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신다는 믿음으로 살았다
왜 안내위원들이 주일 꼭두새벽부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더우나 추우나 상관없이 나와서 안내를 설까요? 왜 성가대원들이 일주일에 하루 쉬는데 온종일 연습하고 봉사할까요? 왜 어린아이들의 온갖 투정도 다 받아주며 주일학교 교사들이 아이들과 뒹굴며 힘들게 예배드릴까요? 그들에게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히11:6)는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왜 생명보다 귀하다는 물질인데 월급을 받건, 사업을 하건 매달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릴까요? 왜 기다리고 기다리던 첫 번째 수입을 아낌없이 다 하나님께 드릴까요? 왜 주일과 수요예배 때마다 감사예물을 드리고, 서원예물도 드릴까요? 그들에게도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10)는 말씀과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6~7)는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왜 많은 성도들이 아프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으면 목사님께 와서 안수를 받을까요? 바로 그들에게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16:17~18),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5:16)는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왜 성도들이 좋은 것이 있으면 주의 종에게 먼저 대접할까요? 그들에게도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마10:40)는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매일 기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힘든데 왜 그럴까요? 그들도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는 말씀을 믿기에 매일 기도하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과 행함은 동반자요, 바늘과 실과 같은 유기적인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말씀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 뜻대로 행하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말이요,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믿음이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분명히 보입니다. 어떻게요? 그 사람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행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그 믿음이 없었다면 환난과 핍박의 폭풍에 휘말려서 벌써 이초석이란 존재는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약속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었기에 물 없는 사막과 같고, 눈 덮인 산야와 같은 모진 세월을 초연하게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또 제가 외국에 나가서 “오늘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으면 나는 가짜 목사요!”라고 당당히 외치는 것도, 귀머거리나 소경, 앉은뱅이 등 각색 병을 앓는 자에게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가라!”고 명령하는 것도 다 하나님 말씀을, 능치 못하심이 없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가기가 힘듭니까? 헌금하는 것이 아깝습니까? 봉사는 꿈도 못 꿉니까? ‘안수는 뭐 하러 받나?’ 생각하십니까? ‘천국이 있는 것은 죽어봐야 알지!’ 하십니까? 그것은 당신이 믿음이 없기 때문이고, 믿음이 없기에 언감생심 행동은 생각도 못하는 겁니다. 야고보 선지자는 그런 당신을 두고 이렇게 한탄합니다. “하나님은 한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약2:19~20).
물론 행함만으로 구원 받을 수는 없습니다(롬3:20). 그러나 행함이 동반된 믿음이 있을 때 그것이 신실한 믿음이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리는 행동을 보고 나서야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 하셨고,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창22:16~18)라고 축복하셨습니다. 왜 축복하셨다고요?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창22:18), 즉 행동으로 옮겼기 때문에 축복하신 것입니다. 야고보서에도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2: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곧 믿음을 행함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에 의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2:24).
소경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눈을 뜰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믿음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행동으로 나타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에 주위에서 뭐라고 하든지 예수를 목청껏 불러 소원을 이뤘습니다(막10:46~52). 수로보니게 여인도 예수님만이 자신의 딸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예수님을 찾아간 것입니다. 예수님께 개 취급을 받는 테스트를 받고도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에 치욕을 참아내고 딸의 병을 고침 받은 것입니다(막7:25~30).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도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고침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군중 틈을 뚫고 들어간 것이고(마9), 예수님을 만나면 중풍병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 네 친구로 하여금 지붕을 뚫게 한 것입니다(막2:1~5).
여호수아 2장에는 라합이라는 기생이 나옵니다. 라합도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미 그녀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수2:11)라고 고백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믿음은 입술로만 한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입증되었습니다. 여호수아가 파견한 두 정탐꾼을 영접하고 안전하게 피신시켜주었기 때문입니다(약2:25). 그런 행함이 있었기에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점령했을 때 그녀와 가족들이 죽임을 면하고 구원 받은 것입니다(히11:31). 어디 그뿐입니까? 마태복음 1장에 예수님의 족보에도 그 이름이 당당히 올랐지 않습니까?
요한복음 11장에도 예수님이 죽은 오라비 때문에 낙담한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내 말을 믿거든 돌을 옮겨놓으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있거든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에 돌을 옮겨놓으니 죽은 나사로가 살아 무덤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문득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좀 오래 전의 일인데, 제게 주례를 부탁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해외집회를 나갔는데, 일정이 바뀌는 바람에 결혼식 날짜에 돌아올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행정목사에게 전화를 해서 그 청년에게 다른 목사가 대신 주례를 서면 안 되겠냐고 양해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행정목사에게 온 답변이 이랬습니다. “목사님, 그 청년이 목사님이 주례를 서주시지 않으면 결혼 안한답니다.” 그건 그 형제의 믿음이었습니다.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마10:12~13)는 말씀을 온전히 믿었기에 저에게 생떼를 쓰다시피 강청을 한 것입니다. 그런 믿음 앞에 제가 어쩌겠습니까? 모든 일정을 젖혀두고 급거 귀국했지요.
여러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행함이 없으면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행함=기적과 축복’이며,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함으로 그 믿음이 온전케 되는 것입니다(약2:22).
여러분에게 행함이 없는 것은 성격 탓이 아닙니다. 환경 탓도, 시간 탓도 아닙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스스로를 돌아보고 여러분의 믿음을 당당히 행동으로 옮기시길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부뚜막의 소금도
넣어야 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