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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7호 목차 › Text 주일설교

내 재능을 찾아서 계발하라(고전12:12~31)

1147호 · 2022-05-01

상록수는 사시사철 푸르지요? 은행나무는 노랗고요. 왜 그러냐고요? 하나님이 원래 그렇게 만들어서 그렇습니다. 만물만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도 다 쓰임에 맞게 만드셨습니다. 그분은 흙을 빚어 우리를 만드신 토기장이시거든요(사64:8).

목회 전에 이천으로 그릇을 만들러 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흙을 떼기 전에 꼭 생각하는 것이 ‘어디에 쓸 것인가’ 하는 겁니다. 그것을 정하고서야 그 쓰임에 맞게 크기나 모양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만드실 때 ‘어디에 쓸까?’ 곰곰이 생각하시고 쓰임에 맞게 우리를 빚으셨답니다. 누구는 신경 써서 만들고, 누구는 대충 만들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제 말이 아닙니다. 잠언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잠16:4).

그런데 인생의 불행이 어디서부터 오는 줄 압니까? 바로 남의 것을 샘내고 탐내는 것에서부터입니다. 상록수는 사시사철 푸르면 되는데, 그게 멋있는 건데 괜히 노란 은행나무를 샘내서 ‘나도 노랗게 되리라’ 하고 노래지면 주인은 노르끼리한 상록수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잘라버립니다. 아침마다 닭이 지붕에 올라가 주인의 아침을 깨우니까 개도 ‘나도 그래 보리라’ 하고 지붕에 올라가서 둔탁한 소리로 울다가 보신탕 신세가 되어 버린 이야기도 기억하시죠?

여러분, 내가 좋아하는 게 있습니다. 내가 잘하는 게 있습니다. 그게 달란트요, 재능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겁니다. 그걸 하면 됩니다. 그걸 노력해서 더 잘하면 인생이 재미있고, 신나고, 성과도 크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것을 시원찮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만드실 때는 신경을 안 썼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토기장이에게 힐문하고 불평하지요. ‘왜 나는 이렇게 만들었냐? 왜 나에게는 재능을 안 줬냐?, 저 사람은 저렇게 멋진 걸 주셨는데, 난 겨우 이거냐?’ 합니다. 이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롬9:20).

여러분, 이 세상을 하나의 오케스트라라고 생각해봅시다. 다 바이올리니스트면 그게 오케스트라입니까? 다 첼로만 하면요? 아닙니다. 플롯도 있고, 트럼펫도 있는 겁니다. ‘왜 하필 나는 심벌즈냐고요?’ 하시는 분들, 심벌즈가 연주 중 한 번 밖에 안쳐도 그걸 쳐줘야 음악이 클라이맥스에 도달하는 것 아닙니까? 심벌즈 친다고 오케스트라 단원이 아닙니까? 똑같은 단원인 겁니다. 제때 심벌즈 한 번 치면 연주를 같이한 것입니다. 다 포클레인이면 작은 화단은 뭐로 가꿉니까? 밭고랑은 뭐로 팝니까?

마태복음 25장에 한 달란트 받은 자가 화를 당한 것이 다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저 사람은 다섯 달란트가 있으니 뭘 해도 되지. 저 사람은 그래도 두 달란트를 받았으니 가능성이 있지. 나는 겨우 한 달란트야. 이걸로 뭘 할 수 있겠어?’ 한 겁니다. 그래서 땅에 묻어둔 겁니다. 주인이 그의 항의가 합당하다고 했습니까? No! 화를 버럭 냈고, 어둠으로 내쫓아버렸습니다. 왜요? 한 달란트로도 충분히 이익을 남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화를 낸 것은 다섯 달란트를 못 남겨서가 아니라 불평만 하고 자기 것을 찾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고전12:29~30)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가 아니고 선지자가 아니고 교사가 아니더라도 교회 안에서 해야 할 일은 많습니다. 아니, 사도는 못할 일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하는 자들이 많지 않습니까. 꽃꽂이를 하는 일, 헌금위원, 안내위원, 성가대 등등…. 그래야 교회가 조화롭게 돌아갑니다. 내가 가진 것으로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겁니다. 서울의 대형교회 목사님보다 몇 명 안 되는 작은 시골교회 목사님이 더 상이 많을 수 있습니다. 저를 운전해주는 두 집사가 저와 같은 상을 받을 수 있다니까요.

여러분, 핸들과 타이어, 백미러…, 그 기능이 다르고 하는 일도 다르지만 다 자동차입니다. 어느 것 하나 불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눈과 코, 귀, 입, 팔, 다리, 모두 생김새도 다르고 하는 일도 다르지만,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고, 그것이 다 나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대통령일 수 없고, 다 사장일 수 없고, 다 목사일 수 없습니다. 정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업하는 사람도 있고,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술 습득에 능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렇게 생긴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저렇게 생긴 사람이 있습니다. 연장에도 기능이 다르듯, 달란트가 각각 다른 것뿐이지 귀하지 않은 사람도, 귀하지 않은 달란트도 없습니다.

춘향이로 태어나야지, 억지 춘향은 힘든 겁니다. 부모님들 잘 들으세요. 억지로 애들 의사 만들려고 하고, 억지로 검사 만들려고 하면 그 자식 인생 죽이는 겁니다. 평양감사도 저가 싫으면 못하는 것 아닙니까? 적성에 맞는 걸 시켜야지요. 이 비유 한 번 들어보실래요? 사사기 9장에 나오는 비유입니다. 하루는 나무들이 왕을 뽑으려고 했습니다. 먼저 감람나무가 천거되었으나 그는 거절했습니다. 이유인즉 기름 짜는 일이 자기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무화과나무도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이를 고사했고, 포도나무도 자기 일이 있기에 거절했습니다. 그들은 내 것이 아닌 것을 탐하면 요동한다고 했습니다. 곧 휘둘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것이 뭔지도 모르는 가시나무가 왕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그 나라가 제대로 섰을까요? 자기 것이 아닌데요.

사울을 보세요. 하나님이 사울의 겸손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지혜를 보시고 그를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사울이 자기에게 있는 것을 잘 발전시켜 나갔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는 다윗을 바라봤습니다. 다윗의 용맹함을 자신과 견주었고, 다윗의 것을 탐했습니다. 탐내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이라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자고로 지나친 욕심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에 이르는 법(약1:15), 토기장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 토기를 아껴보지 않고 망치로 깨버리듯, 하나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울을 깨트리셨습니다.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렘18:6).

여러분, 70이 넘게 살아봐도 감나무가 사과나무 되는 것 못 봤습니다. 남자가 여자 안 됩디다. 토기장이인 하나님이 애초에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괜히 뱁새가 황새 쫓아가려고 하니까 가랑이가 찢어지는 것이고, 송충이는 갈잎을 먹으니까 배탈이 나는 겁니다. 뱁새로 태어났으면 뱁새로 멋지게 살면 됩니다. 누가 황새가 뱁새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합디까? 큰 그릇이 늘 좋은 것이 아닙니다. 금 그릇이라고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비록 종지라도 내 것에 만족하고 깨끗할 때 매일 주인 밥상에 오를 수 있는 겁니다.

제아무리 명품신발이래도 안 맞으면 발이 까지고 온몸이 아픕디다. 값싼 운동화라도 내 발에 맞아야 편하지요. 남이 볼 때 좀 하찮은 일 같아도 내가 편하고 좋으면 그것이 명품이요, 그것이 행복인 겁니다. 당신의 인생이 고름이 나고 물집이 잡혀 아픈 것은 당신에게 맞지 않는 길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보물찾기입니다. 이 보물찾기 중에 가장 먼저 찾아야 할 것은 내 달란트, 내 적성입니다. 그걸 찾아 계발하고 집중할 때 그 분야에 최고가 되고, 신바람 나는 인생이 되는 겁니다. 제가 ‘다시 태어나는 세상이 있다고 해도 나는 목사할 거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것이 제게 꼭 맞기 때문입니다. 같은 씨를 심어도 토양이 맞으면 훨씬 잘 자라는 법이니까요.

당신의 달란트를 찾으세요. 없다고요?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를 주셨는데 왜 없겠습니까. 찾으면 찾을 것입니다. 그것을 찾아 계발하면 당신 삶이 향상되고, 행복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남의 떡이 커보이고

남의 잔디가 푸르러 보인다

내 것을 찾아야

신바람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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