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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트라인

1094호 · 2021-04-25
겨자씨만한 믿음

커트라인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지, 그래도 결혼은 해야지, 그래도 애는 낳아야지, 그래도 자기 집은 있어야지, 내 나이가 이런데 어디서 뭘 하겠나? 그래도 내 체면이 있지!

사회적인 분위기로 인해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강요받다시피 하는 것이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남들이 다 하니까 따라하거나 그것이 선행되어야 행복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거나 자신의 체면 때문에 자신이나 누군가에게 강요하고 강요받는다.

우리나라는 어려운 시기를 겪으며 엄청난 성장을 이뤄왔고 도움을 받던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 탈바꿈했다. 짧은 기간에 이렇게 성장할 정도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밑바탕에 잠재력과 저력이 있다. 이처럼 엄청난 외적 성장을 이루었고 시민의식도 높은 수준이지만, 삶에 어떤 커트라인이 있어서 어떤 사람이 그 수준에 도달하면 ‘통과된 사람’이고, 그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루저’로 정의하는 병폐가 있다. 그 커트라인은 남을 평가하기도 하지만 또한 자기 자신을 평가할 때도 사용한다.

그러나 100억을 가진 사람이 1,000억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는 것처럼 커트라인을 정하는 것은 끝이 없다. 삶과 사람은 계속 변하기 때문이다.

이초석 목사님은 ‘행복에는 커트라인이 없다’고 자주 말씀하신다. 스스로가 행복의 커트라인을 정해놓고 살기 때문에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많이 가지면 행복할까? 그렇다면 ‘많다’는 것의 커트라인은 어디일까? 결국 이 커트라인은 내 마음에 달린 것이 아닐까!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신30:15).

김성일 집사

cre8tor@naver.com

::To Be Succeeded

하나님 우리 아버지

언젠가 꿈에 내가 걸어가는데 발목에 뭔가 족쇄처럼 매달고 가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놀랍게도 쓰레기였다. 주님께서는 그것이 성령의 불로 깨끗이 태워버려야 할 염려와 근심임을 알려주셨다. 주님을 믿노라 하면서, 의지한다 하면서 결국 염려와 근심을 내가 주렁주렁 달고 다녔던 것이다. 부끄러웠다.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함(히12:1~2)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 중 하나다. 어느 시골 할머니가 무거운 짐 보따리를 힘겹게 머리에 이고 걸어가시는 게 안타까워 버스 기사가 차에 태워드렸는데 가만히 보니 차 안에서도 그 짐을 머리에 이고계시더라는 거다. 짐 내려놓고 편히 가시라고 했더니, 차에 태워준 것만도 고마운데 짐을 어떻게 내리냐고 하셨다는 웃지 못 할 에피소드다.

이 이야기는 나를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나를 세상 끝 날까지 책임지고 인도하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은 아닐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또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간과할 때가 많은 것 같다.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확증’하셨는데도 말이다(롬5:8).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성경은 단언하고 있다(히11:6). 아브라함을 비롯한 수많은 믿음의 선친들이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그야말로 정금과 같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속을 시원케 해드렸지만, 반면에 하나님에 대한 불신으로 하나님을 슬프시게 한 자들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아 생명길로 향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말씀하신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벧전5:7),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시다. 그분은 항상 더 좋은 것으로 주시고,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니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자.

이국진 사모

소망의 언덕

감사합니다

토요일 중고등부 예배 때 무척이나 뜻 깊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다름 아닌 동작기도처 식구분들을 초청해서 지난 9년간의 보살핌에 감사하는 시간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많은 분을 모시고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었지만, 코로나로 인해 교구를 대표하시는 조장님, 권사님, 그리고 전도사님께서 노량진 교육관을 찾아주셨습니다.

설교 전에 그분들을 단상에 모시고 꽃다발을 전달해드리고 축복송을 불러드렸습니다. 찬양 후 “감사합니다! 전도사님, 장로님, 권사님, 조장님, 집사님~~”, 어린 자녀, 손주뻘 되는 중고등부 학생들이 크게 감사를 외치자 교구 식구분들은 깊은 감동에 빠지신듯했고, 기뻐 어쩔 줄 몰라 하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늘 ‘당연히 할 일을 했다’고 하시는 분들이셨지만, 요목조목 따져보니 하나도 당연한 일이 없었습니다. 기도처에서 으레 당연하게 누리던 모든 것이 그분들의 섬김이었고 희생이었습니다. 어린 학생들이 일찍부터 예배를 준비하는 모습이 기특하다며 때론 점심을 손수 지어 주시기도 하셨고, 예배 후에 집에 가는 길에 허기질까 특식을 만들어주셨으며, 화장실에서는 오물이 묻은 휴지통을 언제나 깨끗하게 비워주셨습니다. 저희가 미흡하게 사용하여 불편하신 일이 있어도 눈치 한번 주는 일 없이 마음껏 사용하도록 배려해주었습니다. 그 사랑과 섬김으로 인해 교육관을 위해 기도하며 인내하는 동안 지치지 않고 오히려 더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지난 JC아카데미 때 이시대 목사님께서 우리 교회는 어르신들과 젊은이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교육해주셨습니다. 총회장 목사님을 도와 지금까지 교회를 이끌어주신 어르신들이 존경을 받는 교회, 어른들은 자라나는 어린 자녀들을 존중해주며, 젊은이들은 어르신들의 지혜를 배우기에 힘쓰는 아름다운 모습이 함께 어우러지는 교회가 되자고 하셨습니다.

‘흐르는 물 한 컵을 떠준 은혜도 잊지 말라’고 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분명 감사는 코로나의 어둠을 뚫어내는 돌파구였습니다. 중고등부와 제가 그랬던 것처럼 성도님들께서도 작은 감사로 시작해서 큰 은혜를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현승 목사

책을 펴다

상상력을 제한하지 말라

소나무는 대개 35m까지 자란다고 한다. 그런데 왜 분재용 화분에 담긴 소나무는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 성장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분재 기술자들의 손길 때문이다.

그들은 분재의 성장을 막기 위해 매년 정기적으로 나무의 뿌리와 꼭대기에 있는 가지를 계속해서 잘라준다고 한다. 또 뿌리가 내릴 만하면 화분을 갈아주어 성장할 수 없게끔 계속해서 스트레스를 준다고 한다. 오로지 그 소나무가 생존할 수 있을 만큼만 허용하고 그 외에 모든 성장 조건을 차단해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 그대로 두면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오를 수 있는 소나무를 일개 조그마한 화분 속에 담아버리는 것이다.

사람도 이와 별반 다를 게 없다. ‘난 안 돼’, ‘여기까지가 내 한계야’ 하면서 스스로 자포자기하는 것은 한참 성장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이라는 나무의 뿌리와 꼭대기의 가지를 잘라버리는 어리석은 행위와도 같으며, 이처럼 스스로 한계를 긋고 제한하고 포기하는 것은 분명 자기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제한하는 믿음 없는 행동이다.

코이라는 잉어가 있다. 그런데 코이는 작은 수족관에서는 3~5센티밖에 안 자라지만, 큰 어항과 연못에 넣으면 12~15센티까지 자라고, 강물에 넣으면 90~120센티까지 자란다.

사람도 코이처럼 생각의 크기에 따라 인생의 크기가 달라질 수 있다. 생각의 크기, 곧 상상력이다. 상상력이란 ‘마음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영상(映像)을 만들거나 경험을 초월한 세계를 만드는 정신적 능력’이다. 이를 성경에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1)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14:12).

당신은 무한대로 뻗어나갈 수 있는 나무다. 상상력을 무한대로 키우면 그것이 성장점이 되어 때가 되면 아름드리나무가 되리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이초석 목사 저서 ‘사랑이 무르익어야

결혼에 골인한다’ 중에서

빛이 되리라

순종하면 돼

얼마 전부터 내가 속한 청장년부도 88체육관에서 대면으로 수요예배를 드리라는 목사님의 말씀이 있었다. 오랫동안 온라인 예배에 젖어있기도 했고, 먼 거리로 인해 포기해야 할 일도 많아서 첫 주에는 집에서 온라인 예배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주 수요일 아침에 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 총회장 목사님께서 2체육관에 사람이 많이 오지 않을 걸 걱정하시며 누가 오고 있는지, 누가 안 왔는지를 남들 모르게 체크하고 계시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 모습이 내 마음에 걸렸다. 나라도 체육관으로 오길 원하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청년부와 청장년부가 함께하는 새벽기도 모임이 끝나고 담당 목사님께서 다시 한 번 말씀하셨다. 오늘 수요예배는 체육관으로 참석해달라고 하셨다. 벌써 두 번째다. 그러나 아직도 내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오후가 되니 갑자기 동생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오빠, 오늘 철야 체육관으로 올 거야?” 첫 이야기가 이 말이었다. 벌써 세 번째다. 전화를 끊고 나서 ‘오늘 체육관으로 안 갔다가는 큰일 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오라고 여러 차례 사인을 주시는데 경고를 무시했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결국 체육관으로 가서 은혜롭게 예배를 잘 드렸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총회장 목사님께서 다시 내 꿈에 찾아오셨다. 목사님의 차를 타고 내 평생 가보지 못한 최고의 식당으로 목사님과 함께 식사하러 가는 꿈이었다. 잘했다고 주시는 상인 것 같았다.

작은 간증이지만 나 같은 부족한 자에게도 이렇게 관심을 가지고 늘 독려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사실 목사님이 하라면 하면 될 일이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체육관에 오라면 오고, 잠시 멈추라면 멈추면 될 일이다. 나와 같이 주저하고 있는 또 다른 성도님들께도 이 글이 작은 도전의 씨앗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부족하지만 함께 나눠본다.

장명훈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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