보인다. 고백하건대 나 역시 그럴 때가 있다. 성경 말씀을 의지해서 산다는 말, 성경 말씀을 따라서 산다는 그리스도인, 그 삶은 도대체 어떤 삶일까?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고 세상의 사물일랑 잊어버리기 원하신다. 진리가 실제 생활에 들어오면, 생활의 표준은 성경의 요구에 따라서 더욱 높이 향상되기 때문에, 세상의 유행, 풍습, 관례, 처세술 등과 불가불 반대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세상은 바다의 파도와 같이 우리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온유하심과 은총의 참된 원칙에서 떠나도록 계속 잡아당기고 있다. 이런 상황에 우리는 바위와 같이 성경 말씀의 원칙에 확고히 서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도덕적인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는 종종 현재 자기가 겪는 고통이나 실패의 원인을 다른 사람이나 상황에 돌리는 태도를 취할 때가 있다. “아무개 때문에 내가 이 고생이지,” “그 일만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운이 좀 더 따라줬더라면.” 등등, 자기 외의 대상을 탓하며 자기를 정당화하고 책임을 다른 곳으로 전가하며 합리화한다. 이런 태도는 결국 자기 자신을 원망과 분노의 감옥에 가두는 것과 같다. 또한 갈수록 이웃(혹은 가족이나 친구)과의 관계는 단절되고, 결국 자기 자신을 고립시키게 될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복된 삶을 살기 원한다면, 다른 사람이나 외적인 조건이 바뀌기를 바라기 이전에 나 자신이 삶을 대하는 태도부터 바꿔야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전에 나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가?’이다. 자기에게 정말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나길 바란다면, 남을 탓하는 시간에 자신의 내일을 위해서 노력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 노력은 물론 스스로 최선을 다하는 일 위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일이 더해지는 것이라 본다.
신앙인으로서 세상을 대하는 태도, 자기 삶을 대하는 태도를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꾸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응하고자 한다면 자신의 노력과 의지, 계획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굳게 붙들어야 한다. 우리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은혜에 은혜를 더하면서 계속 위를 바라보고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배가 옛 항구를 떠나 희망의 나라를 향해 가려면 옛 항구에 자신을 묶어놓았던 닻을 올려야 한다. 그런데 다른 무언가를 탓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일은 자신을 과거에 얽어매는 어리석은 태도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환경이라도 초월하여 자신이 가진 정체성을 새롭게 하고, 무엇인가를 결정하고 살아갈 때 어떤 상황에서도 정직하고 당당할 수 있을 것이고, 세상의 관습을 거절하고 예수님의 방법을 선택할 줄 아는 주의 백성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Dr. 권정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