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안에 머무는 연습
은혜 안에 머무는 연습
여성으로 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한 가지 일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는 것이다. 그중의 한 명이 제인 구달이다. 그녀는 전문적인 학위가 없었지만 동물들을 연구하기 위해 조수 노릇을 마다하지 않았고, 목숨의 위협을 느끼는 순간에도 정글 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제인 구달은 아프리카 밀림 속에서 동물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친구가 되었다. 제인 구달이 밀림 속 동물들과 친해질 수 있었던 방법은 단 하나, 그들 곁에 오랫동안 머무는 것이다. 성급하게 그들에 대해 공부하려 하지 않고 오랫동안 그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그들이 마음을 열 때까지 참고 기다렸다. 동물들이 자신을 믿어줄 때까지 의심스러운 행동을 일체하지 않고 그들이 다가오도록 머물렀다. 시간이 지나자 동물들은 경계심을 풀고 제인 구달에게 다가왔고 친구가 되었다.br>
하나님의 은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인간의 노력이나 필요에 따라 움직이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이용당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하나님을 기다려야 한다. 많이 기다려야 한다. 기다림의 시간 없이 믿음의 성숙은 이루어지지 않으며, 영적 성숙 또한 일어나지 않는다. br>
바쁜 삶은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껏 누릴 수 없게 만든다. 하나님의 은혜는 물과 같아서 물속에 천천히 잠겨 있으며 온몸으로 은혜가 흘러넘치지만, 성급하게 일어나면 겉만 물에 묻는 것과 마찬가지다. 샤워만 하는 것과 목욕 하는 것이 다르듯, 하나님의 은혜에 푹 적셔져야 내가 변하고, 내 삶이 변하고, 나로 인해 가족이, 직장이, 사회가 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매일의 말씀 묵상, 기도, 일상 속에서 경건한 언어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 푹 잠겨라. br>
코로나와 함께 일 년이 넘는 세월을 지나다보니 다들 알게 모르게 무감각해지고 조금씩 나태해져 간다. 이럴 때마다 떠오르는 말씀이 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21:25). br>
겉만 하나님의 은혜로 적셨다면 이런 시기에 곧 마르게 되어 하나님을 잊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 은혜에 푹 적신 자는 마르지 않고 은혜 깊이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정금 전도사
jungkm@nate.com
예배의 회복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4).
항상 들어온 말씀이다. 그러나 오랜 기간 비대면으로 예배를 드리다 보니 나도 모르게 다른 곳에 시선을 빼앗기거나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의 자세가 아닌, 예배를 보고 있는 시청자의 모습이 나올 때가 있었다. 마치 큰 공연을 보듯 관람자의 모습이 내게서 느껴졌다. ‘이래서는 안 된다.’ 얼른 회개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목사님은 늘 인생의 성공은 예배에 달려있다고 말씀하셨다. 가인과 아벨이 제사로 인해 축복과 저주가 갈린 것처럼.
다행히 제한적이지만 대면예배가 허용되었다. 그러나 내가 다짐한 것은 성전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든지 비대면으로 예배를 드리든지 신령과 진정으로, 곧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드리겠다는 것이다. 성전에서만 진정한 예배 자세가 나온다면, 그건 하나님을 의식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의식한 것 아니겠는가.
성경에 예언된 대로 앞으로의 세상은 어찌 펼쳐질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 형식도 바뀌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찍이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나도 그곳에 함께 있노라’(마18:20)고 하셨는지 모른다. 그러나 예배 형식이 바뀔지라도 절대 바뀌어서는 안 될 것은 예배자의 모습과 마음 자세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예배드리는 곳이 곧 성전일 터,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
이은성
es2563@naver.com
나는 그저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수도사 브라더 로렌스의 일화다.
그는 어린 10대 시절 전쟁에 출전했다가 부상을 입어 다리를 절게 되는 불운을 겪었다. 그 후 여러 일을 전전하다가 나이 오십이 넘어 카르멜 수도원의 주방 일을 맡게 되었다. 그는 비록 다리는 불편했지만 최선을 다해 주방 일에 임했다. 음식을 정성스레 만들면서 부엌을 작은 천국이라고 생각했다. 또 자신이 만든 음식을 수도사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항상 감사했고, 하찮아 보일 수 있는 자신의 일이 수많은 교인들 앞에서 설교하는 일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여겨 당당했다.
그렇게 20여 년의 세월을 한결같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방 일을 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다. 수도사들은 점차 그를 존경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그를 수도원 원장 후보로까지 추천한 것이다. 평신도 수도사는 원장 후보가 될 수 없는 것이 원칙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결국 그는 수도사들의 열렬한 지지 속에 수도원 원장의 자리에 올랐다. 사실 그에게 인간적으로 내세울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교육도 전혀 받지 못했고, 다리는 불구였으며, 가정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날마다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힘든 부엌일을 하면서도 “나의 인생은 그저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하며 밝은 미소로 임했다.
어느 날 브라더 로렌스는 국왕 루이 12세의 방문을 받았다. 수도원을 방문한 국왕은 그에게 행복의 비결을 물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폐하, 행복의 비결은 섬기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일본에서 경영의 신으로 추앙받는 마쓰시다 고노스케는 ‘감옥과 수도원의 차이는 감사를 하느냐, 불평을 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했다. 맞다. 감옥과 수도원은 고립이란 점에서 비슷하나 수감된 죄수라도 감사의 마음을 가지면 감옥이 수도원으로 승화되고, 수도자라도 불평의 마음을 가질 때 수도원은 감옥으로 전락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일을 감사함으로 감당하면 천국의 삶을 살고, 불평으로 하면 지옥의 삶을 살 것이다. 2021년 범사에 감사하고 행복하기를 소망한다.
임택함 목사
cjcc1004@hanmail.net
우주와도 바꿀 수 없는 존재
결혼 후 10년이 다 되어서야 아이를 갖게 되어 그 기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막상 낳아 키우다 보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닙니다. 2, 30대엔 무얼 해도 힘들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는데, 서른아홉이 되어 아이를 출산하고 불혹의 나이에 육아를 시작하니 왜 어른들이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아기를 가져야 한다고 하셨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습니다.
아기가 갓 태어난 신생아 때는 하루 동안 2시간에 한 번씩 모유 수유를 하고, 한 달 내내 밤잠을 설치거나 밤을 꼬박 지새우며 보냈습니다. 2~3개월이 되어 수유 간격이 3시간이 되었지만 여전히 아기가 이유 없이 울 땐 그날은 영락없이 한숨도 못 자고 돌봐야 했습니다. 백일이 되니 조금씩 패턴을 찾아 조금 편안하다 할 때 즈음 하루에도 수십 번씩 뒤집어 곁에서 내내 지켜봐야 했습니다. 특히 이삭이는 발육상태가 남달라서 지금 5개월이 갓 지났는데 돌 지난 아기와 같은 키와 몸무게 기록을 경신해서 하루 종일 안아주고 놀아주다 보면 어느새 팔다리가 너덜너덜해집니다.
임신 전에는 모든 생활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갔었는데,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모든 일상이 아기를 중심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아기를 갖기 전에는 귀 바로 옆에서 새벽 알람 소리가 최대 음량으로 울려도 절대 일어나지 못했던 제가 아기가 조금만 ‘엥~’ 소리를 내도 벌떡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아기가 자면 이불은 뒤집어쓰지 않았는지, 숨은 쉬고 있는지, 엎어져 자는 건 아닌지, 5분에 한 번씩 들여다봅니다. 회사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도 아기를 다른 사람 손에 맡기는 것이 불안해서 사무실에 아기 침대와 물품들을 다 가져다 놓고 회사에 출근할 때마다 늘 데리고 가고요, 육아와 회사일, 집안일을 다 병행하다 보니 온몸이 쑤시고 피곤한데도 몇 시간이든 아기가 안아달라면 안아주고, 울면 달래주게 됩니다.
며칠 전, 총회장 목사님께 축복 기도를 받으러 갔는데, 아기를 안고 있는 저를 보시더니 갑자기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온유야, 우주를 준다고 하면 이삭이와 바꾸겠냐?” 저는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며, “아뇨. 절대 바꿀 수 없죠.” 말씀드렸더니, 목사님께서는 “야, 네 엄마가 그랬어! 우주를 줘도 너와는 절대 못 바꾼다니까!”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아… 그렇구나. 엄만 내가 이삭이를 생각하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나를 키우셨구나.’
엄마의 자식 사랑은 그렇습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목숨을 내걸 수 있는 사랑이죠. 세상 모든 엄마의 마음이 이러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과연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실까요? 우리를 우주와 바꿀 수 있으실까요? 당신의 아들 독생자 예수의 피 값으로 우리를 사셨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요? 엄마가 아기의 작은 소리에도 쌩 하고 달려가듯,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십니다. 젖먹이 아기가 젖을 달라며 악쓰고 울면 엄마가 바로 달려가 젖을 물리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한 것을 아시고 미리 준비해주시지요. 사춘기 소녀가 엄마의 마음에 상처를 내도 기다리는 것처럼, 우리 마음이 세상에 빠져 요동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깨닫고 돌아오길 바라며 기다리십니다. 우주를 주어도 바꿀 수 없는 사랑,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준대도 절대 바꿀 수 없는 존재, 그건 바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일4:9).
김온유 집사
풍성한 삶으로 초대
지난 한 해는 나에게 참으로 힘든 해였다. 3년 전, 제주도내 한 대학의 교수로 부임하면서 가졌던 기대와는 달리 시간이 흐를수록 회의감이 들더니 결국 낙심과 우울의 골짜기에 빠져들었다. 돌이켜보니 “하나님, 나에게 왜 이러십니까? 언제까지 이렇게 놔두실 겁니까?” 마음 한쪽에서는 섭섭함과 분노가, 또 다른 한쪽에서는 하나님과 그분의 선하신 뜻을 신뢰해야 한다는 생각이 뒤섞여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생활의 연속이었다. 이때 나를 하나님 앞에 머물도록 붙잡아 주고 풍성한 삶으로 초대한 것이 바로 ‘묵상’이다.
‘말씀을 읽는 것’, ‘말씀을 묵상하는 것’,
‘말씀대로 사는 것’, 이 세 가지는 다른 차원의 의미를 지닌다. 누구나 말씀을 읽는다. 하지만 누구나 말씀을 묵상하는 것도 아니고 말씀대로 사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30대 중반까지만 해도 말씀을 읽기만 했다. 그러면서 다윗이, 요셉이, 모세가 나일지도 모른단 생각만 했다. 다윗을 만들고 요셉과 모세를 만드신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지 못하고 말이다. 묵상하며 하나님과 소통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말씀을 읽다 ‘말씀’과 부딪히는 충격을 받은 순간 회개하며 아파했던 경험을 한 후 그저 읽는 것이 아니라 묵상하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절망 가운데 소망을 보게 되고, 막막한 문제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생각과 뜻, 그분의 사랑을 보게 되었다.
총회장 목사님께서 설교 때 늘 하시는 말씀이 있다. “먹어보지 않고서는 고기 맛을 알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없다.” 하나님의 마음을 정말 잘 알고 거기에 딱 들어맞는 사람인 다윗 역시 그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다. 다윗은 하나님께 묻고 그분의 음성에 귀 기울이기는 삶, 눈이 시리고 아플 정도로 말씀을 사모하고 읊조리면서 묵상하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다윗은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체험했다. 이것이 바로 묵상하는 삶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는 목적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위함이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마음과 삶, 그리고 생각을 나누면서 인격적인 교제를 맺는 것이다. 즉 깊이 묵상하며 말씀 앞에 서면 나 자신이 보이고 하나님이 보인다. 그분의 생각이 보인다. 그럼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깨닫게 되고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 그 길 또한 보이기 마련이다. 묵상의 습관은 우리를 성공적인 묵상가로 만드는데 있지 않다. 묵상은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인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물론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시34:8) 되는 것이다.
나는 시편 말씀을 좋아한다. 힘들 때마다 자주 묵상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작년 12월, 시편 46편을 묵상하는 가운데 내 속에 들어온 말씀,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너희는 가만히 있어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이 말씀이 내 맘에 들어와 내 삶이 풍성해졌다. 정확히 말하면 생각과 마음이 풍성해졌다. 이로 인해 지난 한 해를 잘 마무리하고 2021년을 맞으며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말씀 앞에서”란 찬양의 가사처럼 하나님 말씀에 두려워 떠는 자, 그 말씀에 생명을 거는 자, 이런 믿음을 가진 우리가 되길 소망한다.
Dr. 권정미
jmgood77@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