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면 늦으리
내일이면 늦으리
언젠가 인터넷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이 길을 지나가는데 이발소 간판에 ‘내일은 공짜!’라는 글을 보았다. 너무 놀라서 몇 번이고 눈을 의심하며 다시 보고 다시 봐도 ‘내일은 꽁짜!’ 얼마나 놀라운 안내 간판인가. 그 간판을 보고 다음날 룰루랄라 하며 이발소를 찾아 이발을 다하고 황당한 경우를 맞게 되었다. 이발 비용으로 10불을 내라는 것이다. 너무 어이없어서 ‘어제 분명히 밖에 있는 안내 간판을 보고 왔노라’며 화를 냈다. 이발소 주인이 다시 밖에 나가 보라고 했다. 여전히 그 간판은 서 있었다. ‘내일은 공짜.’ 그러고 보니 그 옆에 보일 듯 안보일 듯 쓰여 있는 가격표도 있었다. “오늘은 10불!” 실제로 이렇게 비즈니스를 했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지만, 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내일을 헛되이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4).
세 가지 중요한 ‘금’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황금, 소금, 지금이다. 그중에 무엇이 가장 가치 있겠는가? “뭐니 뭐니 해도 머니가 최고지.” 하면서 황금이 최고라고 꼽을 사람이 적지는 않겠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지금이 가장 가치 있다. 지금(present)은 최상의 선물(present)이다. 성경의 선언이 그것을 분명하게 해준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여리고 성에 소경 거지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바디매오다. 그는 오늘이라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날 그는 사람들이 지나가며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고. 그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소리쳤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방해도, 어떤 장애물도 오늘이라는 기회를 붙잡으려는 바디매오를 막을 수 없었다. 예수님은 그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물으셨고 고쳐주셨다.
다 똑같이 24시간이라는 놀라운 기회를 담은 오늘을 사는데 그것을 매일 놓치고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우리가 듣지 말아야 할 말이 있다. “내일 해도 되잖아?”, “나중에 해도 돼!” 오늘을 막는 장애물 앞에 바디매오처럼 더욱 전투력을 가지고 해보자. 후회하지 않도록. 오늘은 사용해야 오늘이다. 그렇다! 오늘이다. 내일이면 늦으리.
이정금 전도사
jungkm@nate.com
갈등의 역설적 기능
K-뮤직, K-드라마가 전 세계에 한류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어찌 이리 뛰어난지, 무슨 원인이 있는지, 어느 평론가가 말했다. 한국사회의 갈등상황 때문에 우리 민족이 뛰어난 문화적 깊이를 갖추게 되었다고. 빈부 간의 갈등, 진보와 보수, 사회 구성원끼리의 갈등 등, 다른 나라의 국민보다 훨씬 많은 갈등상황에 부대끼고 산다. 모르는 사람을 보면 ‘하이’로 눈인사하는 외국의 분위기가 우리나라에는 없다. 눈을 쳐다보면 째려본다고 시비가 벌어지고, 청소년 시절엔 ‘눈깔아!’라며 윽박지른다. 서로가 적대적이고 경쟁적이다. 그래서 그런 갈등 속에서 내면이 깊어진다는 역설이다. 소설의 깊이는 작가의 인생이 어땠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치열한 삶과 고통과 문제의식이 뛰어난 작품을 만들게 한다. 시련과 환난, 갈등이 깊이 있는 소설가, 음악가를 만들어낸다. 연마되고 다듬어지는 고통이 그런 순기능을 이뤄낸다.
내게도 시련이, 고난이 나를 바닥으로 밀어 내렸고, 그때에 주님이 찾아오셨다. 그래서 고난이 유익이라. 시련과 환난에 굴복하면 깊은 상처만 남게 되지만, 극복했을 때는 더욱 영적으로 깊어지고 강해진다. 항상 피할 길을 내어주시고 감당할만한 시험만을 허락하신다.
역경에 처한 자, 갈등 속에 있는 자, 삶에 찌들고 괴로운 자여, 모든 시험과 환난은 당신을 정금 같이 만드는 주님의 선하신 계획이다. 지지 말고 낙담 속에 절망하지 마라. 반드시 역전의 기회를 주신다. 그래서 인내가 성령의 귀한 열매라고 하는 것이다.
암 환자들 중 많은 경우는 두려움 때문에 상황이 악화된다. 식욕이 없어져 영양실조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많다. 암 때문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이다. 내 가장 큰 간증은 힘든 세월 속에서도 두려움보다 감사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역사하셨다는 사실이다. 주님은 역전의 명수시고 역설을 강조하셨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하셨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하셨다.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 하셨다. 갈등과 시련, 고통이 너를 더욱더 주께로 나아가게 한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주님은 항상 더 좋은 것을 예비하신다. 이것을 믿어야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믿는 것이다. 승리하시라, 모두! 예비된 영광을 위해. 할렐루야!
이광주 목사
개보다 못해서야
1930년대 일본에서 있었던 일이다.
동경 제대 농학부에 재직 중인 우에노 교수는 순종 아키다라는 개 한 마리를 길렀는데, 이 개는 영특함이 남다른 데다 또한 유난히 교수를 잘 따르기로 유명하였다고 한다. 교수는 아키다 현에 살기 때문에 동경 제대까지 출퇴근을 하려면 매일 시부야 역에서 동경까지 기차로 오가야 했는데, 이 개는 매일 아침과 저녁, 시부야 역까지 교수의 출퇴근길을 함께하였다. 아침에는 배웅을 나가고 저녁에는 마중을 나오는 개의 모습이 너무도 영특한지라 아키다 현에서 이 개는 꽤나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수업 중이던 우에노 교수는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져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주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개는 그날도 어김없이 시부야 역으로 교수를 마중 나간다. 하지만 주인은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개는 다음 날도 나가서 교수를 기다린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렇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같이 시부야 역으로 마중 나가서는 미동도 하지 않고 교수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무려 10년 동안…. 10년이라는 세월의 흐름에 결국 개도 기력이 쇠하여 죽음을 맞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그 충직한 개를 기리기 위하여 동상을 만들어 주었고, 지금도 일본에 가면 그 동상을 볼 수 있다. 또한 이 이야기는 ‘하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소설, 영화, 드라마로 제작되어 큰 감동을 주었다.
사람이 개만도 못해서야 되겠는가!
충성(忠誠), 가운데 중(中)에 마음 심(心)이 합해진 것이 충(忠)이니 곧 진심과 정성이요, 말씀 언 (言)에 이룰 성(成)이 만나 성
(誠)이니 역시 곧 진심과 정성을 뜻한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진심과 정성을 다하는 자가 되자.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마24:45)라는 말씀을 읽을 때마다 “나요!”라고 외치는 목사님을 닮아보자.
NFT를 아시나요?
종종 뉴스기사를 보다보면 ‘NFT’라는 단어를 보게 됩니다. NFT는 ‘대체불가능한 토큰(Non-Fungible Token)’이라는 단어로 디지털 자산에 고유한 인식값을 부여하여 대체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암호화폐를 의미합니다.
요즘은 이 NFT를 활용하여 다양한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만한 시대입니다. 그러나 NFT가 쉽게 이해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가 쉽게 미술작품을 예를 들어 설명해보겠습니다. 미술작품은 누구나 만들 수 있고 누구나 구매할 수 있습니다. 각각의 가치는 천차만별로 어떤 작품은 몇 백억 원의 가치가 있는 반면, 어떤 작품은 작품이라고 하기에도 보잘 것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100억 원의 가치가 있는 작품을 누군가 똑같이 복제한다면 그 작품은 가치가 떨어질 수도 있고, 복제품이라는 오해를 살 수도 있습니다. 특히 디지털사회에서 미술작품 복제는 너무나 쉬운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복제한 시간, 예를 들어 3월 7일 오후 4시 11분이라고 고유한 특성을 추가한다면, 그 이후에 복제한 작품과는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시간은 절대로 이전시간으로 흐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NFT에서도 해당 작품이 생성된 시간을 고유한 특성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제가 NFT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우리의 신앙이 이것과 아주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굉장히 성장해 있을 수도 있고, 또 한없이 작을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의 신앙을 본받고 따라갈 수도 있고요. 또 마귀가 믿음이 지친 틈을 타서 훔쳐갈 수도 있습니다. NFT와 닮은 점은 우리 믿음의 체험은 하나님과 나와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대체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오랜 시간동안의 기도로 소망을 이룬 그 기적 같은 일은 그 누구의 경험이나 논리로 대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과의 NFT를 잘 투자한 투자자였습니다. 히스기야가 죽을병에 걸렸을 때, 히스기야는 “제가 주앞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해주세요.”(왕하20:3)라고 기도했고, 병도 회복하고 15년이나 그 생명을 연장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기적의 체험을 하게 되면 영원히 대체 불가능한 우리 믿음의 자산이 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처럼 우리 예수중심 성도님들도 하나님과의 대체 불가능한 믿음의 자산을 많이 만드셔서 영원한 천국의 안식으로 ‘떡상’하시길 바랍니다.
김대화
감사
며칠 전에 ‘기적을 만드는 감사메모’란 책을 읽고 크나큰 공감과 감동을 받았다.
삶에 불평이 가득했던 여성이 자기계발서를 1만 권 이상 읽고 하나같이 책에서 빠지지 않고 강조하는 것이 감사라는 걸 발견하고, 감사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감사를 해야 함을 깨닫고 주변의 사소한 것부터 감사를 실천하니 그녀의 삶은 몰라보게 긍정적으로 바뀌었으며, 이를 계기로 감사메모를 전 세계에 전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폭발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나는 딸에게 음식 주문전화가 오면 꼭 ‘감사합니다.’로 답례인사를 하게 했고, 배달기사님들에게도 같은 분이 10번 픽업하러 와도 10번 모두 ‘감사합니다.’ 하라고 교육시켰다. 딸아이는 “우리가 그분들 돈을 벌게 해주니까 그분들이 우리에게 감사를 해야지, 왜 우리가 감사해야 하죠?”라며 처음에는 의문을 제시했지만, 내가 솔선수범을 보이자 어느새 ‘감사합니다.’로 자동전환 되어있음을 흐뭇하게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요즘 하루 중 내가 쓰는 언어 가운데 ‘감사합니다.’가 단연코 많았다. 위기 속에서도 연약함이 강함이 되어 감사라는 정금을 얻었음에 감사드린다.
이유 없이 감사해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감사를 해보자. 행복감과 웰빙지수가 높아지고 나 자신에게 평화가 몰려옴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오늘도 나는 감사로 일과를 시작한다.
‘오늘도 무사히 일어나서, 살아있어서 감사합니다.’, ‘내 몸의 세포 기관들에게 감사하고 건강 주심을 감사합니다.’, ‘비가 촉촉하게 내려 감사합니다.’, ‘좋게 느껴지는 것, 싫게 느껴지는 것, 모두 감사합니다.’, ‘이 글을 쓰게 해주신 하나님과 목사님께 감사합니다.’, ‘예수님을 믿게 해주신 은혜에 무한 감사합니다.’
추성숙 집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