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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9호 목차 › Text 주일설교

옳은 길이라면 자존심을 버려라(막7:25~30)

1089호 · 2021-03-21

‘성공과 성취를 택할 것인가, 한순간의 자존심을 택할 것인가?’

성공한 사람들이나 꿈이 있는 자는 자존심을 세우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존심을 버려 꿈을 이룬 뒤 자존감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인류구원’이라는 대업을 이루고자 자존심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최소한의 자존심마저 다 버리고 벌거벗긴 채로 가시면류관을 쓰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부활하사 하늘과 땅과 땅 아래를 다스릴 권세를 얻으셨습니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만일 예수님이 자존심을 내세워 아버지께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달라고 했더라면 우리의 구원은 없었을 것입니다(막26:53).

자존심이란 스스로 자(自), 높을 존(尊), 마음 심(心)으로, 스스로 높아지려는 마음, 자기를 지키려는 마음을 말하는데,

‘자존심을 지킨다’는 것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 참지 못하고 분노를 발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그런 자를 ‘미련한 자’라고 말씀하셨고, 반대로 꿈을 이루기 위해 수욕을 참는 자, 곧 자존심을 버린 자는

‘지혜롭다’ 하셨습니다(잠12:16).

그런 의미에서 마가복음 7장의 수로보니게 여인은 아주 지혜로운 자입니다. 그녀에게는 귀신 들린 어린 딸이 있었습니다. 그녀가 어떡하면 딸을 고칠 수 있을까 노심초사하던 차에 예수님의 소문이 들렸고, 그녀는 물어물어 예수님을 찾아와 딸이 낫기를 간구했습니다. 소문대로라면 당연히 예수님이 ‘그래, 자식 때문에 그간 고생 많았다.’ 하시며 고쳐줄 거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정말 의외였습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7:27). 졸지에 수로보니게 여인은 개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얼굴이 뜨거웠겠습니까? 정말 자존심이 뭉개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위대한 것은 바로 이 장면 때문입니다. 그녀는 그 와중에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막7:28)라고 답한 것입니다. 그녀는 생각했습니다. ‘내가 자존심 지키려고 여기 왔던가. 내 딸을 고치러 온 것 아닌가. 개가 되면 어떠랴. 내 딸만 낫는다면….’ 그런 그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그의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만일 수로보니게 여인이 자존심을 내세워 “아니, 예수님. 못 고치겠으면 못하겠다고 말하지, 개라니요? 내가 개로 보입니까? 내 딸 안 고치면 그만입니다.” 하고 돌아섰더라면 그녀와 딸의 인생은 어찌 되었을까요?

누가복음 15장에는 자기의 분깃을 가지고 집을 나가 허랑방탕하다 모두 탕진한 둘째 아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그나마 잘한 게 있는데, 그것은 자존심을 버리고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나를 아들로 생각지 말고, 품꾼의 하나로 생각해주십시오.”(눅15:19)라고 자존심을 완전히 내려놓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버지 마음은 그저 돌아온 것이 고마워서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주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 아들이 ‘아, 자존심이 있지, 큰소리치고 나왔는데 죽어도 못 들어가.’ 했더라면 그는 계속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나 먹고 살았을 것이고, 나중에는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하면서 극단적인 생각을 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자존심이 첨병이 되면 안 됩니다. 첨병

(尖兵)이란 행군의 맨 앞에서 경계, 수색하는 임무를 맡은 병사를 말하는데, 무슨 일을 진행함에 있어 누가 내 인격을 건드린다고 자존심이 첨병이 되면 일을 망치고, 사고를 치게 되어 있습니다. 다 된 밥에 코를 빠트리는 격이 되고 맙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독일로부터 차관을 들여오기 위해 독일이 요청한 광부와 간호사들을 파견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정말 뼈아픈 역사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존심을 버리고 독일 정부의 요청에 응하고 차관을 도입한 것입니다. 일단 살고 봐야 하니까요. 그리고 우리를 36년 동안 강점했던 일본에게도 차관을 요청했습니다. 한 국가의 자존심, 대통령으로서의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대한민국이 세계 10대 경제대국이 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도 자존심을 버리고 유학시절 쌓아둔 인맥들에게 하소연해서 이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자 애썼습니다. 한 나라를 세우는데, 기업을 세우는데, 가정을 세우고, 큰 꿈을 이루는데 뭔 말라빠진 자존심입니까? 목적을 이루고 봐야 할 것 아닙니까?

테레사 수녀가 빵집에 가서 빵을 좀 기부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빵집 주인은 적선은 고사하고 테레사 수녀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재수 없어, 얼른 꺼져.”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테레사 수녀는 다시 “남은 빵이 있으면 좀 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같이 간 봉사자가 “수녀님, 수녀님은 자존심도 없으세요? 그냥 나가요.”라고 하자 테레사 수녀는 “나는 자존심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야. 아이들에게 먹일 빵을 구하러 온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고아의 아버지 조지 뮬러가 자존심을 앞세웠다면 그 많은 고아들을 먹여 살렸을까요? 아닙니다. 세상 말로 더럽고 치사하고 아니 꼬아도 ‘내 아이들을 먹여 살리겠다.’는 목적과 꿈이 있었기에 다 참아낸 것입니다.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최고의 대학을 나와 결혼까지 잘해서 사모님 소리를 듣던 어느 여인이 있었습니다. 정말 세상 부러울 것이 없고, 자존심 세기로 치면 으뜸인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남편 사업이 부도가 나고, 이로 인해 남편은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버리자 슬퍼할 겨를도 없이 그녀는 생계를 책임져야 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며칠을 고민하다가 자본이 적게 드는 생선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광주리에 생선을 담아 이고 다니며 생선을 팔았습니다. 그런데 무슨 얄궂은 운명의 장난이랍니까? 어느 날 골목을 지나가는데 대학 시절 라이벌이었던 친구가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도 온갖 명품을 다 걸치고요. 그녀는 잠시 멈칫했습니다. 그러나 생각했습니다. “내 상황에 자존심은 사치야. 애들 먹이고 학교 보내야 돼.” 그래서 먼저 “친구야.” 하며 다가갔습니다. 친구는 처음에는 누구인지 몰라보다가 그녀를 알아보고는 놀라 그간 사연을 물었습니다. 사연을 다 들은 친구는 동기들을 수소문해서 이 여인을 도와 번듯한 가게를 차려주었습니다. 살다 보면 자존심을 버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버릴 때 버리는 것, 그것이 진정한 용기입니다.

나아만 장군이 자존심을 내려놓아 문둥병에서 해방되었고, 아브라함이 자존심을 버리고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살아날 수 있었으며, 다윗이 왕의 체면을 내려놓고 자신의 잘못을 하나님께 아뢸 때 용서받을 수 있었습니다. 저 역시 자존심을 기도원에 있는 제 가묘에 다 묻었기에 오늘날 예수중심교단을 세우고, 세계 72개국에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자존심은 절대 밥 먹여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 아닌 나’와 싸워 이겨야 합니다. 내가 살고 봐야 할 것 아닙니까? 사람을 구하고 있습니까? 삼고초려(三顧草廬)에서 배우세요. 누가복음 18장에 재판관을 계속 찾아간 과부처럼 하면 됩니다. 배울 것이 있습니까? 아랫사람에게라도 자존심을 버리고 배우세요. 돈이 필요합니까? 누가복음 11장에 보리떡을 구하러 간 자처럼 자존심을 버리고 구하세요. 당신의 꿈이, 당신의 목적이 옳은 것이라면 자존심을 버려 그 길에 당도하십시오. 자존심을 버려 후일을 도모하십시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

할렐루야!

자존심을 버리고

후일을 도모하라

자존심은 순간이나

꿈은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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