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해마다 명절이면 많은 가정에서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기독교 신앙을 지키려는 가족과 유교적 전통을 고수하려는 가족 구성원간에 영적 갈등이 재연되곤 한다. 여기에 타협점이 존재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한 원칙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3~6).
더군다나 우리 예수중심교회처럼 이를 강력히 가르치는 교회가 있을까 싶다. 목사님 스스로 우상을 섬기던 집안에서 이 문제로 인해 가족들로부터 버림을 받으면서 까지 조금의 타협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던 분인지라 목회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항구여일하게 이 신앙의 원칙을 그 누구보다도 강력히 가르치셨다. 하나님을 섬긴다 하면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일을 한다는 것은 모순의 극치요, 어불성설이 아니겠는가. 사도 바울도 고린도교인들에게 대놓고 말했다.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고전10:20~22). ‘네가 하나님보다 강해? 그럼 해보라’, 말도 안 된다는 일침이다.
목사님의 신앙원칙이 ‘신앙에는 절대 타협이 없다’는 것이었고, 사실 이런 강력한 원칙 때문에 우리 교인들은 타협 없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무수한 핍박을 견디어왔다. 매를 맞고, 내쫓김을 당하고, 가정이 쪼개지는 아픔까지도 감내하며 이 신앙의 원칙을 지켜왔다. 우리 성도들이 타협 없는 신앙을 지켜온 힘은 물론 목사님의 강력한 가르침도 있지만, 무엇보다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성경이 응한 사건들이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눅12:49~53).
성령의 불이 떨어졌으니 그 불에 휩싸여 다 함께 타오르든지 그 불이 꺼지든지 양단간에 결정이 날 때까지 이 영적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어디 가정에서뿐인가?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직도 우상제사의 전통이 우리나라 곳곳에 뿌리 깊게 남아있는지라 그로인해 직장에서 내쫓기거나 성도들이 좋은 직장마저 내던지고 나오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꼭 그렇게까지 믿어야 하느냐’는 비아냥거림은 물론 같은 믿는 자들에게조차 도가 지나치다는 지적을 받으면서까지 지켜온 신앙이었다.
이것이 목사님과 함께 우리 예수중심교회를 지켜온 성도들의 신앙이다. 억만금을 준다 해도,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나님을 배반할 수 없다는 신앙의 순수성이 오늘 우리 예수중심교회를 지켜온 힘인 것이다. 이는 세대를 이어 변함없이 지켜가야 할 신앙의 원칙이다. 그래서 목사님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기도하고 성령충만을 잃지 말라고 외치고 또 외치시는 것이다. 이것만이 우리가 모든 영적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넉넉히 천국에 들어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