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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을 개혁하자!

1100호 · 2021-06-06
오늘의 메시지

나 자신을 개혁하자!

“네가 안했잖아, 네가 안했잖아, 네가 안했잖아….”

근래 목사님의 강력한 메시지가 마음을 뜨겁게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마11:27).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평화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는다(사53:5). 주님의 가난함은 우리로 부요케 하심이다(고후8:9).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막9:23). 이렇듯 무수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들이 있음에도 우리는 상황이나 환경을 탓하며, 돈이 없기 때문에, 지식이 없기 때문에, 코로나 때문에 못하고 안 된다며 불평을 일삼고 아무 노력도 안 하고 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시며 ‘네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고 말씀하셨다. 복 받고 못 받는 것, 잘되고 못 되는 것, 성공과 실패,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나에게 달린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선민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백성들에게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게 하라.”고 말씀하셨다(사1:16).

그렇다. 이제 나 자신을 개혁하자! 이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라고 핑계대지 말라. 머리로는 믿어도 손이나 발로 움직이지 않으니 이기는 삶이 될 수 없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마7:7), 얼마나 많이, 얼마나 절실히 구하고 찾고 두드리냐에 따라 응답의 양과 질은 달라질 것이다.

잊지 말라! 내가 바뀌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김상욱 목사

믿음의 터를 다지며

“Are you JESUS?”

과거 신학대학원(M.div)을 같이 다니던 대학원 동기 목사님이 보내준 설교 예화입니다. 너무 감동적이고 나를 돌아보는 글이기에 소개해 올립니다.

최근에 읽었던 책 안에 이런 예화가 깊은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폴이라고 하는 한 회사원이 뉴욕에서 중요한 미팅을 마치고 자기 팀 동료와 함께 공항으로 가려고 거리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날이 금요일 오후 저녁시간이어서 교통체증이 심해 택시 잡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보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기적적으로 빈 택시 하나가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이 택시를 보는 순간 다른 동료들이 쏜살같이 달려가서 그 택시를 잡아탔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너무 빨리 달려가는 바람에 바로 길가에서 장사하고 있는 노점상의 채소와 과일 박스를 차버렸고, 과일과 야채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폴의 일행 중 어느 누구도 개의치 않고 택시를 탔습니다. 그러나 폴은 택시를 타지 않고 그 자리에 순간 멈추어 섰습니다. 택시 안의 동료들이 외쳤습니다. 빨리 타라고. 그리고 덧붙였습니다. “이 택시 타지 않으면 비행기 놓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은 먼저 가라며 일행을 떠나보냈습니다.

그러고 나서 노점상 할머니에게 다가가니 그 할머니는 울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가서 봤더니 그 할머니는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눈이 성한 사람이라면 바닥에 흩어진 과일이나 채소를 주우면 그만인데, 앞을 보지 못하는 할머니가 어떻게 그 과일과 채소를 주워 담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앉아서 울고 계신 할머니를 폴이 위로해드리면서 땅바닥에 떨어진 채소와 과일을 하나씩 줍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도 폴 곁에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갔지만 다들 자기 갈 길이 바쁜지 아무도 노점상 시각장애인 할머니의 울음과 폴의 행동에 관심도 갖지 않았습니다. 폴이 채소와 과일을 다 정돈한 후에 지갑을 꺼내 돈을 할머니 손에 쥐어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할머니, 이 돈이면 손해 보신 것 충분히 해결이 될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그 할머니가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Are you JESUS(혹시 예수님 아닌가요)?”

이 말을 듣고 몹시 당황한 폴이 “예수라니요? 나는 절대 예수가 아닙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시각장애인 할머니가 아니라면서 계속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조금 전 노점 가판대가 넘어지고 과일과 채소가 땅에 떨어질 때 제가 도움을 요청할 분은 예수님 한 분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JESUS, please come help me(예수님, 나에게 오셔서 제발 도와주세요).’ 그랬는데 기도의 응답처럼 당신이 와서 나를 도와주었으니까, You must be JESUS(당신은 예수님이 틀림없습니다).”

그날 밤 폴은 비행기를 놓치는 바람에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하룻밤을 더 뉴욕 호텔에서 머물면서 한밤중에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When was the last time someone confused me for JESUS(누군가가 나를 예수님 같다고 착각하게 했을 때가 언제였던가)?”

코로나19로 마음이 심란하고 울적한 시간입니다. 이 시간 가슴에 손을 얹고 각자 자기 자신에게 자문하듯 성찰하며 기도하고 물어보십시오.

“나는 정말 작은 예수가 맞나?”, “나의 삶의 방향과 목적은 바른가?”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돈도 나의 능력이나 나의 재능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작은 예수가 될 때만이 가능합니다.

나의 필요보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먼저 생각하고 기꺼이 양보할 수 있다면…, 만일 내가 예수님처럼 이웃을 사랑할 수만 있다면, 만일 내가 예수님처럼 나를 희생함으로 누군가를 세우고 살려줄 수만 있다면 분명 나 한 사람 때문에 이 세상은 더 아름다워질 것이 분명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10:41~42).

“When was the last time someone confused you for JESUS(누군가가 당신을 예수님 같다고 착각하게 했을 때가 언제였나요)?”

“When was the last time someone confused you for JESUS(누군가가 당신을 예수님 같다고 착각하게 했을 마지막 때가 언제였나요)?”

우리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해봐야 할 시간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가시밭의 백합화처럼 가시에 찔리면서도 예수 향기를 날리는 작은 예수가 되셔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는 예수중심교단 성도들이 되시기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Are you JESUS?”

신우신경외과 재활의학과

(메디스템 줄기세포센터)

대표원장 안계훈

두려움을 극복한 사람

두려움을 극복한 사람

중세 유럽에서 콜레라가 한참 유행할 때 한 농부가 마차를 몰고 성을 향해 가고 있는데 어느 부인이 마차를 불러 세웠습니다. 성까지 태워줄 수 없겠냐는 부탁에 착한 농부는 그 부인을 태워주고 한참을 가다보니 이상한 분위기가 감지되었는데, 그 부인이 계속 소름끼치는 묘한 웃음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농부가 부인에게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묻자. “저는 콜레라 여사입니다.”, “왜 제 마차에 타셨습니까?”, “저 성에 있는 사람을 죽이러 가기 위해서지요”, “그렇다면 부인을 태워줄 수 없으니 내리시오.”, “지금 날 태워주지 않으면 당장 당신부터 죽이겠소.”, “그렇다면 나와 한 가지 약속을 합시다. 내가 당신을 성까지 태워다줄 테니 다섯 명만 죽이시오.” 꼭 다섯 명만 죽이기로 약속을 받은 농부는 콜레라 부인을 태우고 성에 도착했는데, 놀랍게도 천명도 넘는 시체들이 즐비해있었고, 화가 난 농부는 “부인, 약속이 틀리지 않습니까? 다섯 명만 죽이기로 했는데 이 많은 시체들은 무엇이요?” 그러자 “나는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저 사람들은 뭡니까?”, “저 사람들은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지레 겁먹고 죽은 사람들입니다.”

1세기 초대교회 문서들을 살펴보면 그리스도인 이름 앞에 결코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란 뜻의 ‘티테디오스’라는 별칭이 붙어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티테디오스 바울’, ‘티테디오스 요한’처럼 초대교인들이 자신의 이름 앞에 티테디오스를 붙인 이유는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환경에서도 ‘염려에서 해방된 자’라는 것을 증거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성령이 충만했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이 고백이 지금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이름 앞에도 ‘티테디오스’를 붙이십시오. 결코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김정옥 전도사

jcc01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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