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배기보다 장맛이 좋아야 한다(삼상16:7~13)
“씨앗은 알곡이요, 사람은 중심이다. 씨앗과 사람은 골라 쓰는 것이다.”
이것은 제 목회철학인 동시에 저의 목회 성공비결입니다.
예전 우리 부모님이 농사를 짓기 전에 꼭 하신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볍씨를 물에 담가 두는 일이었습니다. 부모님은 그중 물에 둥둥 뜨는 씨앗은 버리고, 묵직하고 좋은 씨앗을 골라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공한 농사꾼은 씨앗부터 고릅니다. 그렇다면 성공한 사업가는요? 사람을 잘 골라야 합니다. 목회도, 정치도,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잘 골라 쓰면 힘이 되지만 잘못 택하면 짐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3장에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12제자를 택하셨습니다.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이 열 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안인 시몬이며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러라”(막3:13~19).
그렇다면 어떤 사람을 골라야 할까요? 대부분이 사람을 볼 때 그의 학력이나 이력, 집안이나 배경, 미모를 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이런 것들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만, 사람을 볼 때는 그 속을 봐야 합니다. 자고로 뚝배기보다 장맛이 좋아야 하는 법이니까요. 뚝배기만 근사하면 뭐합니까? 그 안에 든 음식이 맛있어야지요. 사울을 왕위에서 폐하신 하나님은 선지자 사무엘을 이새의 집으로 보냅니다. 사울을 이을 2대 왕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이새에게는 여덟 아들이 있었는데, 사무엘은 그의 장자 엘리압을 보고 마음이 동했습니다. 엘리압이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만큼 용모와 신장이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하나님은 이새의 아들 중 가장 어린 막내 다윗을 택하사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행13:22)며 다윗의 중심을 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외면적으로는 내세울만한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기생이 있는가 하면, 과부에, 시아버지와 관계를 맺은 자까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은 그들의 외면이 아닌 내면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면을 보되 어떤 것에 많은 비중을 두어야 할까요? 먼저는 동질성이 있어야 합니다. 쉽게 말해 코드가 맞는 사람을 골라야 합니다. 코드가 맞는 사람과 사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목회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안 그러면 계속 삐거덕 거리고 결국 그것이 사고의 원인이 됩니다. 마라토너에게 가장 힘든 구간은 오르막 코스가 아니라 신발 속에 들어간 모래 한 알이듯 이질감이 있는 한 사람으로 인해 단체가 시끄럽고 아프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해외선교팀은 최고의 동역자요, 파트너입니다. 마음이 맞는 것은 물론이고, 척하면 삼천리고, 툭하면 호박 떨어지는 소린 줄 알 정도로 호흡도 척척 맞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믿음의 사도인 바울과 바나바가 마가의 동행문제를 놓고 대립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신앙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맞지 않아서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갈라섭니다. 아주 잘한 일입니다. ‘인내하자’ 하며 갔더라면 그들은 사명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동질감 중에서도 가장 우선시되어야 할 것이 바로 신앙의 동질성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14절에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고, 신명기 22장 10절에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라고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불신자와의 동업이나 결혼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그것이 쉬웠더라면 하나님이 “안 믿는 자와 결혼해서 그를 구원하라. 불신자와 동업해서 그를 구원하라.” 하셨을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하면 금상첨화이겠으나 그것이 절대 쉽지 않음을 하나님은 아셨기에 의와 불법이 함께 할 수 없으며, 빛과 어둠이 사귈 수 없고,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조화될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고후6:14~15). 시편 1편 1절에도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하셨습니다.
둘째는 충성된 자를 골라야 합니다. 충성(忠誠)이 무엇입니까? 가운데 중(中)에 마음 심(心)이 합해진 것이 충(忠)이니 곧 진심과 정성이요, 말씀 언(言)에 이룰 성(成)이 만나 성(誠)이니 역시 곧 진심과 정성을 뜻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 진심을 다해 성실히 일하는 자, 목적을 위해서는 목숨도 주저 없이 내어 놓는 자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택하신 것이 바로 그런 이유에서입니다(행20:24). 또한 바울도 뵈뵈나 브리스가와 아굴라 같은 자를 택하여 복음의 동역자로 삼았던 것은 그들이 자기를 위하여 목숨도 내놓을 수 있는 충성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롬16:1~4). 다윗에게도 충성된 37명의 용사가 있었지 않습니까(삼하23:23~39)? 저도 저를 위해 눈이라도 빼줄 수 있는 충성된 자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일을 맡기니 교회가 문제없이 잘 가는 것입니다. 본시 곧은 뿌리는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요, 성장은 잔뿌리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모진들이 중요한데, 그들이 충성된 자들이라면 아름드리나무가 되는 건 시간문제 아니겠습니까.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16:10).
셋째는 부지런한 자를 써야 합니다. 성경에는 부지런한 자와 게으른 자가 당할 결말에 대해 많이 써놓았습니다. “게으른 자는 그 부리는 사람에게 마치 이에 초 같고 눈에 연기 같으니라”(잠10:26). 게으른 자와 동업을 하면, 게으른 자와 결혼을 하면, 게으른 자와 목회 하면 그로 인해 이빨을 식초에 담근 것처럼 시큰거리다 이빨이 다 빠지는 형국이 될 것이고, 연기가 자욱한 것 같이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되는 꼬라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게으른 자로 인하여 다 잡은 것도 놓치게 될 것이고(잠12:27), 매일 그 밥에 그 반찬 꼴이 나고, 매일 그 자리에서 빙빙 돌다 침몰하고 말 것입니다(잠26:14~15). 그래서 하나님도 부지런한 아브라함, 야곱, 요셉, 다윗을 택하사 믿음의 역사를 써 내려가셨던 것입니다. 저는 절대 일을 시킬 때 먹고 노는 자를 쓰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일을 시켜보면 항상 핑계나 되고, 안 되는 방법만 찾기 때문입니다(잠26:13).
여러분, “물에 비취이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취느니라”(잠27:19)고 했습니다. 서로를 비춰보면 마음이 보입니다. 화려한 겉모습, 이력에 속지 말고 오래 사람을 관찰하면 물에 얼굴이 비취듯 마음이 보입니다. 조급하지 말고 그 마음을 살펴 사람을 택하세요.
사람을 얻기는 쉽지 않아 전도자는 전도서에 “내 마음에 찾아도 아직 얻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일천 남자 중에서 하나를 얻었거니와 일천 여인 중에서는 하나도 얻지 못하였느니라”(전7:28)고 했습니다. 그러나 얻기 어렵다고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목회 초기에 일할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기도한 대로 사람을 보내주셔서 오늘의 예수중심교단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뚝배기보다 장맛이 좋아야 합니다. 외적인 것에 유혹되지 말고 속을 볼 줄 아는 혜안이 열리기를, 그래서 만사에 형통하길 기도합니다. 할렐루야!
성공한 농사꾼은
씨앗부터 고른다
차별은 옳지 않으나
구별은 해야 발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