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으며 살자
웃으며 살자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루소가 평소 알고 지내던 친구의 방문을 받았다. 그들은 저녁식사 후에 산책을 나갔는데, 루소가 평소 자주 가는 연못이었다. 연못에 이르자 루소가 친구에게 말했다.
“여보게, 나는 이 연못에서 스무 번이나 투신자살하려고 했었지.”
루소의 말에 친구는 깜짝 놀랐다. 가장 친한 친구가 자살을, 그것도 여러 번 생각했다는 말에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친구가 물었다.
“왜 자살을 하려고 했던 거야?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나?”
친구가 묻자 루소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저 물속에 손을 넣어 보았더니 너무 차가워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진정한 유머는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온다. 그래서 유머는 ‘까르르’ 웃는 박장대소(拍掌大笑)를 자아내기보다는 조용한 미소를 짓게 한다.
‘요새 못생긴 사람을 용서해도, 유머 없는 사람은 용서 못한다.’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유머는 곧 지혜의 산물이다. 지혜는 메마르고 강퍅한 세상에 단비를 뿌리며, 장마철에 잠깐 나는 햇볕과 같다. 또한 유머는 리더십의 기술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을 이끄는 데는 유머가 반드시 필요하다. 명령에는 복종만 존재하나 유머있는 지도자와는 공감대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논리적인 사람에게는 코미디 같을 수 있다. 그러나 유머는 사람의 두뇌 활동 중에 가장 중요한 활동임을 알자. 그러니 유머 한 마디, 당신 마음의 포켓을 준비하라.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잠25:11).
이초석 목사 저서
“사랑이 무르익어야 결혼에 골인한다” 중에서
믿음의 경주자
토요일 낮, 일주일간의 학교생활을 마치고 신이 난 아이들과 자전거를 끌고 공원에 갔다. 이제는 제법 자유롭게 타는 딸을 지켜보다 안심하고 한적한 곳에 따로 앉아 있는 중에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딸이 자전거를 타다 넘어졌는데 발목이 자전거에 꽉 껴서 어쩌지 못해 119구조대에 신고했으니 어서 와보란 전화였다. 가보니 사람들이 몰려있는 가운데 딸이 엎드리지도 못하고 앉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자세로 발목이 낀 채 울고 있었다. 매우 심각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웃을 수도 없는 것이, 딸이 겁이 나서 더 우는 듯해서였다. 놀란 아이를 다독이는 사이에 구조대와 의료진이 도착해서 한참 애를 쓰신 후 무사히 발목을 뺄 수 있었고, 감사하게도 아무런 이상이 없어 곧바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날 아침에 ‘두려워말고 놀라지 말라’는 이사야 41장 10절을 함께 암송했던 것을 떠올리며 딸은 그 순간에 두려워했던 게 부끄럽단다. 전 같으면 엄마인 나도 맘이 위축됐을 테지만 이번엔 감사를 선택하기로 했다. 그리고 ‘비록 위험한 순간이었으나 마치 자기 딸인 것처럼 애쓰며 돕는 분들을 붙여주시고, 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무사하게 하신 것을 봐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신 거다’라고 얘기해주니 아이 얼굴이 한결 밝아진다.
힘겨울지라도 번데기가 스스로 껍질을 벗고 나와야 아름답게 날아오르는 나비가 되고, 병아리가 스스로 알을 깨고 나와야 프라이가 아닌 병아리가 되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이루기까지 믿음의 연단을 거쳐야 한다.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과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은 과정의 어려움과 고통만을 묵상하며 쉽게 낙담하지 않는다. 마치 마라톤 선수가 42.195km의 길고 고단하며 외로운 경주를 할 때, 과정에서 오는 어려움에 매몰되지 않고 결승점을 바라보고 끝내 완주하여 환희와 기쁨에 찬 희열을 만끽하는 것처럼 말이다.
거친 파도가 유능한 해군을 배출하는 것처럼, 크고 작은 환난을 통해 인내를, 인내를 통해 정금 같은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크신 계획을 깨닫는다면, 비록 어제까지는 두려워하고 낙담했을지라도 이제는 소망 가운데 즐거워하고 감사하며 찬송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것이 우리 믿음의 경주자들의 모습이다.
이국진 사모
주님의 사랑
주일예배를 마치고 교제의 시간을 갖고 있는데 집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TV가 깨졌어요.”
“뭐라고? 어쩌다가….”
“하이가 칼로 깼어요~~”
하이는 이제 18개월 된 셋째 아들입니다. 자기 형 장난감 칼을 휘두르며 놀다가 그만 TV를 깨뜨린 것이었습니다.
평소 TV를 많이 시청하지는 않지만, 지난 8개월 동안 우리 집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귀한 가전제품이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시작된 온라인 수요예배와 주일예배, 그리고 매일의 새벽기도와 가정예배 때마다 큰 화면으로 예배드릴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일 일정을 모두 마치고 귀가할 때가 되니 낮에 받았던 연락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아~TV를 고치려면 수리비가 제법 나올 텐데…. 산 지 1년도 안 됐는데.’
수리도 수리지만 불필요하게 에너지와 시간을 쓸 생각에 조금은 짜증도 나고 화가 났습니다. 요녀석을 따끔하게 주의를 줄 요량으로 집에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아빠빠~~~”, 박수를 치며 넘어질 것 같은 불안한 뜀박질로 하이는 제게 달려왔습니다. 그러고서는 TV 옆에 서서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깨써 깨써….”
저는 그 순간 자기의 잘못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아빠에게 달려오는 아이를 바라보며 웃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저 스스로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TV가 깨진 것으로 인한 불편한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오직 아들을 향한 사랑과 기쁨만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아~~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구나. 내가 실수했더라도 숨지 않고 아버지 품에 뛰어나올 때 기뻐하시겠구나.’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18:3).
혹시 하나님 앞에 잘못한 일을 하셨나요? 지난 시간들로 마음이 위축되신 분이 계신가요? 우리 주님은 두 팔을 벌려 당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은혜의 현장, 예배의 자리로 힘껏 뛰어나가 주님의 품에 안겨보세요. 주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현승 목사
예수 이름의 권세
꿈에서 저는 악한 영을 상대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한 사람이 나타나서 저를 도왔고 ‘이겼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꿈에서 깬 후에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즈음에 귀신과 싸우는 꿈을 몇 번 꾸었는데 이겼다고 생각한 꿈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그것도 내가 아닌 다른 이의 도움으로 이겼기 때문입니다. 예수 이름의 권세를 잃었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기도하는 자로서 이 권세를 잃었다는 것은 영적 싸움에서 지는 것뿐만 아니라 곧 포로로 잡힐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반드시 회복해야 합니다.
그 다음날, 꿈에 나온 그 사람이 실제로 제게 도움을 주었고, 제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었는지 확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의 영적인 상태는 흉악의 결박으로 꽁꽁 묶여 있었습니다. 이것을 끊어내기 위해 금식을 하며 잘못한 것들을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죄를 짓지 않도록 말과 행동을 조심하며 애썼습니다. 그 이후에 또 귀신과 싸우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번에는 귀신의 머리채를 휘어잡으며 간단하게 제압했고, 예수 이름의 권세를 멋지게 회복했습니다.
기도는 영적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 군사가 가진 가장 큰 무기는 ‘예수 이름의 권세’입니다. 영적 싸움을 하기 전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기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먼지가 깊게 쌓이고 녹슬었거나 혹은 잃어버렸다면 얼른 나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며 깨끗해져야 합니다. 점검을 마친 후에는 누구와 싸울 것인가 그 대상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닌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의 싸움(엡6:12)’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사람을 무기로 싸움을 걸어오기 때문에 자칫 우리는 싸워야 할 대상을 사람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사람을 향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오로지 악의 영을 대적해야 합니다. 사람에 대하여서는 어떤 도발에도 묵묵히 참아야 합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심지어 누가 알아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영적 싸움은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으로 일하게 하는 것이다. 가장 위대한 자는 기도로 하나님을 움직이는 자이다.’라고 늘 외치시는 총회장 목사님의 말씀을 다시 상기합니다. 이제 우리 각자는 영적 군사가 되어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대한민국 전국 각 처소에서 올려지는 예수중심교회 성도들의 기도가 마귀의 궤계를 파쇄하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보좌를 두드릴 때 이 나라에도 하나님께서 대사를 행하실 것입니다(시126:1~6).
지난 글에 조선의 임진왜란에 나타난 하나님의 흔적을 전하면서, 지금은 예수님의 전략과 지혜가 필요한 때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 이름의 권세로 악한 마귀를 대적하고 더러운 귀신을 내쫓으며 온전히 하나님이 일하실 것을 선포하는 기도보다 더 강력한 해결책은 단언컨대 없습니다.
박영신
rubyday0@naver.com
내 가족
조실부모하고 고아원에서 자란 남편은 9년 만에 얻은 딸을 애지중지 예뻐했다. 평소 술을 좋아했던 남편은 사고로 허리를 크게 다치고부터 하루 일과를 그저 술로 보내는 날들을 이어갔다. 그런 남편은 간경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엄청난 피를 토하던 날 늦은 밤, 남편을 증오했던 나는 눈물이 강을 이루는 회개를 하였다. 부스스 일어나 그런 나를 그윽한 눈빛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편은 다음날 스스로 알코올 치료병원을 찾아 입원하였다. 그 후 평화가 우리 가정에 찾아왔다. 병원에서 잦은 외출을 통해 정을 나누며 가족의 사랑과 건강을 되찾아갔다.
십여 년이 흘러 나는 식당을 시작했고, 남편은 퇴원하여 배달을 도왔다. 퇴원 후 남편은 도수가 약한 곡물주를 마시며 알코올 의존도를 낮춰왔고, 무사히 지금껏 든든한 가족의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얼마 전, 퇴행성 고관절 수술로 한 달 넘게 입원한 아빠에게 매일 병문안을 다녔던 딸은 “재활 열심히 하고 빨리 퇴원하세요.”, “배달 안 해도 되니 가게 오셔서 옆에만 계셔주세요. 그래야 마음이 든든해요.” 하며 애틋한 사랑을 표현했다. 나는 남편을 상대평가에서 절대평가로 인식을 달리했고, 남편의 습성이 바뀌길 기다림보다 내가 먼저 바뀌는 게 편하다는 걸 알게 되어 남편을 전도하며 가정에 사랑의 온기를 만들고자 노력했다. 이른 새벽 남편의 핸드폰에는 늘 예수중심교회 예배가 검색되어 있었다. 예수님을 향한 사모하는 마음이 느껴져 안도한다.
퇴원한 남편은 오늘도 한 손은 목발을 잡고, 힘겨워하는 딸을 조금이라도 돕고자 한 손은 배달통을 들고 한발 한발 내딛는다. 남편은 등한시하고 이웃에게 친절을 베푸는 이중적인 예전의 내 모습이 되살아날까봐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내 가족부터 사랑하자!’
추성숙 집사
